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임계점

백종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10/26 [10:31]

임계점

 

여러분은 물이 몇 도의 온도에서 끓는지 잘 아실 겁니다. 바로 100도입니다. 물은 99도까지는 끓지 않는데 99도까지는 물의 형태로 있다가 100도가 되어야만 수증기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물질에는 구조와 성질이 바뀌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물이 끓는점에 도달해 기체로 바뀌는 것처럼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계점을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99도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온도를 올려두어도 마지막 1도를 넘기지 못하면 물은 영원히 끓지 않습니다. 물을 끓이는 것은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그 1분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그 임계점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변화의 노력들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반드시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한 예로 우리가 나무를 바라볼 때 땅 아래 뻗어있는 무수한 뿌리들은 바라보지 못합니다. 단지 땅 위에 드러난 잎과 열매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임계점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갈 때 여러분의 뿌리는 계속 단단히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설 때 찬란한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임계점이란 변화를 위한 시간이자 어떤 변화와 성취에는 이 시간이 필수로 요구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노력하며 인내하는 시간이 아닌, 분명 ‘도약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계점은 그저 인내의 시간만이 아닌, 변화에 다다르는 순간을 깨닫는 지혜를 익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내려놓기

 

우리가 변화를 위해 연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나 중심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각자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동료에게 내가 이만큼 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변화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사실은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최선과 도움을 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옳음과 최선을 주장하다 보면 오히려 서로에게 실망하고 넘어지는 일을 반복할 뿐입니다.

 

분명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가지고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끓지 않고 열매가 맺어지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더 참아야 돼?”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더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잠잠히 상대방에게 눈을 맞추시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먼저 사랑하고 용납하고 섬기고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곧 나 중심의 생각이 아닌 어떤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 반대되는 의미에서 타자 중심의 생각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고 또한 의미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어떤 대화 방식을 기대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맹점을 극복하십시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한 가지 실험을 함께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지시하는대로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에서 원과 +(플러스) 표시가 보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오른쪽 눈을 가립니다. 약 30cm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왼쪽 눈을 +에 집중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눈을 가까이 댔다가, 천천히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반대쪽, 곧 원이 보이지 않게 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이곳을 바로 ‘맹점’, 영어로는 ‘blind spot’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느냐 하면 의학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볼 때 눈 안에서 시신경다발이 모이는 곳이 있는데 시신경세포가 없어서 상이 맺히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즉 눈으로 본다고 해도 상이 맺히지 않아서 뇌에서는 지각할 수 없으니 볼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이를 맹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는 어떤 의미로써 사용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뉴스 기사 중에 이런 표현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주장의 맹점은 이 거야”

“네가 맹점을 찔렀구나”

“스마트폰 지문인식의 맹점”

 

“법의 맹점을 이용한 다음의 주장은...”등등의 표현들입니다.곧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순되는 점이나 틀”을 이야기할 때 맹점이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나 중심의 생각이 곧 맹점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상대방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이 이것으로 인해 곤란해지거나 불편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모순되게도 상대방을 위한 일들이 오히려 상처가 되고,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 우리는 이런 맹점과 같은 일들을 수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의 도움과 필요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우리가 테스트를 해봐서 알겠지만 실험의 조건은 한쪽 눈을 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두 눈을 뜨고 하면 이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눈을 한 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두 개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해결책이 단순해 보이지만 맹점을 극복하려면, 피하려면 두 눈을 부릅뜨고 보면 됩니다. 곧 누군가를 생각하며 대함에 있어서 대충 짐작하거나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생각, 관찰,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아 발생하는 모순 같은 것을 없앨 수 있습니다.

 

맹점은 어쩔 수 없이 다 있는 것이 아니며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한 번 더 관찰하며 집중하는 가운데 사랑과 배려 섬김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오히려 상대방의 상처와 아픔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아끼는 사람이고 사랑해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가시가 되고 비수가 되고 독이 됩니다.

 

더 이상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두 눈을 부릅뜨고 세밀하게 상대방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약점이 보이십니까? 그 상처와 약점이 보인다면 그것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며 억지로 내가 바꾸어야 할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아픔에 공감해 주시고 손을 내밀어 주시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쌓여서 우리 자신이 변화하는 임계점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백종규|히스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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