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산골 소년에서 평화통일의 길로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6/04/21 [14:11]

▲ 2026 호주 통일정책강연회 주강사로 호주를 방문한 민주평통 방용승 사무처장이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크리스찬리뷰     

 

지난 3월 10일(화)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라트비안극장에서 ‘2026 호주 통일정책강연회’가 열렸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호주협의회(회장 박은덕)가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방용승 사무처장은 한 문장으로 강연의 핵심을 전했다.

  

“평화통일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배우 이원종, 정진호 포스텍 교수 등이 함께한 이날 강연은 ‘한반도 평화와 공공외교, 공동성장’을 주제로 진행됐지만, 그가 남긴 이 한 문장은 유독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강연이 끝난 뒤 기자는 같은 장소인 라트비안 극장에서 방용승 사무처장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화려한 이력이나 정치적 수사보다 그의 말에는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신념과 경험이 담겨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통일 담론’을 넘어, 한 시대를 살아온 개인의 여정이자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으로 다가왔다.

 

장수 산골에서 자란 소년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산이었어요.”

  

방용승 사무처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교동리 567번지’.

  

그는 자신의 출생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지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기는 말 그대로 ‘깡촌’이라 불리던 산골이었다.

  

마을 앞에는 겨우 신작로 하나가 나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계단식 논이 이어져 있었다. 겨울이 되면 산에서 내려온 토끼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까지 내려오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자연은 풍요로웠지만 삶은 결코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던 기억을 떠올렸다.

  

“산에 올라가 보면 저 산 너머에도 또 산이 있어요. 그래서 늘 궁금했죠. 저 산을 넘으면 어떤 세상이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훗날 그의 삶을 관통하게 될 ‘경계 너머를 향한 시선’의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아버지를 따라 마산으로, 다시 전주로 이주하게 된다. 도시로 나왔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미 산골에서 형성된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그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버지였다.

  

공무원이었지만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질문하는 태도였다.

  

그 결정적인 장면은 1979년 10월 26일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찾아왔다. 그날 아침,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서울에서 대통령 환갑잔치를 한다며 사람들이 몰려드는 꿈이었다. 그런데 아침 뉴스에서는 전혀 다른 소식이 흘러나왔다. 대통령 서거 소식이었다.

  

동생 역시 비슷한 시기에 상징적인 꿈을 꾸었다고 한다. 교도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맨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달려가는 장면이었다.

  

그는 그날 학교로 가지 않았다. 대신 집과 정반대 방향에 있던 교회로 향했다.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지만 이미 그는 ‘역사’라는 것을 단순한 교과서 속 사건이 아닌, 자신의 삶과 연결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반 친구의 반응이었다. 어떤 친구는 “국부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인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다.

  

“사람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구나.”

  

이 통찰은 훗날 그의 통일관과도 깊이 연결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결하느냐라는 문제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했고, 때로는 결핍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는 세 가지 중요한 자산을 얻었다.

  

첫째,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 둘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질문, 셋째, 다름을 이해하려는 태도, 이 세 가지는 훗날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의 토대가 된다.

 

광주가 던진 질문, 민주화에서 통일운동으로

 

그의 삶이 또 한 번 방향을 바꾸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이었다. 훗날 전주에 정착한 그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시대의 흐름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광주’가 있었다.

  

“대학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하게 됐어요. 계기는 광주였죠.”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그 시절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가 담겨져 있었다.

  

▲ 지난 3월 10일 스트라스필드 라트비안극장에서 열린 통일정책강연회 전경. 방용승 사무처장이 강연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당시 그는 외신 기자가 촬영한 영상을 접하게 된다. 지금처럼 선명한 화면이 아니었다. 화면은 거칠었고, 잡음이 섞여 있었으며, 제대로 보기도 쉽지 않은 영상이었다.

  

“화면이 찌직찌직하면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 장면들이 잊혀지지 않더라고요.”

  

그가 본 것은 단순한 시위 장면이 아니었다. 국가 권력이 시민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그가 알고 있던 ‘나라’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질문 앞에 마주하게 된다.

  

“이런 나라에서, 이렇게 시민들을 마구 죽이는 나라에서… 내가 그냥 공부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그 질문은 곧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그의 생각은 분명했다. 군사정권을 끝내고 민주주의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질문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수부대도 우리와 같은 또래잖아요.” 순간 감정이 격해졌는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때리고 죽일 수 있었을까… 그게 이해가 안 갔어요.”

  

▲ 지난해 8월 취임한 민주평통 방용승 처장이 12월 2일 이재명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기념촬영을 했다.©민주평통     

 

그 질문은 단순한 분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공수부대는 오랜 기간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적’으로 인식하도록 교육받았다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학생들은 ‘빨갱이’로 규정되었고, 그 결과 그들에게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는 이때를 떠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깨달았어요. 분단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면서 살 수 없겠구나.”

  

이 한 문장은 이후의 그의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광주는 그에게 단순한 민주화운동의 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이라는 현실이 어떻게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분단이 해결되지 않으면… 온전한 민주화도 이룰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민주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문제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 그는 그때부터 통일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 내부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주화를 넘어 통일로, 구조적 문제로 시선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역시 그 흐름 속에 있었다.

  

“86년쯤부터였던 것 같아요. 민주화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가야 한다는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는 특별히 극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는 분명한 방향 전환이 담겨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잠시 시민사회운동을 거쳐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잠깐 청년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을 하게 됐죠.”

  

그의 말은 짧았지만 그 선택이 갖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당시 노동현장은 한국 사회의 가장 치열한 현실이 응축된 공간이었다. 생존의 문제, 권리의 문제, 그리고 구조적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였다.

  

그는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계속 통일 문제를 같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에게 통일은 따로 떨어진 의제가 아니었다. 노동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과 분단의 문제는 서로 이어져 있었다. 특히 그가 기억하는 장면 중 하나는 1990년대 중반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출소한 이후 1995년을 ‘통일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사회 곳곳에서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문익환 목사님이 95년을 통일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는 노동현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노동자들도 분단 문제 해결에 나서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노동현장에서의 평화통일운동이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내세웠던 구호가 ‘현장에는 민주노조, 조국에는 평화통일’이었어요.”

  

이 구호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의 사유와 실천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노동의 문제와 통일의 문제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는 예상보다 컸다.

  

“그전에는 노동자들이 한 20~30명 정도 참여했다면, 나중에는 수백 명씩 참여하게 됐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그 시절의 생생한 현장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작은 시도처럼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통일운동이 특정 그룹의 구호가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경험이었다. 그는 이 시기를 지나며 하나의 확신을 갖게 된다. 통일은 일부의 운동이 아니라 대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확신은 이후 그의 활동 전반을 관통하는 방향이 된다.

 

‘하루 100원 통일운동’… 풀뿌리에서 길을 찾다

 

노동현장에서의 경험은 그의 생각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통일은 구호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도 힘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현장에서 배웠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통일운동이라는 게 사실 무겁잖아요.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기 어려운 부분이 많죠.”

  

그의 고민은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통일을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까? 그 고민은 하나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개인 회원을 좀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그가 활동하던 통일운동은 주로 단체 중심이었다. 여러 시민단체들이 연대하여 하나의 조직을 이루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구조의 한계를 느꼈다.

  

“단체는 합의를 해도, 각 단체로 돌아가면 실행이 잘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그는 방향을 바꾸었다. 단체가 아니라 ‘사람’으로. 그렇게 시작된 것이 이른바 ‘하루 100원 통일운동’이었다.

  

“하루에 100원씩이라도 통일을 위해 마음을 모아보자… 그렇게 시작한 거죠.”

  

▲ 제2차 직능별 정책회의를 마친 후. 맨 앞줄 오른쪽이 방용승 처장. (2026. 3.31) ©민주평통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안에는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결단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루 100원, 한 달이면 3천 원’

  

크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의 크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3천 원이면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만 명, 십만 명을 모아보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람들을 모아가기 시작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의미 있었다.

  

“1년 정도 해서 천 명 정도 모았어요.”

  

작은 숫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통일운동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성과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단지, 어떻게 다가가느냐의 문제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기자는 이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어 천 명을 모은다는 것, 만약 그것을 전도에 비유한다면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또 쉽지 않은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 2026 호주 통일정책강연회에서 방용승 처장은 평화통일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강조했다.©크리스찬리뷰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결정을 내린다. 기존의 연대 조직을 해산하고, 개인 중심의 통일운동 조직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전북 통일연대를 해산하고, 개인 회원 중심으로 다시 조직을 만든 거죠.”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이 ‘전북겨레하나’였다. 이후 회원 수는 계속 늘어났다.

  

“나중에는 5천 명까지 갔어요.”

  

그의 말에는 담담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 숫자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하나의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통일운동은 일부의 운동이 아니라, 대중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방식을 이미 찾고 있었다.

  

쉽고, 작게, 그러나 넓게. 그의 표현을 빌리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후 그는 남북 교류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사람들을 모아 평양을 방문하고, 금강산을 찾았다.

  

“그때는 ‘만남이 통일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만나야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길이 열린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교류의 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방향을 고민해야 했다.

  

“교류가 안 되니까…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생각했죠.”

  

그가 선택한 것은 ‘교육’이었다. 특히 청소년을 향한 통일교육이었다. “청소년 통일교육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선택 역시 그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더 오래 남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숫자로도 확인되어 진다. “한 10년 동안… 청소년만 11만 명 정도 교육을 했어요.”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숫자에는 한 세대에 대한 그의 고민과 시간이 담겨 있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그는 하나의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통일은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작은 참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루 100원에서 시작된 그 실험은 그렇게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어졌다.

 

평화통일도 결국 국민이 합니다

 

인터뷰의 마지막에 이르자 그는 한 문장을 다시 꺼냈다.

  

“결국은 국민이 하는 거죠. 평화통일도 결국 국민이 합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가 걸어온 시간 전체가 담겨 있는 듯했다. 산골에서 시작된 질문, 광주에서 마주한 충격, 노동현장에서의 고민, 그리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모아내며 체득한 경험들, 그 모든 시간이 한 문장으로 응축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이라는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의외로 담백했다.

  

“민주평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문위원들이에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무처는 자문위원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위’가 아니라 ‘역할’이었다. 이끄는 자리라기보다, 돕는 자리, 지시하는 조직이 아니라, 뒷받침하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더 분명하게 풀어냈다.

  

“자문위원들이 국민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또 국민들의 의견을 듣고… 그런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단순한 원칙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구체적인 방식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문위원 한 사람이 50명씩 국민을 만나보자는 겁니다.” 그의 설명은 간단했지만 그 그림은 결코 작지 않았다. 국내외 약 2만 명의 자문위원이 각각 50명을 만난다면, 그것은 곧 100만 명의 국민을 직접 만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100만 국민 인터뷰’를 하자고 한 겁니다.” 이 순간, 그의 말은 더 이상 추상적인 메시지로 들리지 않았다. ‘국민이 한다’는 말이, 눈앞에 확 와닿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한 사람을 만나고, 또 한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100만 번의 대화가 이어지는 일로, 그는 통일을 그렇게 시작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명’을 강조했다.

  

“쉬운 언어로 설명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는 통일을 어려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풀어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배워온 방식이기도 했다.

  

“통일 문제를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멀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간다. 자문위원들이 국민을 만나고, 국민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그 목소리가 모여 정책으로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 그는 그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국민들의 의견을 듣고, 또 그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지금은 서로 생각이 다르면 아예 말을 안 들으려고 하잖아요.”그의 시선은 단순히 통일 문제를 넘어, 오늘의 사회를 향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도,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들어주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 말은 그의 어린 시절 경험과도 닮아 있었다. 10·26 이후 친구와의 충돌 속에서 느꼈던 그 깨달음— “사람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지금의 언어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결국 국민들의 마음이 모아져야 평화도 가능하고, 통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이미 그는 ‘하루 100원 통일운동’으로 천 명의 참여를 만들어냈고, 그 흐름이 오천 명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는 같은 방식으로, 백만 명을 만나겠다고 말하고 있다.

  

▲ 지난해 8월 취임식을 마친 후 방용승 처장은 사무처 간부 직원들과 국립현충원을 방문했다.©민주평통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 기자의 머릿속에는 한 장면이 또렷하게 떠 올랐다.

  

누군가 연단 위에서 통일을 외치는 모습이 아니라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이다. 그 작은 만남이 이어지고 또 이어질 때 비로소 ‘국민이 하는 통일’이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같은 말을 남겼다.

  

“국민이 함께 해야 합니다.”

  

산 너머를 궁금해하던 한 소년의 질문은 이제 사람을 향한 길이 되었다.

통일은 그렇게,다시 한 사람, 한 사람, 국민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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