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안델(Thomas Arndell, 1753-1821)은 호주 식민지 개척사의 여명기를 상징하는 다면적인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의료인을 넘어 판사, 성공한 농업가, 그리고 지역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갓 태어난 식민지가 자립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그의 삶은 대영제국의 변방에서 새로운 문명을 일구어 나간 개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출생과 초기 생애
토머스 안델은 1753년 3월 영국 헤리퍼드셔(Herefordshire)에서 앤서니 안델과 엘리자베스 해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교육받은 중산층 가정의 막내로 자랐으며, 런던으로 이주하여 약제사(Apothecary) 수습 과정을 거쳤다.
1781년에는 왕립 외과대학에서 자격을 취득하며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동인도 회사 선박의 의사로 근무하며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제1함대와 호주 정착의 시작
1786년, 안델은 새로운 식민지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로 향하는 제1함대(first fleet)의 보조 외과의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렌드십' (Friendship)호에 몸을 싣고 1788년 시드니 코브에 도착했으며, 정착 초기 식민지의 열악한 위생 상태와 싸워야 했다.
아서 필립 주지사는 그의 능력을 신뢰하여 파라마타(Parramatta) 지역의 병원 운영을 맡겼다. 당시 파라마타 병원은 설비가 매우 빈약했으나 안델은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수많은 죄수와 정착민의 생명을 구했으며 호주 의료 시스템의 초석을 다졌다.
농업 개척자로의 변신
1790년대 초, 안델은 식민지가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는 농업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792년 의료직에서 은퇴하고 본격적인 농부의 길을 선택했다.
필립 주지사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공직자임에도 불구하고 파라마타에 60에이커의 땅을 하사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특혜였다.
이후 그는 호크스베리(Hawkesbury) 강변의 카타이(Cattai) 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대규모 농장을 일구었다. 그는 단순히 땅을 일구는 데 그치지 않고 스페인산 메리노 양을 도입하여 양모의 질을 개선했으며 밀과 보리 등을 대량으로 재배했다.
특히 호크스베리 지역 최초의 풍차를 건설하여 밀가루를 생산함으로써 호주의 식량 안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법과 질서의 수호자
안델은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공직자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윈저(Windsor) 지역의 치안판사(magistrate)로 임명되어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고 법적 질서를 유지했다. 그는 정착민들의 고충을 주지사에게 직접 전달하는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으며, 특히 1806년 발생한 대홍수 당시에는 이재민 구호 활동을 주도하여 큰 존경을 받았다.
1808년 호주 역사상 유일한 군사 쿠데타인 '럼주 반란(rum rebellion)' 당시 그는 윌리엄 블라이 주지사 측에 서서 합법적인 정부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반란 세력으로부터 판사직과 연금을 박탈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훗날 매쿼리 주지사 시대에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사회적 유산과 그의 자녀들
그는 신앙심이 깊어 본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했고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에벤에셀(Ebenezer) 교회의 설립과 학교 운영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그의 신앙은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그의 자녀들은 안델의 신앙을 본받았고, 신앙인으로 참된 삶을 살았다.
안델의 개인사는 당시 식민지 사회의 통합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는 죄수 출신이었던 엘리자베스 벌리(Elizabeth Burleigh)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 1807년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슬하에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자녀들을 엄격하면서도 자애롭게 양육했으며, 그의 딸들은 후에 호주 사회의 주요 인물들과 결혼하여 안델 가문의 영향력을 넓혔다.
그의 딸 에스더 안델 (Esther Arndell)은 윌리엄 호벨(William Hovell)과 결혼했다. 그의 남편인 윌리엄은 1824년 시드니에서 포트 필립(현재의 멜번 인근)까지 육로 탐험을 성공시킨 전설적인 탐험가였다. 또 다른 딸 새라 안델 (Sarah Arndell)은 선교사이자 언어학자인 랜슬롯 스래켈드(Lancelot Threlkeld)와 결혼했다.
그는 뉴사우스웨일스 레이크 맥콰리 지역(Lake Macquarie)에서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펼치며 원주민 언어를 기록하는 등 인권 보호와 학술적 공로를 남긴 인물이었다.
한편, 토머스 안델 2세 (Thomas Arndell Jr.)는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카타이(Cattai) 농장을 경영했다. 그는 지역의 유력 인사로서 부친의 유산을 지켰으며, 그의 자녀들(안델의 손주들) 또한 지역 우체국장이나 대규모 목장주로 성장하여 '호크스베리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마지막 순간
토머스 안델은 1821년 5월 2일, 69세의 나이로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군 카타이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부고 소식에 식민지 전역이 슬퍼했으며 그는 현재 윈저의 성 매튜(St Matthew) 묘지에 잠들어 있다.
오늘날 토머스 안델은 정직한 공직자, 헌신적인 의사, 그리고 선구적인 농부로서 호주 식민지 초기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세운 카타이의 농장은 현재 카타이 국립공원(Cattai National Park)의 일부가 되어 후손들에게 개척 정신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살면 그의 영향력은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안델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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