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은 한국사회가 격동하던 시절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데모는 매일같이 일어났고 급기야 한 달 만에 탱크가 대학교 정문을 지키는 상황이 되고 학교는 휴교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의 꿈은 과학자였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꿈을 안고 대학을 들어가자 그때까지는 내 관심 밖에 있던 시대의 문제들을 접하고 보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과 공학만 꿈꾸며 살아온 필자가 그 밀려오는 시대의 문제들을 해석하고 나름대로 입장을 가진다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참 무식하기 짝이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대학 입학 후 고민은 시작되었고, 모교회에서의 청년부 성경공부 및 다양한 모임과 대화들을 통해서, 또 스스로 인문학 관련 책들을 읽음으로 소위 시대를 읽는 통찰력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 보면 참 어리숙하기 짝이 없었던 과정이었다. 지금 내가 그때는 왜 그렇게 제대로 몰랐을까? 그때 좀 올바로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하면 주변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던 시대였다는 대답을 한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여러 면에서 참 어리숙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나의 사회변화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아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어느 정도 다닌 후에 신학교를 들어갔을 때도 나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이 바르지 못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었다.
사실 이 생각은 지금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민에 대한 대답과 방향이 크게 달라져 있다. 젊었을 때를 돌이켜볼 때 드는 가장 큰 후회는 그때 나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많이 들여다 보고 있었던 점이다. 세상도 제대로 몰랐지만, 성경을 더 잘 모르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런 태도가 변화되어 세상은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가 아니라 바울처럼 또 종교개혁 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난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깨달음을 제대로 얻기까지는 벼랑 끝에 서는 절망의 고통과 함께 시간이 꽤나 걸렸다.
젊었을 때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에 붙잡혀 있기보다는 그때 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복음의 능력에 먼저 붙잡혀서 세상을 보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크게 남는다.
나는 북중 접경지역을 여러 번 탐방한 적이 있다. 그 지역을 다니는 동안 구한말, 나라가 기울어 일본에 삼켜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 바쳐 애쓰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고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특히나 선구자 노래 속에서나 나왔던 바로 그 일송정에 가서 선구자를 부를 때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감사한 것은 그렇게 우리 민족을 지키고 바로 세우려고 애썼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민족을 향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공헌은 마땅히 존중되고 기려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우리는 아주 중요하고도 깊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이 하게 된다. 민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애쓰던 선배 기독교인들 중에서 민족이냐 하나님이 나를 택할 수 밖에 없던 상황에서(필자는 이 상황이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어느 쪽을 택했느냐는 것이다.
민족이 우선인가? 하나님이 우선인가? 성경을 제대로 읽고 믿는 사람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특히 예레미야서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보다 절대로 우선한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가르쳐준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면 이 대답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거부하는 관점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당시 이 질문에 넘어진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얼마든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현재의 대한민국의 혼란은 아직도 이 문제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이나 군중의 판단으로 보면 민족이 하나님보다 우선이라고 하는 가르침이 훨씬 옳아 보이고 매혹적일 것이며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을 우선적으로 택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요 역사의식이 없는 무지한 자로 몰아부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관점의 결정적인 오류는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환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존재처럼 저 하늘에서 인간 세상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그곳에 머물면서 온갖 초자연적인 연출을 일삼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이시지만 인간의 역사를 만드시고 그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실제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시기도 하시다. 그분이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분이 역사를 시작하시고 지금 진행하시고 계시고 언젠가는 그분이 마무리지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그분이 펼쳐가시는 역사를 우리는 한 줄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실 때 세상이 제대로 된다. 사람들의 소견이 아무리 옳아 보여도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소견들은 다 헛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앞선다. 민족에게도 가족에게도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앞선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민족을 무시하시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결코 민족이 하나님을 앞서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 지혜의 근본이다. 이것이 궁극적인 역사 의식이다.〠
이명구|시드니영락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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