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最古 비자 호조 발견- 크리스찬리뷰 2008년 1월호

주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와 주쇼셔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7/18 [14:36]
국내 最古 비자 ‘호조’ 발견
 
 
크리스찬리뷰사에서 2008년 1월호 커버스토리로 최초 보도한  한국에 왔던 최초의 호주인 데이비스 선교사의 여권과 비자 관련 특종기사를 오늘(2011년 7월 17일) 국민일보(윤중식 기자)에서 "<단독> 국내 最古 비자 '호조' 발견"이란 제목으로 보도했습니다. 

국민일보 기사에 의하면 "호주 멜버른 스카치처치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병인양요(1866) 이후 개화가 본격화되면서 서양인에게 발급된 최고 비자가 처음 실물로 확인, 공개된 것이다." "현재 국내로 가져오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는데  전혀 사실과 다른 오보입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여권과 비자는 1881년 데이비스 선교사가 설립한 코필드 그래머 스쿨 역사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박물관은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크리스찬리뷰사는 공개를 원치 않는 학교 측에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 어렵게 허락을 받아 내어 2007년 12월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으며 데이비스 선교사의 일기를 포함한 여러 기록들을 대조하여 확인 작업을 거친 후 창간 18주년 기념호(2008년 1월호) 특집으로 최초 보도했습니다. 

또한 본지와 기사교류협약사인 한국의 인터넷 신문 '뉴스파워' 2008년 1월 4일자에도 상세하게 보도되었습니다. 
 
크리스찬리뷰사는 1990년 창간 때부터 현재까지 21년 동안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집중적으로 발굴, 보도해 왔으며 데이비스 선교사의 여권과 비자에 대해 취재 당시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스테판 뉴톤(Stephan H Newton)교장은 2006년 학교 설립 125주년을 맞아 데이비스 선교사가 사용한 한국 여권과 비자를 발굴했다고 밝혔습니다.

코필드 그래머 스쿨 역사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비자에 대해 국민일보는 "<단독>", "데이비스 선교사의 비자(호조)가 호주 멜버른 스카치처치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처음 실물로 확인, 공개했다"는 보도는 전혀 사실과 다른 확인이 안된 분명한 오보입니다. 또한 "비자(호조)를 국내로 가져오는 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본지는 코필드 그래머 스쿨에 사실 여부를 문서로 확인할 예정입니다. 이에 대한 국민일보의 해명과 함께 정정기사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커·버·스·토·리

 
▲     ©크리스찬리뷰 2008년 1월호 표지

2008년 1월호 
 
     
▲1884년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초대교사들과 데이비스 교장 (앞줄 가운데)       ©크리스찬리뷰 2008년 1월호
      
 
▲ 호주인 최초로 받은 조선시대(1890년) 여권과 비자     ©크리스찬리뷰 2008년 1월호


▲ 데이비스가 발급받은 호주인 최초의 한국비자에 德倍時란 한자로 한국명이 적혀있다.     © 크리스찬리뷰
 
 
최초공개 한국에 왔던 최초의 호주인 데이비스 선교사‘여권과 비자’   

호주가 한국 땅에 뿌린 첫 번째 복음의 씨앗, 데이비스 선교사
세상을 품는 지성과 불타는 구령의 열정
교육을 통한 선교 비전


한국에 왔던 최초의 호주인 데이비스 선교사 ‘여권과 비자’

주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와 주쇼셔 

본지는 1990년 창간호부터 10년 동안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를 돌아보는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산고’(고신대 이상규 교수)를 100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으며, 2000년 3월에는 본지 특별취재팀이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 부산, 경남지방을 현장취재하여 8회에 걸쳐 보도한 바 있다.    
 
본지는 창간 18주년을 앞두고 지난 해 11월 멜본지역의 명문학교인 코필드학교가 데이비스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으며, 그 결과 데이비스가 한국 선교사로 떠나기 전(1881-1888)까지 7년 동안 기초를 놓은 코필드학교가 그의 비전과 영적 유산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993년 제8대 교장으로 취임한 스테판 뉴톤 교장(Stephen H. Newton)은 그동안 학교를 ‘기독교적 유산’을 살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2006년 학교 설립 125주년을 맞아 데이비스가 제직 중 기록했던 일기장과 한국 선교에 사용된 여권과 비자를 발굴해 냈다.
 
본지는 금번 코필드학교 취재를 통해 한국에 왔던 최초의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1856. 8.22-1890. 4.5)가 사용했던 여권과 비자를 최초로 공개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도 밝혀냈다. 
 
첫째, 데이비스는 1860년 뉴질랜드에서 건너온 ‘키위’ 출신의 이민자였으며, 둘째, 호주의 첫 번째 여자 선교사가 데이비스의 누이 사라였으며 데이비스는 사라의 요청을 받고 20세에 교사 겸 평신도 선교사로 남인도에 갔으며, 셋째, 데이비스는 본래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안수를 위해 장로교로 이적했다는 사실이다.  
 
본지는 금번 취재를 통해 데이비스가 1889년 10월 2일 한국 땅을 밟았지만 여권 발급시기는 5개월 이후인 1890년 3월 한국 주재 영국 총영사관으로 기재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여권의 진위여부에 대해 확인작업을 펼친 결과 데이비스의 일기에서 여권과 비자가 당시 발급된 진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일기 내용 - 1890년 3월 2일 : 기대대로 하자면 이보다 전에 벌써 부산으로 출발했어야 옳다. 여권을 기다리느라고 이렇게 지체하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 소망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도다”에 대해 설교했다. 3월 10일 :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여권이 방금 왔다는 것을 알았다. 3월 14일 오늘 아침 일찌기 Hulbert 씨에게서 말이 왔고, 날씨도 좋고, 영만 씨도 빨리 서둘러 떠나고 싶어서 급히 나를 위해 준비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의 mapov(편집자 주- 비자로 추정됨)를 기다리다가 오후 1시 30분경에 출발했다.)  
<자료= courtesy of Caulfield Gammar School> <편집자 주>    


 <데이비스 선교사 여권과 비자 배경 설명>
 
한국은 영국과 1883년 11월 26일 주중공사 파크스가 서울에 도착하여 경복궁에서 새로운 우정, 통상, 항해 조약에 서명하고 W,G 애스톤이 영사관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파견, 1884년 5월 퇴락한 전의 왕궁이 있는 부근인 정동에 약간의 토지 구입 계약을 맺었다. 이 토지는 1,200 멕시코 달러, 영화(英貨) 약 225파운드에 구입되어 현재는 주한 영국대사관이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 한국식 공관과 관저가 세워졌고 영국 외교 사절단이 업무를 시작했다. 
 
1890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고용한 영국인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당시 한국과 호주는 외교관계(한·호수교일 1961년 10월 31일)가 수립되지 않아 데이비스는 한국에 도착하여 한양(지금의 서울)에 있는 대영제국 총영사관에서 여권을 발급받고 현재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조선 기관(衙門)에서 비자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본지는 원광연 목사(월간 ‘생명나무’발행인, 시드니영락교회 협력목사)에게 여권을, 배용찬 장로(멜본한인교회)에게 비자내용에 대한 판독을 요청했으나 촬영상태가 일부 선명치 않아 판독이 어려웠으며, 고문서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여 모든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 여권

대영제국 여왕 폐하의 주한 총영사관은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요청하니, 모든 관계자들은 조셉 헨리 데이비스 씨가 대영제국과 코리아 사이에 체결한 조약 제 4항에 의거하여, 즐거움을 위한 목적으로 조선 영토 내를 여행하도록 허용하기를 바람.  도움과 보호가 요청됨 
 
▲ 조선 한양, 대영제국 총영사관 발행. 1890년 3월 X일 (*10일로 추정됨)    ©크리스찬리뷰 2008년 1월호 


▲한양 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발급받은 데이비스 선교사의 호주인 최초의
한국여권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 선교사에게 발급된 비자 
(여행증명서) 


 1. 문건의 성격에 대하여 
문서의 상단에 호조(護照)라는 문자로 보아 이조말엽(순조, 1800년대)에 사용된 외국인들에 대한 통행허가증으로, 정부기관에서 발급일자와 통행지역을 명시하여 발급하며 수수료는 1건당 15냥을 받았다고 함. 

 2. 문서발급 기관에 대하여 
첫 줄에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는 문구로 보아 현재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기관(衙門)에서 발급되었음. 

 3. 대상인에 대하여 
일정형식의 문건에 英國士人 德倍時라는 별도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음으로 보아 데이비스선교사의 한국명이 德倍時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士人이라고 하는 신분명은 당시 사회구조로 보아 상당한 대접을 한 것(선비계층)으로 판단됨. 

 4. 통행지역에 대하여 
폐쇄되어있는 당시의 정치구조로 보아 육지로는 전라도와 경상도(全羅慶尙), 그리고 해로로는 원산(元山)까지로 제한하고 있음. 

 5. 발급일자에 대하여 
경인년 2월 20일(庚寅)로 되어있음으로 보아 고종 27년(1890년)으로 계산됨. 이는 데이비스 선교사가 누이(메리 선교사)와 함께 부산을 거쳐 인천에 도착한 해가 1889년 10월이었고 부산에 도착한 날이 그 이듬해인 1890년 4월 4일이었으니 서울을 떠나기 전에 관계기관에 가서 통행증을 발급 받은 것으로 판단됨.  


 
글/김석원
사진/박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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