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의 이야기 소박하게 담은, 거장 박수근
강원도 양구, 첩첩산중 군부대로 유명했던 지역이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 가겠네라는 노랫 가락도 유명한데, 젊은이들이 군대에 갈 때 오지 중의 오지인 강원도 인제군과 원통으로 가지 않았으면 하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인제, 원통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양구는 그에 못지 않게 젊은 남자 청춘들의 한 시절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군부대보다도 ‘박수근 미술관’이 자리잡은 장소로 유명해지고 있다.
양구를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도 박수근 미술관이다. 수도권에서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다. 서울 중심가에서 2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 이곳에는 그림 한 번을 봐도 ‘박수근’(朴壽根 1914-1965. 호 미석)이 그렸음을 알 수 있는 그의 독특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박수근은 화폭 하나하나에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담았다. ‘아이 업은 소녀’ 그림 하나만도 가슴 뭉클하다. 1930~60년대, 녹록치 않았던 그 시절의 삶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려주는 듯해서다.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막걸리 한 잔 걸쳤는지 세상 시름 잊고 꽹가리를 치는 두 농부의 그림, ‘농악’은 보는 이가 어깨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정겹다.
냇가에서 빨래 방망이를 치는 아낙네들의 뒷태가 보이는 ‘빨래터’,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는 아낙네들의 발걸음을 담은 ‘귀가’에는 모두 내 어머니, 누이들의 질곡의 삶이 보이는 듯하다. 이쯤되면 정겨움을 넘어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음이 아려온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소박함 그 자체다. 시골 황톳길을 걷는 것처럼 그림이 정겹다. 난해함과 철학적 깊이, 그런 거 없다. 그냥 우리 살아가는 삶을 현실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낯설지가 않다. 저 세상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나의 삶의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대하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비단 필자만의 마음이 아니다.
소설가 박완서도 그랬다.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몇 안되는 여학생으로 합격했으나 그해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그녀의 인생은 그길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오빠와 삼촌을 잃고 갖은 고생을 하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녀가 하는 일은 짧은 영어로 미군부대 PX를 출입하며 병사들을 설득해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일이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많은 화가들이 그녀에게 연줄을 대서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했고 그 중 하나가 박수근 화백이었다.
아버지뻘 되는 화가들을 박 씨, 이 씨라고 하대하며 자신을 향한 불행과 세상을 향한 분노로 날을 세우던 그녀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며 자신이 겪은 불행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모든 사람이 겪는 아픔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위로를 받는 경험을 한다.
박완서는 박수근에 대해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이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거장으로 알려졌지만 일제와 6.25 동란을 거치는 동안 한때 한국 미술계에서 미석의 그림이 인정 받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그의 학력이 변변치 않았다. 강원도 양구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일제를 거쳐 6.25한국동란을 지나가는 당시 화풍은 서양화풍이 대세였다. 시골 분위기 물씬 풍기는 그의 그림은 서양의 문화가 더 우월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했다.
박수근의 그림은 오히려 서양인들이 좋아했다. 특히 미석은 미군 PX를 출입하며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의 그림을 보고는 그의 화풍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57년 43세 때 제6회 국전에서는 낙선하여 크게 실망하였는데 이 무렵 반도화랑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한달에 한두 번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 주로 한국에 온 미국인 미술 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을 샀는데 그의 그림에서 한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단골 고객은 미국 대사관 문정관인 그레고리 헨더슨의 부인이었고,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마가렛 밀러 여사가 특히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했다. 밀러 여사는 귀국 후에도 우편을 통해 박수근의 그림을 계속 사주고 화구를 부쳐주는 등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이해가 쉽게 간다. 그에게선 어떻게 이런 소박한 한국적 그림이 나올 수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던 미석에게는 기도제목이 있었다.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당시 강원도 양구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많이 파견돼 있었다. 그들에게서 밀레와 같은 명화의 복제물들이 보급됐을 때다. 어린 박수근이 밀레의 명화들을 보면서 그와 같은 화가를 꿈꿨을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보통학교 재학시절 그에게 큰 용기를 준 담임교사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보통학교 4학년 때였다. 담임 교사는 일본 사람이었다. 그가 미술을 좋아했다. 미석의 그림을 보고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야아, 넌 천재다. 천재니까, 다른 거 다 하지 말고 그림만 그려라!” 이 말은 미석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줬다.
미술 지도도 그 선생에게서 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진학을 해야 하는데 학비가 없었다. 그러자 그 선생은 말했다고 한다.
“중학교 갈 필요 없다. 너는 그림만 그려라. 학벌이란 게 무슨 소용 있느냐, 학벌이란 것은 무엇을 잘하기 위해서 얻는 자격증이다. 그것 없어도 잘하는 게 있으면 그 이상이 될 수 있다.
너는 미술에 대한 역사를 공부할 필요도 없고 미술의 대가를 연구할 필요도 없다. 넌 오직 네가 하고 싶은 것만 그려라!”(박수근 미술관, 황금찬의 ‘국립예술자료원 구술 채록문’ 인용).
미술의 대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박수근 자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담임교사의 말이 거장 박수근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수근은 말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의 이미지는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박수근 미술관).
그의 그림에서 삶의 숨결이 오롯이 전달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의 그림에는 인간의 선함과 따스함과 진실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미석의 아들, 박성남 화백이 말하는 미술
본지 아트디렉터인 박성남 화백(77세)은 거장의 아들이다. 기자는 박수근 미술관에서 지난 8월 7일 박 화백을 만났다.
기자는 거장의 미술이 왜 단순, 소박함 그 자체였는지 궁금했다. 아들 박성남 화백에게 이유를 묻자 박 화백은 담백하게 답했다.
이중섭 화백의 경우 삶에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석은 아주 단순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강부터 씻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 마루를 걸레질하고 마당을 쓸었다. 박성남 화백의 어머니는 빨래를 하고 아침을 준비했다. 미석은 빨래가 마르면 그걸 개 놓고 아침 집안 일을 도운 후 오후 4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 후에는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명동 길을 걸으며 스케치를 하며 다녔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막걸리 한잔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몸을 부대끼며 잠자리에 들었다. 가정, 미술! 이 단조로운 삶이 미석의 위대한 미술 혼이었다.
먼저 아내 김복순 여사를 극진히 사랑했다. 결혼할 때도 솔직 담백하게 고백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박수근 화백이 아내 김복순에게 보낸 첫 연애편지 중 일부)
김복순 여사는 남편의 사랑을 회고하며 “나를 평생 귀한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겼다”고 말한다.
박성남 화백의 그림에는 아버지를 닮아 따스함이 그대로 담겼다. 더불어 그의 그림에는 마치 네이버 웹툰을 보는 듯,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다. 80 가까운 나이를 뛰어넘는 감각이다. 그 이유를 묻자 박 화백은 박성남이여서라는 답을 했다.
박 화백은 ‘그림’의 어원은 그리움이라고 소개했다. 나라는 인간 근원의 그리움을 그림에 담는다고 말한다. 여기라는 장소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박 화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기, 이 땅에 오셨듯이, 그리고 하늘이 아니라 여기에서 일하시듯이 그림에는 ‘여기’라는 위치가 빠져서는 안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지금’을 그려서라고 한다. 그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한다. 영혼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개념을 초월한다. 바로 지금, 현재로서 모든 것을 넘어선다는 것. 그래서 박성남 화백에게 지금을 화폭에 담는 것은 역설적으로 영원을 담는 방법이다.
박성남 화백은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의 위대함을 넘어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자신의 미술 세계를 지어 올리려 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이름은 ‘남자로서 성공하라’는 뜻의 성남(成男)이다. 하지만 흙 토 변을 붙인 재 성(城)자로 바꿨다. 아버지 이름을 빛내는 토양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의미에서다.
아버지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대한민국 최고 미술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7년 5월에 그의 작품 ‘빨래터’가 45억 2천만 원에 낙찰되어 당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그의 그림은 한 호(엽서 크기)당 3억 원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그리워했던 것, 아버지가 그리려 했던 것, 아버지가 담으려 했던 것을 계승하려는 박성남 화백의 그림도 어느덧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가고 있다.
박성남 화백을 통해 사람들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함께 호흡하는 거장의 숨결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쩌면 박수근 화백을 다시 만나는 착각이 들 수도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예술의 세계, 그것도 가장 세계화된 한국의 멋을 담은 작품을 통해 새로운 K-culture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될 듯하다.
거장의 그림은 이렇게 아들 박성남 화백을 통해 세대를 뛰어넘어 사람들과 호흡하는 중이다. 〠
정윤석|본지 한국 주재 기자 권순형|본지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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