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슬픔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7/22 [12:16]

 ©Nitish Meena     

 

실버타운에서 만났던 노부부가 바닷가 나의 집으로 찾아왔다. 오십 년의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이 고국으로 온 것이다. 

  

젊은 날 미국 영화를 많이 본 부인은 화면 속같이 파티에 가야 하는 줄 알고 파티복을 가방에 넣고 이민을 갔다가 공장에서 죽도록 노동만 했다고 했다. 한평생이 다 저물고 부인은 검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얘기 중 부인의 이런 말이 있었다.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을 때 저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들이 가지 말라고 잡아줄 걸 기대했어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아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구요. 다 큰 아들은 엄마가 더 이상 필요없었어요.”

  

험하고 고된 이민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걸고 자식을 키운데 대한 서운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면서 미국으로 갔다. 문득 이십여 년전 진눈깨비가 쏟아지던 밤 뉴욕역의 단편적인 몇 장면이 먼 시간 저편에서 내게로 날아 왔다. 

  

나는 밤늦게 기차에서 내렸다. 소변이 보고 싶어 화장실로 갔다. 축축한 바닥에 노숙자들이 발디딜틈 없이 누워있었다. 역의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붉게 충혈된 눈이 야행성 동물같이 털 대상을 노리고 있었다. 

  

큰 덩치의 흑인 한 명이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가면서 돈을 달라고 손을 벌렸다. 나는 그가 구걸을 하는 건지 강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친구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치니까 그 흑인은 슬며시 물러갔다. 그게 내가 본 뉴욕의 화려한 무대 뒤쪽의 모습이었다. 

  

나는 기차를 갈아타고 롱아일랜드의 간이역으로 가서 주차되어 있던 친구의 폰티악을 탔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녹이 슨 낡은 차였다. 잠시 후 그가 어두운 도로 위를 달리면서 말했다.

  

“나 세탁소 종업원으로 있어. 하루 열두 시간 육중한 다리미 앞에서 일하면서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체크당하고 있어. 아내는 세탁소에서 바느질거리를 얻어다가 일해. 아직 애가 어리기 때문에 직업을 가질 수도 없어. 애들이 울면 옆집 여자가 와서 악다구니를 하는 바람에 기를 펴고 살 수도 없어. 

  

내가 사는 곳은 아주 험한 슬럼가야. 며칠 전에도 우리가 타고 온 기차 안에서 한 놈이 총기를 난사해서 세 명이 개죽음을 당했어. ”

  

그는 이민이 아니라 지옥에 빠져 든 것 같았다. 우리는 서너 살 무렵부터 가난한 동네의 같은 골목에 살면서 같이 세발자전거를 타면서 자랐다. 사업이 망했던 그의 아버지는 새로운 원단을 개발해 부자가 됐다. 

  

그는 여유 있는 환경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공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음악을 즐기고 놀기 좋아하는 착한 친구였다. 삼십대 후반 그는 그동안의 게을렀던 인생을 지워버리고 미국에서 새출발해서 성공해 보겠다며 떠났었다. 

  

나는 핸들을 잡은 그의 옆에서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미국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가족들 생활비와 집 렌트비 벌기도 힘들어. 매달 적자 인생이지. 언제 길거리로 나가 홈리스가 될지 몰라. 여기서 살려면 돈하고 총이 있어야 해. 믿을 건 그것뿐이야. 그런데 말이지 난 돈도 총도 아무것도 없어. 

  

매달릴 수 있는 건 하나님뿐이더라구. 나와 가족의 목숨까지도 주님께 의지하고 복종하는 수 밖에 없어. 그냥 순간순간 주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지. 그렇게 확 믿어버리니까 내가 사는 슬럼가가 하나도 무섭지 않아지는 거야. 

  

아까 역에서 네가 강도 같은 놈을 만났을 때 내가 뒤에서 소리치고 덤벼들었잖아? 내가 힘이 있니 아니면 총이 있니? 그런데도 그 놈이 겁을 먹고 가잖아. 그게 믿음의 힘이지. 나를 죽이시려면 죽이시고 얻어맞게 하려면 그렇게 하시라고 그냥 모든 걸 던져버렸어. 그랬더니 언제 어디를 가던지 참 자유로워졌어. 이제 편해.”

  

친구의 고난과 불행 앞에서 나는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그냥 마음만 아팠다. 그 후 연락도 끊겨 버렸다. 시간이 강물같이 흐르고 세발자전거를 함께 타던 우리는 생의 바닷가에 와 있는 노년이 됐다.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그가 미국교회의 단상에 올라 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봤다. 

 

아기 때 운다고 옆집 외국여자가 난리를 치던 아이도 바이얼린 주자로 잘 컸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반가운 모습이었고 기쁜 소식이었다. 내가 소개를 했던 그의 아내도 이제는 원망하지 않을 것 같다.〠 

 

엄상익 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 엄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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