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때 얻을 수 있다

글|정원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2/28 [13:01]
▲ 피터 휴만 씨(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는 집 앞에 호주국기와 한국국기를 넣어서 만든 환영 배너를 걸어서 참석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  © 크리스찬리뷰
 
지난 2월 5일과 6일. 지난 해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남 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식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호주 선교사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다시 만나는 시간을 멜본에서 가졌다. 모임 장소인 피터(Mr. Peter Humann)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다소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별로 큰 행사가 아니라 몇 사람이나 올까 했는데 시드니, 브리즈번, 캔버라, 뉴카슬 그리고 미국 등 먼 곳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참석을 한 것이다.

집 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행사에 가장 고령자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국에 갔다가 그만 공항에서 넘어져 골절상을 입었던 루시 여사(93. Mrs. Lucy G. Lane)가 건강한 몸으로 참석한 것이었다.
 

▲ 2010년 10월 경남성시화운동본부 초청으로 ‘경남 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했던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이 2월 5일 오후 3시 멜본에서 후속 모임을 가졌다. 모임 장소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진주와 서울에서 선교 사역에 헌신했던 Jessie McLaren 선교사가 살았던 자택에서 가졌는데  3시간 여 동안 담소를 나누며 선조들의 한국 선교 사역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데이빗, 반가워요. 나 이제 회복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자신이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정도로 건강해졌다는 말에 기뻤다. 그 옆에 손녀 딸 조지아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할머니가 다쳤을 때 옆에서 간호해 주었던 착한 자매였다. 얼마 전 결혼해 남편이 운영하는 포도농장으로 가야했기에 멜번을 떠나 살고 있다.

 “어때요, 농장은 잘 되나요?”

 “예…, 그럭저럭. 그런데 얼마 전 많은 비로 어려움이 좀 있어요.”

홍수로 피해를 입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늘 긍정적이고 웃는 그녀의 미소 속에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다과를 나눈 우리들은 전체 모임을 가졌다. 그곳에서 이 모임 장소가 선교사들에게 있어 중요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피터와 그의 두 아들 존 휴먼과 더글라스가 지키고 있는데 선교사들이 호주로 오면 이곳에서 만남을 가져왔다고 했다. ‘선교사들 모임장소’(Traditional Korea fellowship meeting place)로 공식화 된 것이다.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 된 피터는 자신의 아내 레이첼의 환갑 잔치를 이곳에서 가졌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시가 지금은 손자뻘 되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가 기억납니다. 다들 어렸었는데 꼬마들이었지요…! .”

우리는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집 안팎을 둘러보았다. 집안에는 역사적인 자료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예전의 서울의 거리 풍경 흑백 사진에서부터, 한국에서 가져온 자개장에 이르기까지 마치 어린 시절 시골 할아버지 집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  한국에서 가져온 그릇과 식사 시간을 알렸다는 작은 징.    ©크리스찬리뷰

▲ 한국에서 1940년대에 가져 온 자수와 물감으로 만든 벽걸이.  "입춘대길"이란 글이 눈에 띈다.   ©크리스찬리뷰
▲  자수와 물감으로 우물가의 여인들을 표현한  1940년대 벽걸이.   ©크리스찬리뷰

 
얼마 전까지 자신이 직접 관리했다는 정원은 멜본에서 보기 드물게 잘 꾸며져 있었는데 눈에 유난히 들어오는 큰 나무가 있어 가까이 가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은행나무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통해 이런 친밀함을 느낀 지가 꽤 오랜만인 것 같았다. 호주에서 처음보는 한국의 은행나무에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한국에서 1940년대에 가지고 와서 심어 놓았다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은행열매라 좀 가져갈 수 있을까 피터 할아버지가 모아놓은 은행들을 살펴보니 너무 오랫동안 보관을 해두어서 다 말라있었다. 아쉽지만 보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1908년도에 지어졌다고 뿌듯해 하는 피터 할아버지 집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리치몬드에 예약한 한국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연히 함께 할 줄 알았던 피터 씨는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초대하지 않아 안 가려구… .”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는데 그의 진지함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권순형 발행인의 두 딸이 살갑게 다가가 함께 가자고 설득해서 식당으로 모시고 올 수 있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시는데 얼마나 잘 드시는지 ‘모시고 오지 않았으면 큰일날뻔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한국식당에서 한식을 먹고 있는 선교사와 후손들.    ©크리스찬리뷰

 
일행 30명 가운데 한국인은 필자와 권순형 발행인 가족 네 사람 뿐이었는데 두 딸들이 윤활제 역할을 해줘 모임이 화기애애할 수 있었다. 우리의 문화와는 아직 차이가 있는 호주는 노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이 조금은 부족한 듯 싶었는데 두 자매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하경진 선교사(Marjorie Neil)의 장남 이승일(Stephen Neil)씨는 1963년 3월 부산 출생인데 유난히 김치를 좋아했다.     ©크리스찬리뷰
한국인보다도 한국 음식과 특별히 김치를 좋아하는 선교사의 자녀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했던 한국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그들. 우리와 이들을 이와같이 한 형제처럼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선교사들의 헌신이 아니었을까? 안락한 고국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낯선 한국 땅으로 향했던 그분들의 희생이 지금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 민족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남겨주었다.

버림이 없이는 열매도 없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세 가지를 버렸다고 한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바하의 음악을 버렸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던 안락한 삶을 버렸으며,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인 교수직을 버렸다고 한다. 그의 버림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아프리카의 많은 영혼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 한국에 첫 번째 선교사, Joseph Henry Davies를 파송했던 Scots Church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기념 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  예배 후  파이프 올갠 반주자가 후계자에게 올갠을 가르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 Traditional Korea Fellowship     ©크리스찬리뷰
 


하나님의 나라를 짓기 위해서는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요구된다. 정호승 시인의 <부러짐>은 오늘날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정원준|멜번우물교회(Well Church)  담임 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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