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함을 실천하십시오

백종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1/11/29 [14:31]
©Yoal Desurmont     


인간의 존엄성

 

1948년, UN총회에서 인권 선언문이 채택이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세계대전과 나치즘의 공포 정치로 인한 치욕을 겪으며, 사람들은 ‘존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받으면 안 된다는 원칙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실제로 인간의 존엄성을 잘 지키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네’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 비참함과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인간의 존엄함을 세워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지금까지도 세상에서는 전쟁의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분쟁지역에 국한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함이 극단적으로 무너지는 사건들을 우리의 삶 가까운데서도 여전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을 열심히, 배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고, 거짓을 말하고, 타인을 희생시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만한 권력자나 경영자, 돈에 눈이 먼 의사, 성과에 집착하는 과학자,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성공주의에 빠진 종교인. 이처럼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사람들. 과연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잘 지켜가고 있는가를 되묻는다면, “네”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해명이나 변명 자체에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쇼핑을 하고, 인터넷을 하고, TV 드라마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나면 다시 평안을 되찾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크리스찬은 그렇게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인간의 죄된 본성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나의 유익과 안전과 어떤 상황 속에서, 나 자신의 존귀함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엄함을 함께 지켜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다른 사람을 나의 기대와 평가, 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으로 인해, 때로는 나의 존엄이 위기에 처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사울

 

우리는 성경 속에서 그 존엄함을 지켜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존엄’이라는 차원에서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서 좇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사울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은 억울하게 도망자가 된 상황 속에서도, 사울을 존엄한 자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 역시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자신이 존엄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존엄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사울은 존엄한 자에 맞는 삶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울의 방식대로 되갚아 주지 않고 용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엄함을 깨달은 사람들은, 타인의 가치와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따라 행동하며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창을 던지고 공격했지만 다윗은 사울의 존엄하지 않은 행동에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사무엘상 26장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사울왕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존엄한 자로서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들을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확신 속에서, 곧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줄 내면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방향을 잃지 않고, 유혹에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처럼,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삶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존엄함이 가득한 인생

 

세상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더 행복하다고 이것이 있어야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유혹하는 각종 광고나 영상, 조언이나 제안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존엄한 사람들은 믿음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올바르게 찾습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다른 누구의 평가나 인정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의미 있다고 말하는 권력이나 영향력, 재산, 상징, 지위, 자리 또한 갈구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존엄함을 해치지도 않습니다.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목적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수많은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헛된 것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 더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러한 존엄함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가진 복음의 능력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방식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는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작은 일에서부터 존엄함을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길을 가다 만나는 사람들을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지나쳤다면,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대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이것을 해라. 어떻게 해라” 지시하는 대신, 새로운 경험에 도전해볼 수 있도록 타인을 권유하고 격려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당장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존엄한 자임을 인식하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존엄한 자임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순간 순간이 즐거운 일이 되며, 살아있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하는 존엄함이 가득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

 

백종규|히스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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