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인 최초 한국 여권과 비자(호조)

데이비스 선교사의 '여권과 비자' 최초 공개-2008년 1월호(18주년 특집)

글/김석원ㆍ사진/권순형, 박태연 | 입력 : 2011/07/27 [07:43]

▲ 호주인 최초 한국 파송 선교사 데이비스 (Joseph Henry Davies)    ©크리스찬리뷰
호주가 한국 땅에 뿌린 첫 번째 복음의 씨앗, 데이비스 선교사


세상을 품는 지성과 불타는 구령의 열정

교육을 통한 선교 비전

주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와 주쇼셔 

크리스찬리뷰는 1990년 창간호부터 10년 동안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를 돌아보는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산고"(고신대 이상규 교수)를 100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으며, 2000년 3월에는 본지 특별취재팀이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 부산, 경남지방을 현장취재하여 8회에 걸쳐 보도한 바 있다.    

크리스찬리뷰는 창간 18주년을 앞두고 지난 해 11월 멜본지역의 명문학교인 코필드학교가 데이비스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으며, 그 결과 데이비스가 한국 선교사로 떠나기 전(1881-1888)까지 7년 동안 기초를 놓은 코필드학교가 그의 비전과 영적 유산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993년 제8대 교장으로 취임한 스테판 뉴톤 교장(Stephen H. Newton)은 그동안 학교를 기독교적 유산을 살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2006년 학교 설립 125주년을 맞아 데이비스가 제직 중 기록했던 일기장과 한국 선교에 사용된 여권과 비자를 발굴해 냈다. 

크리스찬리뷰는 금번 코필드학교 취재를 통해 한국에 왔던 최초의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1856. 8.22-1890. 4.5)가 사용했던 여권과 비자를 최초로 공개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도 밝혀냈다. 

첫째, 데이비스는 1860년 뉴질랜드에서 건너온 키위 출신의 이민자였으며, 둘째, 호주의 첫 번째 여자 선교사가 데이비스의 누이 사라였으며 데이비스는 사라의 요청을 받고 20세에 교사 겸 평신도 선교사로 남인도에 갔으며, 셋째, 데이비스는 본래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안수를 위해 장로교로 이적했다는 사실이다.  

크리스찬리뷰는 금번 취재를 통해 데이비스가 1889년 10월 2일 한국 땅을 밟았지만 여권 발급시기는 5개월 이후인 1890년 3월 한국 주재 영국 총영사관으로 기재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여권의 진위여부에 대해 확인작업을 펼친 결과 데이비스의 일기에서 여권과 비자가 당시 발급된 진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기 내용 - 1890년 3월 2일 : 기대대로 하자면 이보다 전에 벌써 부산으로 출발했어야 옳다. 여권을 기다리느라고 이렇게 지체하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 소망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도다"에 대해 설교했다. 3월 10일 :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여권이 방금왔다는 것을 알았다. 3월 14일 오늘 아침 일찌기 Hulbert씨에게서 말이 왔고, 날씨도 좋고, 영만 씨도 빨리 서둘러 떠나고 싶어서 급히 나를 위해 준비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의 mapov(편집자 주- 비자로 추정됨)를 기다리다가 오후 1시 30분경에 출발했다.) 
<자료= courtesy of Caulfield Grammar School> <편집자 주>
    

  <데이비스 선교사 여권과 비자 배경 설명> 

▲ 데이비스 선교사의 여권     ©크리스찬리뷰

 
한국은 영국과 1883년 11월 26일 주중공사 파크스가 서울에 도착하여 경복궁에서 새로운 우정, 통상, 항해 조약에 서명하고 WA 애스톤이 영사관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파견, 1884년 5월 퇴락한 전의 왕궁이 있는 부근인 정동에 약간의 토지 구입 계약을 맺었다. 이 토지는 1,200 멕시코 달러, 영화(英貨) 약 225파운드에 구입되어 현재는 주한 영국대사관이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 한국식 공관과 관저가 세워졌고 영국 외교 사절단이 업무를 시작했다. 

1890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고용한 영국인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당시 한국과 호주는 외교관계(한․호수교일 1961년 10월 31일)가 수립되지 않아 데이비스는 한국에 도착하여 한양(지금의 서울)에 있는 대영제국 총영사관에서 여권을 발급받고 현재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조선 기관(衙門)에서 비자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본지는 원광연 목사(월간 '생명나무'발행인, 시드니영락교회 협력목사)에게 여권을, 배용찬 장로(멜본한인교회)에게 비자내용에 대한 판독을 요청했으나 촬영상태가 일부 선명치 않아 판독이 어려웠으며, 고문서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여 모든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 여권 

대영제국 여왕 폐하의 주한 총영사관은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요청하니, 모든 관계자들은 조셉 헨리 데이비스 씨가 대영제국과 코리아 사이에 체결한 조약 제 4항에 의거하여, 즐거움을 위한 목적으로 조선 영토 내를 여행하도록 허용하기를 바람.  도움과 보호가 요청됨 

조선 한양, 대영제국 총영사관 발행 

1890년 3월 x일 (*10일로 추정됨) 
  

데이비스 선교사에게 발급된 비자 

(여행증명서)


▲ 데이비스 선교사의 비자     ©크리스찬리뷰
 
1. 문건의 성격에 대하여 

문서의 상단에 호조(護照)라는 문자로 보아 이조말엽(순조, 1800년대)에 사용된 외국인들에 대한 통행허가증으로, 정부기관에서 발급일자와 통행지역을 명시하여 발급하며 수수료는 1건당 15냥을 받았다고 함. 

2. 문서발급 기관에 대하여 

첫 줄에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는 문구로 보아 현재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기관(衙門)에서 발급되었음. 

3. 대상인에 대하여 

일정형식의 문건에 英國士人 德倍時라는 별도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음으로 보아 데이비스선교사의 한국명이 德倍時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士人이라고 하는 신분명은 당시 사회구조로 보아 상당한 대접을 한 것(선비계층)으로 판단됨. 

4. 통행지역에 대하여 

폐쇄되어있는 당시의 정치구조로 보아 육지로는 전라도와 경상도(全羅慶尙), 그리고 해로로는 원산(元山)까지로 제한하고 있음. 

5. 발급일자에 대하여 

경인년 2월 20일(庚寅)로 되어있음으로 보아 고종 27년(1890년)으로 계산됨. 이는 데이비스 선교사가 누이(메리 선교사)와 함께 부산을 거쳐 인천에 도착한 해가 1889년 10월이었고 부산에 도착한 날이 그 이듬해인 1890년 4월 4일이었으니 서울을 떠나기 전에 관계기관에 가서 통행증을 발급 받은 것으로 판단됨. 


선교 바로하기 

"선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나요? 나원참" 아들을 보낸 선교여행팀에 보낸 부모님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길거리에서 무언극이나 하고 복음을 외치는 그런 건 제대로 된 선교라고 할 수 없다나요" 복음을 전한다고 타종교사회를 시끄럽게 하기보다는, 실제적인 학교나 고아원으로 돕는 전략적인 선교가 필요하다는 소릴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샘물교회 팀의 아프카니스탄 피랍 전후로, 한국선교문화를 탄식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안티기독교 집단이 등장해서 저주에 가까운 비판을 쏟고, 교계에서도 180도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넘친다. 한국 선교가 서구교회가 걸었던 우월주의나 성과주의로 치닫는데야 뭘로 변명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동안 보인 선교 열정이 온통 문제투성이처럼 되어 버렸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전공인 직접 전도에서 더 나아가 그동안 소홀했던 직업기회, 복지와 교육을 제공하는 선교 전략으로 바꾸자는 말은 귀기울일 만하다. 그러나 복음을 뒤로 한 선교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름뿐인 기독교학교, 무신론적인 인권단체나 사회복지기관과 다를 바 없게 되어버린 자유주의적 서구 교회의 예는 어떤가? 우리에게 필요한 답은 어쩌면 먼 이국의 신학도서관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 

선교 역사상 가장 큰 열매를 맺은 곳, 그곳에 뿌려진 씨앗을 보면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우리 조국, 그 조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그 손길에서부터... 바로 한국의 첫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 말이다. 


데이비스 - 선교의 열정으로 태운 인생 

(선교는 '인간의 노력과 씨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는 호주가 한국에게 보낸 복음의 첫 선물이었다. 아직 연방호주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가 구성되기 이전, 빅토리아주 장로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누이 메리와 함께 1889년 8월 호주를 떠났다. 잠시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운 뒤, 1890년 3월 목적지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2주의 여정 후에 찾아온 천연두에 폐렴증상까지 더해, 동네의 작은 일본인 병원에서 1890년 4월 5일 짧은 생을 마감한다. 

너무나도 짧은 사역 덕분에, 데이비스의 영향은 주로 그의 죽음을 듣고 도전을 받은 빅토리아주 장로교 선교부의 적극적인 한국선교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다. 그러나 선교학자 블로쉬의 지적대로 선교는 인간의 노력과 씨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라면, 우리 눈에 당장 보이는 건물과 성과뿐 아니라, 선교사의 삶과 영성이 전한 보이지 않는 영적 씨앗들도 하나님께 사용되리라. 이 점에서 호주인으로 한국에 첫 호주선교사 데이비스가 뿌린 영적 씨앗은 어떤 것이었을까? 

 
▲ 데이비스 선교사의 일기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의 생애 

데이비스는 변호사 가정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1856년 8월 22일생이고, 1860년에 뉴질랜드에서 건너온 키위 이민출신이었다. 데이비스는 머리가 좋았던 모양이다.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로 따지면 15살에 검정고시같이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아버지 옛동료들의 추천으로 법률서기(legal clerk)로 일하게 된다. 당시에는 변호사도 실무현장에서 키워졌기 때문에, 이렇게 있다가 법대를 마치면 화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세상의 명예에 만족하기엔 너무 높이 향해 있었다. 데이비스 가족은 구별된 삶, 선교를 강조하는 폴리모스 형제단교회 출신이었고, 선교사, 목사로 6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신앙이 체계화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장작이라면, 곧 불쏘시개를 만나게 되는데, 데이비스 가족이 멜본에 와서 출석하기 시작한 코필드성공회교회의 맥카트니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호주를 선교하는 나라로 이끈 맥카트니 

(맥카트니를 '문화를 총체적으로 개혁하는 비전의 사람'이라고 평한다) 

아일랜드계인 맥카트니목사(Hussey Burgh Macartney jr)는 유력한 성공회 목사 집안 출신으로 더블린 트리니티 신학교를 나온 엘리트였다. 당시 사회 상층이던 성공회 고위 성직자로서 특권과 안락을 추구하기에 매우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맥카트니는 그러기엔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은 "거룩 운동 Higher Life Movement"을 호주에 소개하고, 장로교, 침례교를 망라한 목회자 기도연합모임을 만들어 성령중심의 에큐메니컬운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호주 최초로 연합성경집회를 열어 호주대륙의 부흥을 구했다. 집회의 내용은 케직운동의 영향으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거룩한 삶의 실천을 강조하는 메시지에 강한 종말론적 기대를 담아 설파했다. 이런 움직임이후에 영어권 오순절운동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뜨겁고 긴박한 영적 긴장 속에서 당연히 국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골드러쉬로 늘어난 중국인 이민자 선교는 물론 YMCA, 성서유니온같은 국내선교사역, 더 나가서 직업별선교모임을 조직하는 등,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적극적이고 과감한 사역을 진행했다. 해외선교를 위해서는 성공회선교단체 CMS호주지부를 세우고, 교단을 초월해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지원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담임하던 코필드 교회에서 호주의 첫 여자 선교사가 나온다. 그 여성이 바로 데이비스의 누이 사라였다. 데이비스는 누이의 요청을 받고 20세에 교사 겸 평신도 선교사로 남인도로 향한다. 

맥카트니가 데이비스에게 준 영향은 무엇일까? 교단 선교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 교단벽을 넘은 선교를 실천했다. 그의 선교관은 선교사 개인의 전도자로서 역할을 강조하고, 교단 신학보다는 성령의 역사, 현실과 실제적인 변화에 대한 강조가 뚜렷했다. 이런 맥카트니를 개인주의적인 형제단 출신의 데이비스가 맥카트니가 평생의 영적멘토로 대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 데이비스는 안수를 위해 장로교로 이적하지만,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맥카트니의 연합네트워크를 이용한 결과로 보인다. 

맥카트니가 주도한 영성과 성화 운동은 데이비스의 형제단교회적 유산과 융합되어 또다른 재미있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바로 교육을 통한 전도다. 맥카트니의 선교 관심은 직접 선교뿐만 아니라, 주립도서관과 멜본대학의 설립하는데 앞장서는 모습으로도 드러났는데, 한마디로 포괄적 선교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페프로스 (Peproth D, 호주사가)의 지적대로 그는 문화를 총체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비전의 사람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는 데이비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건강악화로 인도에서 돌아온 데이비스는 맥카트니의 격려 속에 성경적 원리에 투철한 학교를 세웠다. 그것도 그가 멜본대학을 졸업하던 같은 해, 25살 나이에 그 학교는 독립학교로 있다가 1930년도쯤 성공회의 일부가 되는데, 바로 호주의 명문 사립학교 코필드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이다.
 
▲ 코필드학교 설립 당시의 학교 부지. 과거에는 사탕(lolly) 가게였다.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의 영적 전쟁 

(그의 코필드 설립은 강한 실천력뿐 아니라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읽어낸 혜안을 보여준다) 

맥카트니는 1873년부터 선교잡지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MHA)>를 발행했는데, 여기엔 데이비스가 인디아 선교사로 나가게 된 배경, 젊은 선교사로서의 감격과 좌절뿐만 아니라 그 후 그가 한국 선교 준비와 활동 과정이 선교 보고 편지의 형식으로 잘 드러난다. 

MHA 1876년 6월호에 보면 데이비스는 남인도의 교육 사역에 특별히 관심을 표시했고, 결국 선교지에 가서도 그곳의 학교 일에 관여한다. 1878년에 호주로 귀국한 뒤에도 데이비스의 교육선교의 비전은 호주를 대상으로 펼쳐졌다. 원래는 자기 학비와 가족을 돕기 위해서 그룹 과외선생 역할을 했는데, 동생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쯤 아예 함께 직접 코필드학교를 세운 것이다. 

데이비스의 비전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학교를 통해 인도 선교를 나갈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준비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성서적 교육을 통해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키우길 원했다. 

대학교육이 엘리트교육이었던 시절이지만, 대학졸업장만 가지고 학교를 시작하는 것은 보통 담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무모함은 데이비스의 엄청난 실천력뿐 아니라 시대흐름을 정확히 읽어낸 혜안을 보여준다. 당시 빅토리아주는 골드러쉬로 지방중산층들이 많아졌고, 자녀들을 더 좋은 교육기회를 주기 위해 학교를 찾고 있었고, 공교육을 담당하던 기성교단계열 사립학교에 불만을 가진 가정도 늘어났다. (당시에는 교육시장을 두고 경쟁하던 성공회, 카톨릭, 기타 교회간의 갈등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의무적, 세속적 교육원리가 정부차원에서 도입되었다) 

데이비스는 누이 메리를 통해 지방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제공하고, 학적인 면뿐 아니라 성경교육과 체육활동을 강조해서, 몇 년 만에 기존의 명문들과 어깨를 겨누는 유명학교로 발전한다. 

그러나 같은 기간 중에 쓰여진 데이비스의 일기를 보면, 학교의 발전이 데이비스에겐 기쁨이 되지만은 않았다. 데이비스는 코필드 학교가 기독교적, 성경적 원리에 따라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현실은 학문과 신앙이 같이 잡히기보다는, 결국 세상의 영광을 위해 학문을 더 쫓아가는 쪽으로 가는 듯 보였다. 성경적 원리와 학문적 성취가 서로를 포기하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  세인트 메리 코필드 교회의 담임 목사 마크 뒤리  ©크리스찬리뷰
 
 
▲ 크리스찬리뷰 객원 기자인 김석원 강도사가 코필드그래머 스쿨 교목 데이비드 수튜어트 목사, 고문서 관리 담당 주디스 씨와 인터뷰를 가졌다.(왼쪽부터) ©크리스찬리뷰

 
특히 학교 규모가 커지면서, 자기 자신도 결국 학교일에 매여, 인도로 복음을 전하러 직접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까봐 걱정했다. 학교가 자리를 잡고,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동생들이 경제력도 나아지자, 벼르던 선교사역을 위해 새로운 교장을 구하고 학교를 떠난다. 이때의 일기를 보면, 가족들의 반대 속에서 격정적으로 박차고 나오는 불같은 성품이 드러난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계획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운 계획조차도, 때로는 하나님의 인도와는 다를 때가 있다. 데이비스 역시 그를 부르는 곳은 인도가 아니라, 당시엔 통일된 표기철자조차 없었던 은자의 나라 한국이었다. 

중국 성공회선교회 울프목사의 서신이 MHA 1888년 5월호에 실린다. "생활비와 전도사 고용비용도 높아 사역이 쉬운 곳이 아니지만....박해의 두려움 때문에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불쌍한 한국인들을 위해...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는 이 호소에 데이비스의 마음은 한국으로 옮겨져 버렸다. 

그러나 그 곳을 책임질 선교사를 구하던 터라, 성공회선교회는 데이비스에게 먼저 안수를 받도록 요구한다. 성공회는 데이비스을 귀하게 봤지만 목회자 연수기간을 제대로 거치도록 요구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성공회에서 안수를 단념한다. 보다 학적인 조건을 채우는 데에 주목했던 빅토리아장로교회로부터 6개월의 연수 후 바로 목사안수시험을 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 이를 위해 1988년 영국 에딘버러로 단기신학과정을 들으러 간 데이비스는, 그곳에서도 일어나는 선교의 뜨거운 관심을 목격하면서 큰 위로를 받는다. 1889년 8월 5일, 지금도 멜본 시내에 나가면 볼 수 있는 스콧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떠난다. 

 


▲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료     ©크리스찬리뷰
 
 
교육과 선교 

(그의 비전은 기존 학교가 담아내기엔 너무도 강렬하고 이상적인 것) 

데이비스는 인도에서 돌아와 멜본대를 다니면서 크게 인정을 받아 교수 요원이 될뻔 했다. 그러나 그의 비전은 기존 학교가 담아내기엔 너무도 강렬하고 이상적인 것이었다. 당시 코필드학교 소개서를 보면, 그는 진정한 성경적 원리에 충실한 기독교 학교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비전은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의) 학문으로도 최고, 영적으로도 최고가 되는 것을 다들 바라지만, 우리 인간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이기심, 야심 그리고 죄로 찌들어있다. 아니 우리의 두 손은 둘을 다 집기엔 너무 연약한 지도 모른다. 

그의 이런 깊은 고민은 한국에 가기 전 들렸던 시드니 교회의 한 주일 설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거기서 그는 학교를 통한 선교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인도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쉽지 않은 도전임을 지적한다. 인도 부모들은 선교사들의 미션스쿨에 아이들을 보내면서도 신앙은 못받아 들이게 했는데, 결국 그런 간접적인 선교만으로는 심령을 바꾸어 놓기엔 문화의 힘이 너무 쎈 까닭이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교육을 통한 선교에 희망을 완전히 접지는 않는다. 결론에서 그는 이 영적전쟁의 승리가 성령의 도움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면서 소망의 불길을 되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시간이 갈수록 보다 교육 선교보다는, 직접 전도의 선교 방식에 더 마음이 끌렸음은 분명하다. 한국어를 익히자마자, 그는 거리전도자로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길을 다니면서 지역주민을 직접 대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겁도 없이 노방전도자로서 나선 것이다. 

MHA 1890년 7월호에 나온 선교보고 편지를 보면, 사용할 엽전이 너무 무거워 고생하는 이야기, 제대로 다리를 피고 잘 수 없을 만큼 좁은 숙소 이야기, 엄청난 비로 감기에 걸린 장면도 등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쪽지를 팔고, 복음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어도 너무나도 기뻤다"는 데이비스. 복음전도의 감격으로 자신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미쳐 눈치챌 틈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복음 vs 문화: 바른 선교란 무엇인가? 

(복음과 문화, 직접전도와 간접선교가 쉽지 않지만 서로 포기되지 않고 나갔던 귀한 모델) 

데이비스의 삶은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뒤로 한 이상주의적 청년의 순간 타올랐다가 사라진 불길같은 인생이기도 하다. 가슴과 지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결국엔 문자 그대로 전신을 바쳐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감동적인 신앙 선배의 이야기다. 데이비스는 뛰어난 지성과 불타는 가슴과 용기 있는 의지가 같이 했던, 지정의 모두로 신앙생활했던 신자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없는 신앙고백, 가슴을 잃어버린 형식주의, 삶의 결단이 보이지 않는 신자의 삶으로 인해 사회와 시대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본다면, 데이비스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나 이 자리에서 데이비스의 삶은, 지성과 감성, 교육과 복음, 직접적인 전도와 간접적인 선교 사이에서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씨름에서 그 빛을 발한다. 자유주의적인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이 복음의 핵심을 놓친 체 세속적 인권단체처럼 전락해 버리고, 보수적인 선교운동이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무시하고 순수한 복음만을 전한다며 개인주의적 이기적 신앙을 조장하는 이 시대... 한 20년 전에 서구기독교계를 휩쓸고 지나간 바로 그 숙제를, 우리는 아프카니스탄 때문에 지금에서나 끌어안고 고민하는 중이다. 

이점에서 호주가 우리에게 선물한 데이비스의 삶은, 한국교회 선교의 갱신을 위해, 놓치기엔 너무나도 귀한 모델로 다가온다. 복음과 문화, 불타는 가슴으로 거리로 나가는 직접전도와 냉철한 의지로 준비하는 간접선교가 쉽지 않지만 서로 포기되지 않고 나가는 것... 데이비스는 한국에 뿌린 자신의 씨앗이 그렇게 크길 바라지 않았을까?
 

▲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 선교의 길을 함께 떠났던 누이 메리와 함께 파송되기 직전 기념사진을 찍었다.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의 코필드학교 

(교육적 요구를 채우면서도, 영적 요구를 파악하여 복음을 분명히 전해주는 일은 큰 인내와 영적 분별력이 필요) 

데이비스가 기초를 놓은 코필드학교는 데이비드가 떠난 후에도 그의 비전과 영적 유산을 부분적으로 이어나갔다. 특히 데이비스가 떠나며 구한 교장인 바넷(Rev. Ernest Judd Barnett) 역시, 교장직을 그만두고 홍콩으로 건너가 미션학교를 세우는 선교사가 되었다. 

이미 데이비스가 일하던 때부터 코필드는 명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881년 32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2007년 현재 3천 명에 가까운 규모로 커나갔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기지만, 당시에는 기독교계 학교들은 운동경기를 하는 것을 아주 경박하게 여겼는데, 과감히 시대를 앞서서 운동경기와 공부를 모두 강조하고, 호주 최초의 교련 프로그램(Cadet)을 도입했다. 보다 성경적인 독립기독교학교로 존재하다 1930년대나 돼서 성공회로 편입되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사회지도층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나왔다. 이 학교 출신의 유명인사로는 전 멜본시장 론 워커, 전 빅토리아주 수상 린지 등이 있다. 

코필드학교는 한동안은 많은 교단계열 사립학교들처럼, 명목상의 기독교학교로 남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교장인 스테판 뉴톤 교장의 취임 이후, 학교의 기독교적 유산을 살리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6년 학교설립 125주년을 맞이하면서, 데이비스의 재직 중 기록한 일기장과 한국선교에 사용된 여권을 발굴하기도 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해외를 품는 마음이, 세계화한 코필드인의 기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무척 신경을 쓰는 분위기다. 

현재 이 학교 교목을 맞고 있는 앤드류 목사(Rev. Andrew Stuarts)는 데이비스 출석교회였던 세인트 메리 코필드성공회교회를 돕고 있다. 코필드교회의 목사 마크 드뤼(Rev. Dr Mark Durie) 역시, 한국선교에 대한 학교의 관심에 많은 격려를 보내는 사람 중에 하나다. 앤드류 목사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유대계 학생도 많지만, 예배는 필수로 요구되며 복음전달을 통해 직접적인 복음증거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근 연방정부가 시행한 '교목지원책'(National Chaplaincy Program)때문에라도 각 학교에 기독교활동에 관한 관심이 늘었지만, 학교를 통한 선교가능성이 갑자기 커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학교가 아이들을 돌보고, 부모들의 교육적 요구를 채워주면서도, 그들의 영적 요구를 잘 읽고 복음을 분명히 전해주는 일은 큰 인내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공립학교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도록 교목의 활동범위가 제약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저희 학교에 경우는 학교차원에서 교목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분위기라 좀 더 유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생과 동양계학생들이 많이 늘고, 작년에는 학생 대표로 동양계가 선출되었는데 학교 안팎의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호주최초로 중국 난징에 분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세계를 체험하고 품는 마음을 주기 원한다는 코필드학교는, 그 뿌리를 데이비스의 가슴과 연결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아마도 이 학교가 데이비스의 유산을 완전히 이루기는, 데이비스 자신의 고민만큼이나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땅에 그런 진지한 씨름이 남아있는 한, 소망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데이비스가 죽은 지 20년 만인 1910년에 호주에서 제수(J. Davies, 왼쪽)와 조카(마가렛 데이비스)가 그가 잠들고 있는 부산을 찾아왔다. 마가렛은 그 때부터 1940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 크리스찬리뷰     
 
 
글ㅣ김석원/ 객원 기자
사진ㅣ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박태연/객원 기자

참조-http://www.christianreview.com.au/sub_read.html?uid=1507&section=sc1&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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