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박옥수의 대한예수교침례회(기쁜소식선교회)를 중심으로

정동섭 | 입력 : 2014/05/22 [10:21]
현재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단은 안상홍증인회(하나님의 교회), 무료성경신학원(신천지 교회), 그리고 구원파(대한예수교침례회와 기독교복음침례회)이다. 이단은 지도자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추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단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영혼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며, 가정을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유병언과 이요한, 박옥수라는 세 인물이 이끌고 있는 구원파는 사이비기독교로서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사상 도덕률(율법)폐기론과 영지주의가 2000년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침례교를 빙자해서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구원파의 세력은 본래 외국에서 들어온 이단이라 할 수 있다. [유병언/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 이요한(이복칠)의 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의 대한예수교침례회 중앙교회파, 서달석의 서울중앙침례교회]는 모두 미국의 헬리콥터 조종사 Dick York과 화란인 독립선교사 Kaas Glas의 사상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현재 구원파는 크게 5계열로 나뉘어서 활동하고 있다. 유병언씨는 서울 삼각지에, 이요한 씨는 안양시 인덕원에, 박옥수 씨는 대전시 변동에, 서달석 씨는 광명시 철산동에, 윤방무는 미국 L.A.에 본부를 두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구원파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단이 아니라, 정통기독교를 부정하는 미국의 돌팔이 선교사에 의해서 수입된 이단이다.

국내적으로는 유병언과 그의 장인 권신찬이 모두 장로교(통합측) 출신이기 때문에, 장로교회에서 파생된 사이비 침례교 또는 사이비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분파 현황

⑴ 권신찬, 유병언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한국의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는 1962년 경북 대구에서 고 권신찬과 그의 사위 유병언에 의해 시작되었다. 권신찬은 대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10년간 경북지방에서 장로교목사로 목회를 하였으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1961년 11월 8일 설교 준비를 하던 중 로마서 3장 2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십수년간 내 양심을 칭칭 동여 매었던 죄의 사슬이 한꺼번에 풀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얼마 후 그는 네델란드 선교사 Kas Glaas(길기수)에게 침례를 받음으로 경북노회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았다.

구원파의 실세인 유병언은 같은 시기에 대구서문교회에 다니다가 1962년 4월 7일 미국인 독립선교사 Dick York의 설교를 듣다가 “복음을 깨달았다.” 유병언은 1961년 외국인독립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성경학교에서 박옥수, 이종섭, 유강식, 심남섭, 김성준 등과 함께 공부하다가 그 무리에서 이탈하여 권신찬과 손을 잡고 그들 나름대로 포교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서울의 극동방송에서 한국어방송을 담당하던 권신찬과 유병언은 1977년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으로 활동하다가, 그들의 이단성이 탄로나면서 1973년 방송국에서 밀려나 삼우트레이딩을 인수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이 회사는 후에 (주)세모로 발전하게 되어, 오대양사건으로 일으키는 토양을 마련하게 된다. 1981년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교단이름을 사용하여 기존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오대양 사건 이후 사업에만 주로 전념하고 있는데 그 교세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길]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내고 있다. 본부의 소재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231-23 서울교회로서 통상 삼각지교회로 불린다.

⑵ 이요한(이복칠)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본명 이복칠)은 목포출신으로 권신찬의 수제자이며, 그에게서 목사 안수를 받은 거짓 목사이다. 이요한 계열은 유병언이 교회의 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삼아 기업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유병언 파를 비난하면서 교회와 기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1983년 분파되었다. 공주에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안양 인덕원과 광주를 중심으로 3만 명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 아래 활동하고 있으며, 본부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239-1 삼원빌딩 4층 서울교회이다(안양시 인덕원에 교회당을 새로 지어서 이전했다). [생명의 빛]이라는 월간지가 나오고 있다.

이요한 계열은 권신찬, 유병언 계열에서 분파되었기 때문에 신조마저 유병언계의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12개항을 약간 수정하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라는 10개항을 만들 정도로 거의 유사하다. 종말론에 있어서 약간 다른 요소가 있으나 구원관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으로 이 글에서는 권신찬, 박옥수를 중심으로 구원파의 이단성을 파헤치기로 한다. 이요한 계열은 전국적으로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⑶ 박옥수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는 중학교 3학년 중퇴생으로서 체계적인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고 Dick York과 권신찬의 영향을 받았으며, Dick York에게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옥수 씨는 경북 낙동강 유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1962년에 대구에서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구 계명대학교 앞에서 1983년까지 단독 목회를 하다가, “서울제일교회”를 담임하기도 했고, 1984년부터 대전 변동에 한밭중앙교회(기쁜소식선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 대도시의 체육관을 빌려 성경세미나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4박 5일의 일정으로 경북 김천에 기쁜소식선교회 수양관에서 여름수양회를 주관하고 있다. 기쁜 소식선교회의 이름으로 [죄사함, 거듭납의 비밀]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무료로 배포하며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군부대와 교도소에까지 침투하면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기쁜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내고 있다.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대전 변동에 있는 한밭중앙교회(기쁜소식선교회)를 본거지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서울 서초두 양재동 183 소재 서울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흥회 대신 성경 강연회 또는 성경 세미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세 계파의 공통점이다. 성경을 이지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책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은 5-7일 집회를 통해 기존정통교회를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만든 후에 참석자들의 세계관과 교회관을 바꾸어 놓는다.

권신찬(유병언), 이요한, 박옥수는 회개를 부인하는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사상으로 인하여 199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7회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성경을 억지로,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대부분이 체계적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성경해석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관을 강조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억지로 해석하기를 서슴치 않는다(예: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등). 성경은 무식한 자들이 성경의 역사, 문화, 문법, 신학을 무시하고 말씀을 억지 해석하여 이단을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벧후 3:16). 성경은 우리의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를 위해 죄인들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구원파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깨달아야 할 책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부흥회나 심령부흥회, 사경회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성경 강연회 또는 성경 세미나라는 표현으로 현대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단이 있다. 첫째는 성경 외의 자기 계시, 즉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이단이 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와 같은 이단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성경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있다. 둘째 이단이 첫째보다 훨씬 더 무섭고 해악이 크다. 드러난 질병보다 숨은 질병이 더 무섭다. 이단은 그 본성이 미혹하는 자요, 속이는 자요, 노략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이단성을 효과적으로 숨기려 한다. 구원파는 성경을 믿는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그 미혹성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신학적으로 구원파의 이단성은 어디에 있는가?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 구원파의 여러 계파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종합 사이비이단연구보고집, 2001):

① 구원관이 잘못되었다.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② 회개관이 잘못되었다.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③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

④ 정통교회의 제도(장로, 집사)와 예배형식,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철야기도, 축도를 무시한다. 종교와 복음,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구분하여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1. 신관이 잘못되었다. 하나님은 인격이 아닌 영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지 않고, 이신론적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을 주로 인류 역사, 특히 중동 정세를 주관하는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힘으로 부각시킨다. 구원파에서 전하는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그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이신론적인 존재일 뿐, 우리를 사랑하셔서 개인적으로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성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부인하거나 격하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반응에 따라 뜻을 돌이키시기도 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보여준다. 구원파의 대부격이 권신찬은 “영을 자기의 인격적인 활동과 혼돈하여 인격의 일부인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써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양심의 해방, p.9)고 말하고 있다.

구원파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는 전제하에 복음을 깨달아 구원받는 것, 예배하는 것, 기도하는 것 등 모두를 “영, 즉 양심의 활동”으로 제한시키고 있다. 영의 세 가지 기능, 직관, 영교, 양심 가운데서도 특히 양심의 기능만을 강조하여 죄책감에서의 해방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기도, 찬양, 예배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행태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권신찬은 말한다. “예배는 형식을 갖춘 의식이 아니라 영의 동작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갖추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예배의 형식은 이교도의 제사의식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짙다”(세칭 구원파란, p.23).

한편 구원파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의 인성을 무시하거나 극히 경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이단성은 역시 그들의 구원관에 있다.

2. 구원관이 잘못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였다. 그러므로 구원문제는 기독교의 최초의 문제이면서 최후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원파에서도 죄사함과 구원을 강조하나 이들은 다른 의미의 구원을 전하고 있다. 구원파는 특히 구원론에서 곁길로 빠지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이단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파는 이단 중의 이단이다. 대개 이단은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생겨난다..

(1) 구원파의 세 계파는 사람을 “죄덩어리”로 규정하여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박씨는 죄(원죄)와 범죄(자범죄: 도둑질, 거짓말, 살인, 간음 등)를 구별한다. 박옥수가 말하는 죄는 아담의 원죄(original sin)를 가리키고, 범죄는 우리의 자범죄(present sins)를 일컫는 것이다. 죄와 죄의 증상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문제는 그가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단의 특징은 성경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서 그 의미를 바꾸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박 씨는 인간을 죄의 종, 사탄의 종으로 표현하면서,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죄악 덩어리, 죄 투성이”라고 설명한다([내 죄벌이 중하여], 2003, p.160). 원죄란 아담이 범죄한 후 인류의 삶을 옭아매며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범죄하도록 만드는 힘있는 그 무엇이다. 자범죄란 이 힘에 의해 범한 악행을 의미한다.

박옥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죄에 대한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인데, 기성 교인들이 죄를 회개하거나 고백하지 못하고 계속 범죄만 회개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었을 때 의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죄인이라고 하면 역시 구원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으로 정죄해 버리는 것이다. 이점을 직접 그의 글 속에서 살펴보자.

"요한 1서 1장 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지은 죄를 하나하나 모두 고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달랐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문둥병이 무엇입니까?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면 문둥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문둥병의 증상이고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자체는 아닙니다. 여러분, 장티푸스가 무엇입니까? 열이 나고 머리카락이 바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장티푸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티푸스 균이 들어 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것처럼 죄와 범죄도 근복적으로 다릅니다."(박옥수,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기쁜소식사, 1993. p.33)

"성경에는 '죄'와 '범죄'에 대해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에서 '내가 도둑질 했습니다'하고 범죄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뜻입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36)

"시편 51편 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이 무슨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는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그 자체를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를 고백하는 것과 죄의 근본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p.37).

박 씨는 심지어 성경에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여러분, 아무리 유명한 부흥 목사의 이야기라 해도 성경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해서 죄를 씻는 것도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2」 기쁜소식사, 1993. p.50).

박 씨에 의하면 죄를 해결해야 범죄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마치 감기를 고쳐야 열이 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옥수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은,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한 후에는 죄가 해결되어서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범죄가 없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시면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술을 끊으려고, 담배를 끊으려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고, 방탕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 속에서 그 모든 죄악을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16)

물론 구원받은 후에 죄를 안 짓느냐고 하면 안 짓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둘 중에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구원 얻은 자는 죄가 해결되었으니 어떤 죄(범죄)도 안 짓는다고 하든지 아니면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고 해야 될 것이다.

성경적으로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증거를 세 군데만 살펴보자.

시편 51편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이다. 그는 자기 필요에 의해 여러 번 말했건만 스스로 자기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하면 14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는데, 이 '피 흘린 죄'는 '피 흘린 범죄'에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구별하지 않는 것을 왜 구별하는가?

사무엘하 24장 10절 다윗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인구 계수를 하여 하나님께 교만의 죄를 범하였다. 그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범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박 씨의 말과는 정반대다. 죄가 있어서 인구 계수의 범죄를 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고, 그 죄를 "큰 범죄를 하였다"고 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종의 범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지도 않았다.

마태복음 6장 12절 주기도문의 일부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다. 박씨 말대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하다. 또한 박 씨의 말을 인정한다면 우리 인간이 인간에게 범죄할 수는 있어도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범죄가 아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죄를 해결하면 구원을 받게 되며, 그 후부터는 의인이 되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죄인이라 하며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아담의 죄가 아닌 각자의 죄 때문에 멸망한다(신 24:16; 역대하 25:4; 겔 18:4, 19, 20, 30; 행 3:19; 5:31) 회개무용론은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는 율법 폐기론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구원을 받은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 1:15).

(2) 구원파는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킴으로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한다. 구원의 확신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어느 집단이나 깨달음이 아니다.

마치 자신들이 구원여부를 시험할 수 있는 시험관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 13:5). (회개와 신뢰로서의 믿음이 없이) 복음을 깨닫고 시인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파는 18세기에 나타났던 Sandemanianism이 부활된 것으로 피동적인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거짓된 평안과 안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죄사함을 깨달는 것이 아니다. 박옥수는 구원받는데 어떤 의지나 결단도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p.15). 총신대 김정우 교수의 지적처럼, 성경은 깨달음을 의지적인 결단이나 순종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유병언과 이요한, 박옥수의 구원관에 빠져있는 것은 의지적인 회개와 결단으로서의 믿음(신뢰)이다. 구원파는 수동적으로 죄사함을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구원과 용서는 조건적인 것이다.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만 용서함을 받는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전파되었다(눅 24:47; 행 17:30; 20: 21). 구원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필수조건이다(행 20:21). 회개(metanoia)란 무엇인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를 섬기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자신과 하나님과 죄에 대하여 생각을 바꾸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구원파의 구원에는 깨달음 즉, 이해와 지적 동의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사이비기독교이다.

회개의 중요성: 회개는 생각과 느낌과 의지의 변화를 의미한다.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에는 ⑴하나님의 거룩함과 자신의 죄와 죄책을 인식하는 이지적인 측면과 ⑵ 죄를 슬퍼하는 정서적인 측면과 ⑶죄에서 돌이켜 용서를 구하는, 그리고 목적과 동기를 바꾸는 의지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회개하라(마 3:2)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회개하라(계 3:19)는 명령으로 끝난다. 회개(metanoeo)는 신약의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그것은 심지어 부활보다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복음의 설교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특기할 만하다. 회개는 기독교설교에 하나의 목적을 부여하였다(William Chamberlain, The Meaning of Repentance, Westminster, 1943).

회개를 설교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목적이었다(눅 24:46-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 바울의 사역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행 26:17-18; 행 17:30-31; 롬 2:4; 계 3:19 (벧후 3:9)는 계속해서 회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설교하고 있다. 바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후 7:10).

회개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은 중생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회심의 두 가지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구원받게 하는 믿음은 회개로 침식되어 있고, 회개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John Murray). 죄인이 회개하여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해야 회개는 가능한 것이다(행 20:21).

구원파는 단회적 회개(히 6:1)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마 6:12; 요일 1:8-9)를 구별하지 못하며, 죄에 대한 참된 통회와 회개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권신찬은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라며, “죄사함이 회개에 앞선다”고 해괴한 주장을 하고 있다(중동문화사, [임박한 대환란], p.145).

회개는 생활설계(life design)를 바꾸는 것이다: 전체 생활패턴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고, 열망이 달라지는 것이다(Chamberlain).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강권하는 것은 설교자의 엄숙한 의무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회개의 선물을 선사해 그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Hoekema).

마틴 루터의 95개 조문의 첫 조문을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이기를 의도하셨다.“

믿음의 중요성: 믿음의 명사형 pistis과 동사형 pisteuein은 신약에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롬 10:9).

믿음은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모든 것의 창조자가 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구원하시는 분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시야가 되신다고 믿을 수 있다(행 11:24; 롬 3:28; 엡 2:8). 동사로서 pisteuein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그를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수용하는 것과 ⑵구원을 위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지주의는 단순한 믿음보다 지식을 우월하게 생각하였다. 믿음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의 보증이다(Faith is the title-deed of the things hoped for: 히 11:1). 신약에서 믿음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께 오는 것(요 6:37); 그리스도를 먹는 것(요 6:51);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요 4:14);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요 15:5). 믿음은 우리 자신 대신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 안에 쉬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에는 지식(knowledge)과 동의(assent)와 신뢰(trust)가 포함되어야 한다. 무엇을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구속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속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성경이 죄와 그리스도, 구원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진리로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구속을 신뢰하고 나를 떠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구원파에서는 믿음을 하나님께 매달리는 상태로 보기보다는 확신하는 마음의 신념으로 본다. 그리고 믿음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인격적 신뢰하기보다는 어떤 진리를 깨닫는 상태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권호덕, [박옥수 목사의 ‘죄사함’이해에 대한 비판], 2004, p.17).

구원의 확신. 요한일서 5:13; 로마서 8:16을 보면,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누가복음 17:5; 마가복음 9:24과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신에서 흔들릴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 자여”(눅 12:28; 마 8:26; 14:31)은 우리가 잠시 의심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강함에 좌우되지 않는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사역에 있는 것이다 (Gresham Machen).

(3) 박옥수의 구원파는 구원받은 언제,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 시간과 장소를 묻는다. 성경은 바울이나 삭개오, 간수장과 같이 즉각적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디모데, 빌리 그래함 목사 사모님, 옥한흠 목사와 같이 회심(回心)한 년월일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박옥수는 점진적 회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회심에는 또한 점진적(gradual)인 회심과 급진적(sudden)이고 위기적(crisis)인 회심이 있다. 바울이나 빌립보 간수는 위기적 회심을 경험하였으나(행 9:1-19; 22:3-14; 26:9-18; 행 16:25-34)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점진적인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다(딤후 1:5; 3:15). 우리는 같은 주님을 믿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섬길 주님은 오직 한분이나 우리는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에게 나아오게 된다”(Samuel Southard).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리우는 로이드 죤스(Lloyd-Jones)목사님은 구원받은 날자와 장소를 고집하는 이들의 주장에 이렇게 논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그 나라에 들어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의 출생 거듭남이 극적이고 흥분된 것이었느냐, 아니면 조용히 거의 알아 차리지 못할 성질의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당신이 정확한 순간을 대고 사용된 성구를 정확하게 인용하고, 설교자의 성명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 단 한 가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께 회심했다는 것을 그들의 신앙과 생활로 증거하고 있는 크리스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정확한 시간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법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외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그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든 못하든 그들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 뛴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 밤이 변해 낮이 되는지 정확한 시간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낮이 되면 낮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빌리 그래함, 불타는 세계, 225).

또한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그 날짜와 시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는 신앙 생활을 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참으로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저들은 "어떻게 육신의 생일을 알면서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영적 생일은 모르느냐."고 묻는다. 의미가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말에 속에도 허점이 있다. 육적 생일과 영적 생일은 유사성 내지는 유비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육적 생일을 알 듯이 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면, 영적 생일도 자기 스스로 알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적으로 태어난 사람 스스로 자기 생일을 감지하거나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박옥수 씨에게 너는 네 생일을 스스로 알았느냐 네 부모가 가르쳐 주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씨가 자기 생일을 스스로 알았다면 몰라도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구원파에 속한 자가 어떤 집사님에게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언제부터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고 나보고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 얼마나 통쾌한 대답인가?

박옥수씨는 구원을 확증하는 목적과 방법이 잘못되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고 말하고 있다(롬 9:16). 그러나 또한 구원은 스스로 확증하라고 요구하고도 있다(고후 13:5). 종합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셨을 때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확신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더욱이 자신들의 집단에 속한 자들만이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여 구원을 확증하거나, 자신들의 구원 확증 방법만이 구원을 좌우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사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옥수 구원파들은 구원받은 자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구원이 확인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로 정죄해 버린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것은 마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준 것처럼 하는 것이요, 구원이 자기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씨의 책에 보면 자기 교회에 와서 구원받았다는 말이 많은 것은 정통교회 교인에 대한 미혹자로 활동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박옥수는 마치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집단이 구원을 나누어주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따라서 구원파에서 죄사함을 깨달았다고 하면 그들은 교만한 자세를 취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 앞에 겸손하고 온유해진다. 이것이 참된 구원과 거짓된 구원의 차이이다.

(4) 한 번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용서받은 후에 다시 회개하고 용서받을 필요가 있는가? 당신이 단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함을 받았다면 왜 하나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다시 용서받을 필요가 있는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 죄는 모두 주님의 보혈 아래 있습니다.”하고 자기 갈 길을 가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다시는 당신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회개하고 용서를 빌 필요가 있는가?

■ 요한일서 1:9 - 신자들이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 마태 6:12, 14-15 - 주기도는 신자들이 매일 드려야 할 기도의 모델이었다.

■ 벧전 3:7 -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고 했다. 남편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방해를 받는다면, 남편이 이를 시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고 아내로부터 용서받고 화해하는 것이다.

■ 의인, 다니엘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자복(confess: 自服)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단 9:20).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백하였다(느헤미야 9:2). 에스라도 울며 기도할 때 죄를 자복하였다(에스라 10:1).

■ 잠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자백, 고백)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계시록 2:5; 2:16; 21; 3:3; 19을 보라.

회개한 후에 또 회개가 필요한가? 칭의를 위한 단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분하지 못하는 구원파의 이와같은 질문은 순진한 성도를 오도하거나 미혹할 수 있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인생을 심판주(Judge: 살후 1:8,9)와 아버지(Father)로서 다루시고 상대하신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처벌은 잘못에 대한 형벌을 뜻하고 징계는 교정과 성숙을 위한 훈련을 뜻한다. 우리가 아직도 겪어야 하는 역경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아니고 아버지의 징계에 해당하는 것이다(히 12:5-11).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우리는 성령의 인치신 바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영원히 보전함을 받는다(고후 1:22; 엡 1:13; 4:30). 체계적으로 신학교육은 받은 적이 없는 무식한 구원파 교주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구분 처벌(형벌) 징계(훈계)

목적 범과에 대하여 형벌을 가함 바로잡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

(살후 1: 7-9) 훈련함 (잠 3: 11-12)

초점 과거의 잘못 (마 25: 46) 앞으로의 올바른 행동(히 12:5,10)

부모의 태도 분노(사 13:9,ㅣ11) 사랑어린 관심 (계 3:19)

자녀의 감정 두려움, 죄책감, 적개심 안정감과 존경심 (히 9:28)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할 때,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단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히 9: 12). 용서에는 법적인 용서(judicial forgiveness)가 있고 부모로서의 용서(parental forgiveness)가 있다. 법정적 칭의가 있고,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가 있다. 전자의 용서는 끝났으나 후자의 용서는 계속적인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죄인의 신분이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이 사실이나, 성품은 죄인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계속 인격적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구원파의 구원에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로서의 구원이 빠져있다. 구원파는 초대교회를 괴롭히던 영지주의, 도덕폐기론의 부활이다.

박 씨는 회개가 무엇인지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모든 이단들이 정통교회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기성교인들의 체계나 확신을 뒤흔들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한다. 구원파는 이 죄와 회개 문제를 그렇게 사용한다. 즉 기성교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공격하기 위하여 새벽마다 울고불고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회개란 단어를 구원받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적용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적 근거는 즉, 회개란 '돌이키다'라는 말로서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회개란 오직 구원을 위해 돌이키는 행위로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준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요, 결국 울고불고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백날 울고불고 회개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정죄해 버리는 것이 박옥수 구원파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박옥수는 칭의를 위한 단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서의 회개와 일생 동안 계속되어야 하는 회개를 구분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전체가 회개의 삶이다( The Christian life in its totality is a life of repentance).

본질적으로 구원을 위한 회개든(히 6:1∼2), 성화를 위한 회개든(계시록 3; 시편 51:14, 삼하 24:10, 마 6:12, 요일 1:8∼9 등), 용서하고 용서받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단회적인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에서는 제1단순과거 형태를 사용한 것이다.

비록 구원을 위한 회개는 단회적인 것이지만 혹 믿음이 없어서 반복적으로 한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받지 못한 증거는 결코 아닌 것이다. 단지 반복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더욱이 구원받은 후에도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우리로서는 날마다 성화를 위한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골 2:6∼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은 신자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은 상태에서 떨어질 수 없으며,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the justified)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해서 용서하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계속해서 그들의 죄(sins)를 하나님께 고백하여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3. 율법과 신앙생활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되었다. 박옥수는 권신찬(유병언), 이요한 씨와 함께, 기존교회를 공격하고 목사, 장로들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십일조, 주일 성수, 기도, 예배에 참석하는 행위, 목사, 장로, 집사 제도를 종교 또는 율법으로 규정하고 공격한다. 율법과 종교, 구원,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기존교회는 종교이며, 자기들은 복음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요일 5:3).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하며 의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구원의 수단으로써 율법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고 생활에서 이를 이행해야 한다. 기도와 금식 같은 것은 가르치지 않고 교제만을 강조한다. 신앙생활은 교회가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원과 죄사함의 교리만 강조하는 것은 성경을 편식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 교회, 신앙생활, 종말 등 하나님의 뜻을 두루 다 전해야 한다 (행 20: ).

4.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되었다.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을 가르치는 내용과 목적이 잘못되었다. 구원파는 극단적인 세대주의 종말론을 흉내내고 있다. 구원파에서 발간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들의 관심사가 세계의 종말에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임박한 대환란], [세계독재자와 666], [세계정부와 666], [카운트다운 예수재림과 휴거], [인류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 [한계에 도달한 인류역사], [인류역사와 하나님의 교회]. 박옥수 계통의 구원파가 ”거듭남,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성화가 빠진 구원만을 부르짓고 있는 동안, 권신찬, 유병언, 그리고 이복칠 계통의 구원파는 대환란과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구원파의 종말론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본인의 침신대 석사논문 [구원파와 남침례회의 비교연구: 교육내용을 중심으로]를 참고하기 바란다.

구원파의 이단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구원파는 구원지상주의자들로서 성화가 빠진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데, 정통교회와 구원파는 칭의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할 때, 죄인에서 자녀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바뀐다.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iton)와 전가된 칭의(imputed righteousness)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맺어지면 이 관계는 영원히 변화되지 않지만, 아버지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계속 회개하여야 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우리는 의사의 돌봄 아래 있는 병든 사람과 같다. 우리는 사실은 병들어 있지만, 소망 안에서는 건강하다. 건강해지리라는 소망 중에 살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교회는 병든 환자들로 가득한 병원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치유받기 위해 의사의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눈이 멀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에 의해 눈을 떠야 한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귀가 멀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귀는 은혜에 의해 열려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사함과 구속과 구원, 칭의, 그리고 화해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창조적 만남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는 “교회가 서게 할 수도 있고 쓰러지게 할 수도 있는 교리”이다.

법정적 칭의: 문제의 판결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품이나 미덕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의 신분에 대한 것이다. 칭의는 우리의 새로운 신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선언을 포함한다. 칭의는 성품의 근본적 변화보다는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 신자는 믿음으로는 의롭지만,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있다. 신자는 동시에 의인이며 죄인이다. 우리는 사함받은 죄인이다.우리는 이 새로운 신분과 관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의 생활과 태도를 변형시켜야 한다. 믿음은 선행을 잉태하고 있다. Become what you are!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불경건한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법정적 의미에서 의롭다고 선언을 받는 것(pronounces or declares righteous)이다 (Melanchton). 우리가 받은 의롭다함은 법정적, 전가된, 그리고 외래적인 의이다.

우리는 신분상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나 성품상으로 의로워진 것은 아니다. 의롭게 하는 의(justifying righteousness)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 것(imputed rightousness)이다. 칭의는 하나의 사건이고, 성화는 과정이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의로 옷 입은 바 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갈 2:16). 구원파는 깨달음이라는 행위를 통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단 교리를 만들어낸 셈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이단 사상이다.

선행이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하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을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을 맺는다(마 16:18). 하나님은 자신이 nothing인 것을 아는 사람을 something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위대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고, 그를 위대하고 창대하게 만드신다(창 12:1-3).

“기독교적이고 기독교적이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은 이 칭의의 교리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통과 이단의 차이는 일단 이 교리를 수용한 이후에 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서 드러난다. 이단은 기본적으로 이 교리를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를 내적 일관성 없는 모순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 생기는 것이다.”(MacRath).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개인적인 대면이요, 만남이며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함으로, 즉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음으로 그리스도인(예수님의 제자)이 되는 것이다(M.T.Rankin). 성서적인 믿음, 즉 구원받게 하는 회심은 지・정・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다.

구원파의 구원에 가장 두드러지게 빠져 있는 것은 의지적인 회개와 의지적인 위탁(commitment)으로서의 믿음(trust)이다. 구원받는 믿음에는 진리에 대한 인식과 지식적인 동의와 의지적인 위임(위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구원파의 구원관에는 의지적인 위임(내맡김)으로서 믿음(trust)과 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repentance)가 빠져 있다. 회개와 믿음(행21:20)은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교회사 전체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구원의 두 가지 기본 조건으로 제시해 왔다.

그러므로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구원의 과정은 일련의 순차적인 경험(a series of successive experiences)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동시에 시작되고 계속되는 여러 가지 차원을 포함하는 통일적인 경험(unitary experience)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생(regeneration) ➡ 회심(conversion) ➡ 중생(justification) ➡ 성화(sanctification) ➡ 견인(perseverence)

▶중생(regeneration: new life)

▶ 회심(conversion: faith & repentance: new direction)

▶ 칭의(justification: new status)

▶ 성화(sanctification: progressive newness)

▶ 견인(perseverence: persistent newness)

거듭남, 즉 중생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초에 일어나지만, 그 결과는 신자가 거듭난 삶을 삶에 따라 계속된다. 회개와 믿음은 시작 단계에서 일어나지만, 신앙생활 전체를 통해 회개와 믿음은 계속 행사되어야 한다. 성화와 성도의 견인도 평생 지속되는 활동이다.

신자는 세상에 살아있는 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복음의 부름(gospel call)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초대와 함께 구원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⑴ 복음의 사실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과 ⑵ 회개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라는 초대, 그리고 ⑶ 죄사함과 구원의 약속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으니라(마 22:14).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였으니(행 17:30).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할 것이요. 목마른 자로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17).

하나님은 복음을 듣는 자는 누구나 회개하고 믿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유효한 부르심(effectual calling)을 받은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결국 영화롭게 된다고 말씀하신다(롬 8: 28-3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유효한 부르심의 목표: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고전 1:19)로, 영생으로(딤전 6: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살전 2:12), 거룩한 삶으로(살전 4:7);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그 자취를 따라오도록(벧전 2:21), 자유를 누리도록(갈 5:13); 평강으로(골 3:15) 부르심을 받았다. 유효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엡 4:1).

복음의 부르심 안에서 들려지는 말씀은 유효한 부르심 안에서 효과적인 된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어,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살려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날 수 없다.

하나님과 신자는 모두 구원의 과정에 동참한다. 믿음과 회개, 성화와 견인에서 하나님도 일하시고 우리도 일한다. 유효한 부르심과 거듭남은 동일한 것이다. 회심(conversion)은 중생(regeneration)이 일어났다는 외적인 증거이다. 중생과 회심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원인적으로는 중생이 회심에 선행되어야 한다. 루디아의 경우에서(행 16:14) 보는 것처럼, 거듭남은 흔히 말씀의 설교나 가르침, 또는 읽는 중에 일어난다(Anthony Hoekema).

회심(conversion)은 거듭난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인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Hoekema). 회심은 죄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을 섬기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포함한다. 회심은 다름과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⑴죄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행위(behavior)로 이해하는 마음의 조명(illumination of the mind)하고; ⑵ 죄의 비참한 결과 때문에 그저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순수하게 슬퍼하는 마음(genuine sorrow for sin); ⑶ 하나님과 우리 죄 때문에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죄를 고백하고; ⑷ 죄를 떠나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포함하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 ⑸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믿음 가운데,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이킴; ⑹ 그리스도로 인해 온마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 ⑺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면서, 순수하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

회심의 유형(Patterns of Conversion)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루터(Luther)의 회심은 깊은 죄책감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기쁘게 인식하고 깨닫는 것으로의 전환이었다. 쯔윙글리(Zwingli)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되는 행복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회심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칼빈(Calvin)의 회심은 오류에서 진리로, 의심에서 확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Bavinck, Dogmatiek, 4:159)..

회심에는 항상 전인격이 포함되지만, 회심은 사람에 따라 지성적이거나 의지적, 또는 감정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C.S.Lewis의 회심은 주로 지성적인 것이었고; Augustine의 회심은 다분히 의지적인 것이었으며, John Bunyan의 회심은 감정적인 것이었다.

구원파는 확실히 이단이다

구원파의 이단성은 그들의 성경관, 신관, 인간관, 구원관, 기도와 예배관, 교회관과 종말관에 고루 나타나고 있다. 교회사와 조직신학, 성서해석학에 대해 무지한 구원파의 지도자들은 성경을 우화적으로, 임의적으로 억지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구원파의 세 계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성과 초월성은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인격성과 임재성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조하나 인성은 격하시키며 죄사함의 은혜는 강조하면서, 율법의 교훈은 무시한다. 피동적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강조하지만 의지적인 회개와 인격적인 신뢰(믿음)를 배제한 구원은 기도와 찬양을 소홀히 취급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모임과 교제를 강조하여 자신이 속한 교회가 유일한 참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자파 교회에 붙어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들림을 받는다는 극단적 세대주의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유병언과 권신찬 계열은 극단적 세대주의 사상에 입각해 시한부 종말론에 가까운 종말 위기위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풍유적 성경해석으로 (원)죄와 범죄, 회개와 자백을 구분하여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회개하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박옥수는 구원지상주의자로서 종말에 대하여 거의 설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3분파는 그 신관이나 구원관에서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 1992). 따라서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에서 한결같이 구원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한 가지 기능인 깨달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들의 주장은 영지주의적인 사고에 틀림없으며, 구원의 확신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롬 9:6)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또한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면 지옥간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명백한 이단으로 사료된다”(1992년 예장 77회 총회).

구원파는 표면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지만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강조하지만 사실상 교주가 강조되고, 정통교회의 바른 교훈 보다 교주의 깨달음에 근거한 다른 복음을 강조한다.

박옥수를 비롯한 구원파 지도자들은 모두 체계적 신학을 연구한 적이 없는 돌팔이 또는 사이비 목사들이다. 무식한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멸망의 복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벧후 3:16). 자칭 선교사 딕욕(Dick York)의 사상을 물려받아 정통교회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일단 죄사함을 받으면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크게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파는 정통침례교가 주장하는 구원, 거듭남, 죄사함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순진한 성도들이 미혹되기가 쉽다. 순진한 양들은 이단에서 성경용어를 표리부동하게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파는 진리와 흡사한 거짓을 전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고 사특한 이단이라 할 수 있다. 5세기에 Vincent라는 신학자는 이단과 정통을 가름하는 3가지 질문을 했다: 1. Was it believed everywhere? 2. Was it always believed? 3. Was it believed by everyone?

결론적으로 구원파는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던 초대교회 당시의 영지주의(Gnosticism)가 현대판으로 재현된 것이고,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회개할 필요없이 은혜를 누리자는 율법폐기론(반율법주의: antinominianism)이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추천도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합 사이비이단연구보고집]. 한국장로회출판사, 2001.

빌리 그래함. [하나님과의 평화]. 생명의 말씀사, 1885.

피터 제프리. [그리스도인의 첫걸음 내딛기]. 두란노, 2000.

정동섭. [구원파와 미 남침례회의 비교연구]. 침례신학대학원, 1984.

정동섭, 이영애.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죠이선교회출판부, 2004.

이들의 종말관은 예수의 재림날자를 못박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미선교회의 종말관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권 씨는 “신약은 서기 70년부터 1900년간이 이방인의 때이고, 다음 환란의 7년간과 주님 재림 후 천년 간의 평화의 기간으로 되어있다”(위험한 지구, 4)고 말하면서 그들의 설교집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 및 회복, 666, 적그리스도의 출현, 유럽경제공동체(EEC), 세계정부의 실현가능성, 예루살렘성전의 재건을 계속 거론하면서 재림이 임박했음을 설교하고 있다.

유병언과 이요한(이복칠)의 종말론은 그 내용도 문제가 있지만, 그 목적이 크게 잘못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왕국건설을 위하여, 사업확장과 교세확장을 위하여 종말을 집중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그릇된 교회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씨는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교회의 참 모습이 2,000년만에 구원파에서 처음으로 깨달아졌다면서, (구원파)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교하기도 하고, 신앙생활이 교회를 구심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 생전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 신앙생활은 개인이 할 수 없고 교회가 대신한다. 구원받은 교인들은 한데 모여 살아야 한다. 현금은 쓸모없는 시대가 온다. 그러므로 현금은 바쳐라. 떨어져 있으면 휴거받지 못한다. 모임에 붙어있는 자만 들림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 교인들을 집단생활로 유도하고, 막대한 헌금을 저들이 운영하는 (주) 세모에 투자하고 있다. 환란전 휴거설을 전하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다. 그 가르침의 동기와 목적이 잘못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 11-14).

일류사, 중동문화사, 우정출판사, 도서출판 선구자, 평신도선교회, 신아문화사 등 여러 출판사의 이름으로 펴내는 [임박한 대환란], [세계독재자와 666], [세계정부와 666], [카운트다운 예수재림과 휴거], [인류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 [한계에 도달한 인류역사], [잠시 잠간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가는 자와 남는 자] 등 책 제목에 잘 반영되어 있다. 구원파에서는 종말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최근에는 [제3성전 건립시작되다]라는 제목의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해 대대적으로 시판하고 있다. 한편 유 씨는 666, 적그리스도의 인을 들먹이면서, 그의 인을 받지 않으려면 재산을 헌납해 공동생활을 해야한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업드러치고 있다”(딛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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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최삼경 목사의 구원파 비판

한국에는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이단들이 많다. 그 가운데는 심각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단 또한 적지 않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위험한 이단들 중에 하나가 바로 구원파 이단이며 그 중에도 특히 박옥수 구원파이다. 구원파 박옥수에 대한 이단성과 그 정체를 신학적인 분석을 통해 알아 보자.

왜 박옥수 구원파에게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는가?

이단이란 표면적으로는 성경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을 부정하는 자들이요, 예수님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교주가 강조되고 정통교회의 교리보다 교주의 가르침이나 자신의 교리를 더 강조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이같은 거짓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성경이며 이단논쟁은 곧 성경논쟁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과 연결시켜 이단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경 외에 분명한 자기 계시 즉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만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그런데 첫째 부류보다 둘째 부류가 훨씬 더 무서운 이단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외에 자기 계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다른 진리, 다른 구원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표면적으로 드러나 버린다. 그러나 성경 계시 외에 다른 계시를 가지지 않는 이단들은 그 접촉점이 성경이요 오히려 정통교회보다 더 성경을 높이고 강조함으로 그 이단성이 안으로 깊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드러난 질병보다 숨은 질병이 더 무서운 것과 같다. 이단은 그 본성이 미혹하는 자요, 속이는 자요, 노략하는 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단성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숨기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성경계시만 인정하게 되면 자연히 성도들에게 미혹성이 더 큰 것이다.

통일교 같은 경우 '원리강론'은 성경 위의 새로운 자기 계시이면서도 단지 주석서에 불과하다고 위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이 무서운 것이다. 구원파의 성도에 대한 미혹성이 큰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파가 많은 성도들을 혼란케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구원과 죄에 대해 평신도들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병은 몸이 약한 부분에서 생기는 법이요, 쥐는 얇은 벽을 뚫는 법이요, 도둑은 낮은 담장을 넘는 법인 것처럼 이단 또한 정통교회의 약점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다. 바로 정통교회의 구원관과 죄에 대한 약점을 뚫고 나타난 이단이 박옥수 구원파이다.

정통신학 자체가 구원과 죄에 대해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평신도들에게 정립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구원은 확신되어야만 받은 것인가?" "구원의 자기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구원받으려면 모든 죄가 다 사해져야 하는가?" "구원받은 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진 것인가? "구원받고도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증거인가? 등등의 질문에 대해 평신도들은 자신있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선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파가 생긴 이유이면서 또한 성도에게 가장 큰 미혹성이 있는 이유이다.

구원 문제는 기독교의 최초의 문제이면서 또한 최후의 문제가 아닌가? 그럼 점에서 구원파 이단은 이단 중의 이단이요 다른 어떤 교리에서 생긴 이단보다도 기독교 신학의 심장부에서 생겼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박옥수 구원파의 이단성은 무엇인가?

둘째, 박 씨는 구원을 확증하는 목적과 방법이 잘못되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고 말하고 있다(롬 9:16). 그러나 또한 구원은 스스로 확증하라고 요구하고도 있다(고후 13:5). 종합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셨을 때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확신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더욱이 자신들의 집단에 속한 자들만이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여 구원을 확증하거나, 자신들의 구원 확증 방법만이 구원을 좌우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사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옥수 구원파들은 구원받은 자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구원이 확인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로 정죄해 버린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것은 마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준 것처럼 하는 것이요, 구원이 자기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씨의 책에보면 자기 교회에 와서 구원받았다는 말이 많은 것은 정통교회 교인에 대한 미혹자로 활동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그 날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는 신앙 생활을 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참으로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저들은 "어떻게 육신의 생일을 알면서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영적 생일은 모르느냐."고 묻는다. 의미가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말에 속에도 허점이 있다. 육적 생일과 영적 생일은 유사성 내지는 유비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육적 생일을 알 듯이 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면, 영적 생일도 자기 스스로 알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적으로 태어난 사람 스스로 자기 생일을 감지하거나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박옥수 씨에게 너는 네 생일을 스스로 알았느냐 네 부모가 가르쳐 주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씨가 자기 생일을 스스로 알았다면 몰라도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구원파에 속한 자가 어떤 집사님에게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언제부터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고 나보고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 얼마나 통쾌한 대답인가?

구원파에 의해, 특히 박 씨에 의해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가 어지럽혀지는 일들이 적지않은 것을 보고 정통교회는 구원관 죄에 대해 더 확신 있는 교육이 필요하며, 또한 저들과 성경적으로 싸울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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