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1/01 [14:03]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대체 온유한 자가 누구이기에 복이 있는 것일까? 보통 온유한 사람을 온순하고 부드러운 천성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 매사에 화를 내지 않고 큰 소리 치지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받아들이 사람을 향해 온유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자기 의견이 강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고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에게도 좋게 표현을 해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한 사람은 그런 천성이나 그런 조용한 성격이나 태도를 지닌 사람이 아니다.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

우리말 ‘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라우스’는 길 들여진 온유함, 가르침을 통해 변화된 온유함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된 성품, 믿음으로 성숙해진 성품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온유함은 하나님에게 속한 온유함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온유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온유함이다.

온유가 무조건 부드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심각한 오해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화도 내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길들여진 야생마가 주인 앞에서 순한 양 같을 때도 있지만, 주인과 함께 거치른 벌판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폭주할 때도 있다. 주인이 원할 때는 불같이 변하기도 한다.

모세와 예수님이 그 좋은 예이다. 성경에 온유함에 관한 말씀은 수십 번 나오지만, 온유하다고 불린 사람은 모세와 예수님 단 둘뿐이다. 예수님을 제외하면 모세가 유일하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하나님은 모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모세의 천성은 결코 온유하지 못했다.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자기 동족이 애굽 사람에게 핍박을 당하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군사를 쳐 죽였던 거친 사람이었다. 그 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숨어지내다 80세가 된 어느 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라고 말씀하셨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세가 종이 되기를 원하셨다.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주인이 없는 거친 야생마처럼 제 마음대로 날뛰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거친 천성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한 마디로 온유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거룩한 분노

그 후 모세는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백성들이 자기를 향해 불평을 하고 불만을 품어도 노를 발하지 않았다.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게 대했다. 그들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두 돌판에 십계명을 적어주셨다.

모세가 기쁜 마음으로 그 돌판을 들고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며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모세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적힌 십계명을 들고 내려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분노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칭찬하신 모세가 분노했다.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출 32:19-20). 이 말씀만 놓고 본다면, 모세는 유순하거나 조용한 성품이 아니다. 그는 거칠고 분노하고 공격적인 성품을 지녔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마 11:29)라고 말씀하실 만큼 한결같이 온유하셨다. 특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소외된 세리와 병든 자들, 죄인 취급을 받던 창기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한없이 부드러우셨고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다.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실 정도로 친절하셨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셨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 2:13-15).

유월절은 유대인 최고의 절기로, 각처에 흩어져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유월절을 지킨다. 그러니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내쫓으시고, 돈을 쏟아버리시고, 상을 엎으셨으니, 성전이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보았을 때, 행패도 그런 행패가 없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모세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단순히 성품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때로는 분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서, 경쟁에서 뒤졌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 수 없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무시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손상될 때, 하나님의 집이 더럽혀질 때 분노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한다.

온유한 사람은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교회가 상처를 입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의 강요를 당했을 때, 조용히 고분고분하게 군소리 없이 신사를 향해 절했던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신사참배를 극렬히 거부하고 항거했던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이 참으로 온유한 사람들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하셨던 모세가 자기 이름으로 된이 땅이 한 평이라도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아니, 모세는 그렇게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느보산에 올라가서 바라만 보았을 뿐 들어가지도 못했다.

나는 온유하니 내게서 배우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또 어떠셨는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돌아가실 때도 겨우 남의 무덤을 빌려 장사되셨다가, 그나마 부활하셔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 무덤도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땅이 이 세상의 땅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다. 새하늘과 새땅이다.

약한 자들을 돌보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부드러운 친절을 베풀며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에는 분연히 항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친 야생마가 되어 질주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거룩한 열정을 발하는 온유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천국을 그들의 기업이 되게 하신다.

모세를 비롯하여 요셉, 베드로, 바울 등 성경의 영웅들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거칠고 난폭하고 비열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결코 온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졌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을 복종시켰다. 성령의 성품으로 변화되었다. 약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한없이 사랑을 베풀면서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 악의 무리들에 대해서는 거룩하게 분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셨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을 주셨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들의 이름은 천국 복음의 맨 앞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우리가 온유하다면, 우리가 성령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약한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의 마음에도 천국이 임할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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