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맛있어서 다시 왔어요.”
“이 동네에 사는데 동네 사람들이 여기 음식 맛있다는 말들을 하도 많이 해서 저도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맛있네요.”
지니 버거를 먹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인증 샷을 남기느라 바빴다.
‘지니 버거’(JINNY BURGER). 셰프 민영진 장로(40. 시드니새생명교회)가 직접 개발해 출시한 메뉴로 그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딴 버거 브랜드다.
푸드 트럭 경력은 일 년, 창업할 당시 전문가들은 쉽지 않을 거라고 말렸다. 그런데 지니 버거가 매섭게 성장하여 지금은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우뚝 서있다. 하루 2-3시간 만에 기본적으로 1백여 개 판매(1,600 달러 정도)로 나름의 최고의 버거 반열에 등극한 것. 유명세가 이어지고 있는 비결이 뭘까. 궁금하다.
SNS서도 난리 난 ‘지니 버거’
푸드 트럭은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음식에 대한 신뢰가 갔다.
“차가 세련돼 보이네요. 차를 제작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그렇죠. 푸드 트럭하면 차량 구입비가 있고요. 거기에 컨테이너 키친을 부착해야 돼요. 그래서 차량과 제작비, 이 두 가지가 들거든요. 제가 할 당시엔 제작비가 6만 불 들었어요. 지금은 한 20% 정도 올랐다고 들었어요. 트럭은 본인이 원하는 트럭을 하면 되고요.”
민 장로의 첫 인상은 시원시원했다. 질문 하나가 끝나기 무섭게 거침없이 요리에 대한 열정을 뿜어낸다. 그는 이 대목에서 미스터 기(Mr. Gee) 이야기를 꺼냈다.
“시드니에서 푸드 트럭 비즈니스로는 가장 권위 있는 분이 ‘미스터 기’라고 하는데요. 시드니에서 제일 먼저 푸드 트럭을 시작했다는데 18년이 넘었어요. 그분의 정보를 듣고 직접 찾아가 만났는데 그분이 푸드 트럭 제작하는 곳을 알려줬어요.
저는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에 아이폰도 그렇지만 사람들의 감성을 터치해줘야 되고 눈으로 보는 시각도 중요하기 때문에 저희 가정교회 두 목장의 목자들과 팀을 만들어 디자인을 연구했어요. 거의 두 달 가까이 만들고 또 만들고 변경하고 또 변경하고 색깔도 바꿔보고 한 백 번 넘게 수정을 통해서 지니 버거 로고가 생기게 됐습니다. 트럭에 대한 모든 세심한 디자인은 밤을 새면서 제가 직접 했어요. 목사님도 도와주시고요.”
“지니 버거라는 이름도 직접 지으셨나요?”
“그래요. 많은 이름을 써봤는데 제 이름이 제일 좋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고 제가 어렸을 때 별명이 진이였어요. 사람들이 제 이름 끝 글자인 ‘진’을 따서 불렀고 부모님도 진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호주에 와서도 진이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호주 동료들이 진이, 진이 부르니까 친근감이 있더라고요. 사실 호주 동료들도 지니 버거 느낌이 좋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지니 버거로 선택했는데 제 정체성이 가장 드러나는 비즈니스 색깔인 것 같아 기쁩니다.”
기자가 물었다.
“지니 버거를 먹어본 사람들은 맥도날드 햄버거보다 훨씬 낫다고들 하더라고요.”
민 장로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더니, “에이, 맥도날드하고는 견줄 게 아니지요.”하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만만하게까지 보이는 버거는 간략히 빵 사이에 야채와 고기를 넣어 만든 음식. 덕분에 세계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메뉴로 자리매김 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본래 버거가 가지고 있었던 영양학적 가치는 사라지고 저렴한 가격으로 빠르게 먹을 수 있다는 점만 나날이 부각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안타까워 한 것이 바로 이점이었다. 그래서 지니 버거의 가장 큰 특징은 신선함과 최상의 재료다. 재료와 소스와의 조화, 섬세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 재료 하나도 그냥 고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니 버거의 핵심은 높은 품질의 식재료와 맛에 있다고 했다.
그래도 햄버거인데 얼마나 건강하겠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덜 가공된 패티와 신선한 채소들을 보니 충분히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만드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요리 노하우에 따라 얼마든지 하나의 근사한 요리로 변신할 수 있음도 알게 됐다.
“푸드 트럭 비즈니스를 하려면 카운슬 허가가 필요하지요?”
“그렇지요. 카운슬에서 허가하고 있는 장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장소들은 사실상 비즈니스가 잘되는 장소가 아니에요. 시티 같은 경우 좋은 자리들은 돈을 비싸게 내기도 하고요.
저희 라이드 같은 경우는 기본적인 파크 리스트들이 있어요. 저는 일단 그 안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도 5시간밖에 오픈할 수가 없고요. 그런 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토요일에는 울릉공도 다니고요. 평일에는 맥콰리 공원과 메도우뱅크 공원 그리고 종종 지역 페스티벌 축제에도 찾아가고 결혼식 펑션도 섬기고 딜리버리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비즈니스 초창기이기 때문에 많이 팔든 적게 팔든 일 주일에 5일 이상은 일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니 버거는 SNS 마케팅과 입소문을 통해 인지도를 얻는데도 성공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에서 정말 인기가 뜨겁던데요?”
“요즘 세대들은 먹어보고 맛있으면 자연스럽게 글과 사진을 올려요. 이곳저곳에서 글과 사진을 보고 왔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활발하게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지니 버거 사진을 한 번쯤은 봤을 터, 지니 버거, 맥콰리 공원, 메도우뱅크 공원 등 관련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수천 개의 게시물이 쏟아진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자신의 사진과 영상이 올라오고, 평점들은 별점 5개 만점이고 지니 버거를 먹기 위해 1시간씩 기다렸다는 후기도 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커뮤니티 페이스북에 좀 영향력이 있는 분 같아요. 저희 버거를 먹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주셨는데 메도우뱅크에 버거집이 생겼는데 너무 맛있다. 그런 후 맛있다는 댓글이 폭팔적으로 일어난 거예요. 지난 1월 달이었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매출이 마이너스였는데 그분으로 반응이 뜨거웠어요.
그런데 한 주가 지나서 또 다른 분이 저희 버거를 먹고 글을 올렸어요. 지니 버거가 첩이번(Chubby buns)보다 낫다. 사실 첩이번은 지금 버거로서는 최고로 쳐주는 유명한 곳이거든요. 그랬는데 어느 분이 첩이번이 지니 버거보다 맛있냐, 지니 버거가 첩이번보다 맛있냐는 질문을 했는데 그 댓글들이 달리면서 서로 손님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어요.
그러다가 지니 버거가 더 맛있다는 쪽으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반전됐어요. 첩이번은 버거로서는 톱이거든요. 그 이후에 썰렁했던 비즈니스가 막 살아나기 시작한 거죠. 저한테는 그분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지요.”
기자가 활짝 웃었더니 민 장로도 따라 웃는다. 사람을 향해 웃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기도가 또 있을까.
“오시는 고객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신가요?”
"70% 80%가 호주사람이거나 호주 베이스고요. 감사한 것은 단골이 많이 생겼어요.”
절망에서 일으킨 주님
요리가 좋아 20대에 시작했다. 천직으로 알고. 맨 처음 주어진 일은 칼질 배우기. 서툰 솜씨는 매일 손을 베게 했고 훈장처럼 흉터를 남겼다. 특히 프랑스 요리에 관심이 있어 여러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음식을 배웠다. 목표는 미국 백악관까지 나가 보자였다.
“요리사로서 이왕이면 최고봉에 올라보자는 욕심을 늘 가졌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실력은 늘어갔고 색다른 요리를 배울 때마다 신기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다. 공부가 더 필요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레스토랑의 주방을 경험한 그는 마침내 호주를 택했다.
“호주에서 영어도 배우고 요리공부도 더해서 영주권을 얻어 미국이나 유럽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어요.”
민 장로가 호주에 온 것은 2007년 26살이었다. 그는 세계 3대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ue)를 졸업한 후 미실 레스토랑과 프렌치 레스토랑 견습생으로 경력을 쌓으면서 기반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괴팍한 성격으로 요리사들을 괴롭히는 총괄 셰프. 그러면서 번번이 회의가 들었다.
“사실 이곳에서 3년 동안 굉장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어요. 직원들이 말도 거칠게 내뱉고 인격을 비하하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고요. 난 영문도 모른 채 맨 날 욕만 먹고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이용만 당한 거지요. 누구하나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정말 외로웠어요. 정신상담까지 받았다니까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올까’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모태신앙이었다. 그는 절망에서 일어나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돌아보니 그가 지금껏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살아계신 하나님께 도전해온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으며 기도했다.
“아, 하나님이 부르시는구나. 그러면서 어렸을 때 기억이 나는 거예요. 주일학교 다니면서 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전도사님들이 생각이 나면서 ‘그래, 교회생활 시작해보자’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어요.”
순간 가슴이 뛰었다. 결코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주일날 이교회 저 교회 다니다가 시드니새생명교회에 정착하게 됐어요. 누구의 소개를 받은 것도 아니고 목사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도 없었어요. 주일날 목사님이 설교하시는데 성령님이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만지고 흔드시는 거예요.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 그 생수를 소박한 표주박에 떠서 그대로 나의 입에 대어 주셨습니다. 돌이켜보니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이었는지요. 그 만남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위로하신 여호와 이레였다는 확신이 드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에서 일어나 머리를 들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만이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었다. 그리고 돌아보니 지금까지의 생활이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해 보였다. 아니, 인생자체가 보잘 것 없었다.
그런 후 시드니에서 유명한 ‘무디 셰프’(The Moody Chef) 카페에 좋은 조건으로 특채되어 갔다. 절대자의 개입이었다. 그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했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했다.
“목사님께서 함께 기도하시면서 사회생활 할 때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보니까 무디 셰프는 배울 게 많은 것 같다면서 무조건 오래 여기서 버텨라. 목사님께서 제 성격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사실 전 성격이 급해요. 목사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진짜 묵묵히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사장님이 웬만한 일은 다 저에게 맡기더라고요. 그래서 무디 셰프에서 많은 새로운 레시피들을 제가 개발할 수 있었어요.
물론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버텨라, 여기에 배울 게 많다, 그렇게 버텼는데 12년이 되었더라고요. 여기에 덤으로 따라온 것이 영주권이었어요.”
요리사 경력 17년. 민 장로는 탄탄한 실력의 요리사로 거듭났다. 그는 충분히 준비가 됐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그의 마음에 싹튼 게 창업이다. 레스토랑 비즈니스를 두고 2년 가까이 교회 가족들과 함께 기도했다. 맛있는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이 꿈이었다.
수없이 많은 시도 끝에 그의 마음에 싹튼 게 바로 버거. 이때 그는 버거를 전망있는 아이템으로 내다봤다.
“버거라는 메뉴는 요리사로서 충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버거라는 레시피는 없기 때문에 새롭게 개발하여야만 했어요. 그리고 지니 버거 오픈하기 전 먼저 추수감사 주일에 교회에서 잔치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어요. 그래서 교회 가족들에게 선포를 했지요. 추수감사주일 날 제가 개발한 지니 버거로 여러분을 섬기겠습니다. 맛을 보시고 냉정하게 평가해 주세요.”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소스를 다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추수감사주일 새벽에 소스가 만들어 진 거예요. 부랴부랴 교회로 달려가 교인들에게 내놨지요. 반응이 폭팔적이었어요. 너무 맛있다. 대박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의 맛이다.”
“그게 지니 버거 탄생이군요.”
우리는 또 웃었다.
“그래요. 효자상품이 돼서 지니 버거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칩스도 맛있더라고요.”
“다들 칩스 싼 거 쓰라고 하는데 저는 사실 싼 거 안 쓰고 칩스도 최상품을 쓰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다들 칩스는 싼거 사용하거든요. 저는 무디 셰프에서 사용하는 재료들을 똑같이 사용하고 있어요. 무디 셰프에서는 비싼 것 쓰거든요. 음식 값도 꽤 비싼 편이고요.”
사업과 신앙의 절묘한 조화
그의 창업의지는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은행에서 대출도 받아 호기롭게 시작했다. 그는 터가 좋은 곳만 잡으면 금새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요, 그 자리에서 오픈했을 때 제가 생각했던 거랑 완전 다른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사먹는 게 아니고 지역마다 특색이 있더라고요. 하루 종일 오픈했는데 두 명, 하루에 5개 팔 때가 많았어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니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마음이 괴로웠다.
“이거 괜히 시작했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연속이 되다보니까 가지고 있던 돈도 다 쓰고 나중에는 기름 넣을 돈도 없더라고요. 가족 보기도 힘들었어요.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구요. 매일매일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가니까요.
그런데 가정교회에서 목사님을 통해 배운 게 있었어요. 항상 최선을 다하고 긍정적으로 기대하라. 기도할 수밖에요. 그리고 지니 버거를 그냥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여리고성이 떠올랐어요.
그들의 모습은 닫혀있었고 막혀 있었지만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에 붙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성벽은 무너졌잖아요.
제가 순종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어느 날 여리고 성벽이 허물어지듯 비즈니스 길이 열릴 것이다, 라는 강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특별 세 겹줄 기도를 시작했고 비즈니스 안정권이 되도록 하루에 버거 100개 정도 팔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니 버거를 오픈하자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주문이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들어왔다. 오픈한지 2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버거 100개 가까이 팔리면서 완판이 되어버린 것.
물론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지니 버거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행사에 부름을 받아 시간 맞춰 고속도로를 가고 있는데 칩스를 놓고 온 거에요. 아이고, 어떡하지 하며 부랴부랴 중간에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는 그때의 초조감은 평생 기억으로 남을 거예요. 어떤 때는 칼과 도마를 빠뜨릴 때도 있고, 고속도로에서 트럭이 고장 날 때도 있어요.”
장사하면서 무례한 사람도 많이 본다. 다짜고짜 욕을 한다거나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쓴 맛은 그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겼다.
성공 스토리를 쌓아가고 있는 민영진 장로는 2010년 결혼한 아내 윤혜령 목녀와 두 자녀 주아(7) 노아(2) 그리고 가정교회 가족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가족이 있어서 힘들지 않은 싸움이었던 것이다.
사업을 목장처럼
민 장로에게는 이제 새로운 꿈이 생겼다. 우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지니 버거 프랜차이즈를 가지겠다는 거다. 목표는 한 100개 정도.
“지금 천천히 기도하면서 준비 중에 있고요. 이 비즈니스가 잘 설립이 되면 호주에서 넘버원 가는 레스토랑도 차려보고 싶어요. 호주하면 오페라 하우스잖아요. 그 정도로 유명한 레스토랑 말입니다. 원래 꿈이 프렌치 요리사였잖아요.
호주 음식 문화를 잘 알고 호주 음식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학교도 세울 수 있겠죠. 그런 기회가 된다면 미국과 한국에도 진출할 거고요. 미국에 세 번 정도 다녀왔는데 지니 버거 정도면 제가 볼 때 승산이 있어요.”
그는 “지니 버거 프렌차이즈를 목장을 섬기 듯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섬기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목장을 섬기고 요리를 하면서 행복을 찾았다는 민영진 장로. 그는 인터뷰 말미에 덧붙였다.
“한국의 백종원 셰프가 세간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은 것처럼 나 역시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어 음식 분야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아니,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교회 가족들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더욱 옷깃을 여미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이다.
그의 경영철학을 듣던 그날, 잠시 가랑비가 내렸다. 하지만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비가 그치며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하나같이 지니 버거를 축복하듯 싱그럽게 반짝거렸고.〠
글/김명동 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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