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원본, 삶으로 맛을 내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3/26 [11:19]

우는 자들과 함께 울다

아프리카 케냐가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그 나라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선교사들이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다. 선교사가 ‘기도합시다’라고 해서 눈을 감았다 떠보니 우리는 성경을, 그들은 땅을 갖고 있었다.”

선교가 제국주의의 전위 역할을 했던 것을 꼬집은 말이다. 16세기 남미 선교도 폭력과 강압이 얽혀 있다. 그에 비해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그야말로 ‘신앙의 원본을 삶으로 보여주고, 맛을 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의 신문명을 일으켰으며, 신교육과 의료 봉사, 고아와 빈민 구제에 힘썼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있는 선교사 헐버트의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다.

한국 선교사를 여러 방면에서 조명할 수 있고, 또 의당 그래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소외된 들풀과 같은 민초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타국을 천국 삼아 활동한 초기 선교사들의 삶의 편린들을 담아보는 것도 의미있으리라.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의 ‘전라도 길’ 전문

이 시는 한센병을 앓는 모든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만이 안고 있는 질병으로 무통 중에 발가락이 떨어져나간 그 고통을 누가 알까? 그들만의 소외감과 절망감을 누가 감싸줄 수 있을까?

▲ 일신기독병원 설립자 매혜란 원장이 금번 4월 6일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는다.     ©크리스찬리뷰


한센병은 ‘몰라 3년, 터져 3년, 알아 3년’으로 9년이면 죽는다는 저주받은 병으로 인식되던 그 시절(불과 수십 년 전이다), 사람들은 보면 징그럽다고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재수없다고 침 뱉고, 모래 뿌리며, ‘문둥이’라고 조롱하던 그 엄청난 삶의 질곡을 헤쳐야 했다. 한 번 걸리면 회복이 불가능한 불치병,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병을 천형이라고 했다.

동족 가운데 그 누구도 한센인들과 친구가 되어주지 않으려 했던 그 시절, 그 한센인들을 위해 선뜻 나서준 이들이 있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던 그들이었다.

그들의 호칭은 바로 ‘선교사’였다. 그들이 누구였던가? 오늘은 한국 땅을 밟았던 무수한 선교사들 가운데, 두 처녀 선교사, 닮은 듯 다른 선교사의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서서평 선교사와 매혜란 선교사이다. 같은 30대 처녀 선교사로 한국땅에 들어왔지만 한 사람은 호남에서, 한 사람은 영남에서 사역한 것이 다르고, 같은 의료 선교사로 한 사람은 간호사로서, 한 사람은 의사인 것이 다르다. 둘 다 외국 선교사이지만 한 사람은 독일계 미국인이고, 한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호주에서 온 것이 다르다. 그럼 여기서 맥켄지 가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추적해 보자.

  
호주 선교사의 상징, 맥켄지 가문

우리가 잘 알다시피 네비우스선교정책에 따라 호주 선교사들은 부산·경남 지역에서 할동을 펼친다. 이때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선교사 가문이 바로 매견시 (Rev. James Noble Mackenzie) 목사 가문이다.

호주장로교 선교회에서 파송했던 선교사로서 1910년 내한한 매 목사는 부산에서 1905년 이미 선교사로 내한하여 사역하던 메리 켈리 선교사와 1912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애석하게도 외동아들은 만 2살이 안되어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매견시 선교사는 부산·경남 지역에서 가족과 세상에서 버림받아 갈 곳 없는 나환자에게 긍휼의 눈길이 머물렀다. 그리하여 처음 나병환자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25명을 관련기관에 후원을 받아 6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나환자병원(상애원)을 부산 용호동에 세웠다. 그는 이들을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하면서 인도산 촐무그라라는 기름(대풍자유)을 먹게 하는 치료 방법으로 초기에 병이 진행되는 것을 막았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나병환자 25%의 사망률에서 약 2.5%까지 감소시켰다. 나환자들은 자신들을 사랑해주는 매 목사를 위해 1930년에는 부산진에 기념비를 세워주었고, 용호동에는 기념대문을 세워 감사를 표했으며 나환자들의 아버지라 불렀다. 

매 목사 부부는 1938년 정년퇴임으로 호주에 귀국했고, 1956년 호주에서 별세했다. 그의 묘비에는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라고 새겨져 있다.

▲매견시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매혜란 선교사(Dr. Helen Mackenzie)는 매견시 목사의 장녀로 1913년 10월 6일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난, 한국생 호주인이다. 어린 시절 부산 좌천동에서 지내고, 1921년에서 1931년까지 평양 외국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호주로 귀국했다. 호주 멜본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퀸 빅토리아병원에서 수련을 받아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선교하던 모습을 보고 한국 친구를 사귀고 한국 정서를 보며 살았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여성과 아이들이 대우받지 못하고 천대받는 한국사회를 보고 자신이 꼭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공부를 해서 다시 돌아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산부인과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의사가 된 후 한국으로 바로 돌아오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한국선교사 파송을 번번이 거부당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중 중국 선교의 문이 열려 5년 동안 중국 윤난 진슈이에 가서 가난한 그들과 함께 의료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는 고향땅과 같은 한국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았기에 중국에서 호주로 귀국하여 바로 한국으로 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

당시 한국 전쟁 중이라, 모든 사람이 말리는 상황이었지만 꼭 오려고 노력하던 중 한국에서 의료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의료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

 
처녀 매혜란, 일신과 한 평생

매혜란 선교사는 동생 매혜영 선교사(Miss Catherine Mackenzie)와 함께 1952년 2월에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부산의 상황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폐허되고 암흑의 시기였다. 의료정책도 미비했고, 여성들은 가정이나 길거리에서 출산을 하면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고, 아기들도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이 상황을 접한 그는 먼저 여성과 아기들을 위해 병원을 세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매혜란 선교사는 부산진 좌천동에 위치한 부산진교회 작은 유치원을 빌려 1952년 9월 17일 일신부인병원을 개원하였다. 처음 좁은 병원을 개원하였을 때 일신부인병원은 호주의 선진 의료기술과, 무엇보다 어떤 환자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모두 치료해 준다는 소문이 나 작은 병원은 얼마가지 않아 금방 환자들로 꽉 차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병원은 겨우 하야리아 미군부대에서 야전침대 14개 병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환경에 맞추어 아기들이 모기나 쥐에 물리지 않도록 유리 덮개가 있고, 아기들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과학적 아기침상을 직접 제작했다.

매 선교사 두 자매는 자신들 네 손으로는 분만하는 여성들, 치료받아야 할 아기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산부인과 여의사 교육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3년 산부인과 수련의 교육을 시작했다. 의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내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을 손수 실천함으로 수련의들이 감동으로 배우게 했다. 이들은 자연적으로 수료 후 무의촌으로 가서 직접 배운 대로 사랑을 실천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의사교육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산부인과, 소아과 수련의를 합하여 총 4백여 명이 수료했다. 또한 의료진의 손길이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위험에 빠지는 산모와 아기를 생각하여 조산교육을 개원 후 바로 1953년 5월부터 시작해서 2009년 2월까지 총 2,599명이 수료하여 그 당시부터 현재까지 한국 지역사회와 전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매 선교사는 1950년대 피난민 생활로 판자집이나 가정에서 애기를 낳는 산모들을 방문하여 산모와 아기들 이 무사히 출생할 수 있도록 도왔다. 때로는 한 방에서 아버지와 이미 있던 자녀들과 함께 진통을 하는 어머니 곁에 누워 자면서 분만을 도왔다.

1953년 기록에 보면  8일 넘게  진통을 한 산모의 기록이 있다. 그 산모는 하루 걸려 기차를 타고 역에서 병원까지 걸어왔다. 아기는 목숨을 잃었으나 산모의 생명은 건졌다. 어떤 산모는 산파가 아기를 받다가 아기를 꺼낼 수 없게 되자 아기의 작은 팔을 잘라서 그 팔을 남편이 종이조각에 싸서 들고 온 산모를  마취를 깊이 투여하고 자궁 균열 없이 아이를 뒤집어 분만시키기도 했다. 철도역이나 다리 밑에 버려졌던 아이들을 구제했고, 의사가 포기한 산모를 구하고, 산파가 위험에 빠뜨린 산모와 아기를  일신병원에서 모두 살려냈기도 했다.

매 선교사는 네 쌍둥이를 돌본 적도 있다. 1959년 말, 산모가 첫 아이를 집에서 낳다가 그에게 데려왔다. 산모는 폐부종에 종양이 악화되어 있었다. 산모는 도착 한 시간 만에 사망했다. 남편이 아이들을 데려와 그에게 남기고 가자 아이들을 한 달 동안 입원시켰다.

그는 아이들을 3개월을 키워 미국 TEAM이라는 기관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 입양을 주선했다. 또 요로에 누공이 되어 소변이 새어서 냄새로 생활이 어려울 만큼 고통을 겪고 있던 부인들을 몇 시간의 수술을 통해 완치시켰기에 전국에서 그런 환자들이 몰려왔다.

▲ 일신기독병원을 세운 맥켄지 자매. 의사 매혜란, 간호사 매혜영(오른쪽). 2004년 9월 17일 흉상제막식을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1970년대까지 가난한 시절 일신병원은 무료환자가 50%를 넘었다. 1970년대 부산. 경남지역 (철마면, 전관면, 다대포) 무의촌 지역을 선정하여 매주 순회 진료를 하고, 가정마다 찾아다니며 모자건강과 가족계획, 여성 진료에 관심을 쏟았다. 이 무의촌 진료는 거의 100% 무료로 진료하였다.

매 원장은 정년퇴임을 준비하면서 병원 운영이 염려되었다. 자신들이 귀국 후에도 계속 어려운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해주길 부탁하고 싶어서 맥켄지 파운데이션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호주 ABC 방송사와 연합하여 일신부인병원 형편을 모두 영상에 담았다.

그 영상물 ‘New Every Day’를 들고 1974년 안식년동안 호주 전체를 돌면서 기부금을 모았다. 당시 일간지와 방송에 보도되자 큰 액수의 기부금이 모아졌다. 그 돈을 호주 은행에 맡기고 그 이자를 계속하여 일신부인병원으로 보내도록 맥켄지 파운데이션을 조성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매 선교사는 내한 당시 30대 처녀였으며 결혼도 하지않고 오직 일신병원과 한국 모자보건 사업을 위해서 일했다. 한국 사역 24년 동안, 한 번도 치료비가 없어서 돌려보낸 환자가 없다고 고백한 만큼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는 2009년 9월 18일 오후 6시 45분 호주 멜번 소재 카라나 양로원에서 향년 96세로 소천했다. 

 
늦게 인정받은 공적

매혜련 선교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그날, 청와대 보건복지 비서관실과 보건복지부 가족건강과로부터 매 선교사에 대한 공적조서를 급히 작성하여 송고해 달라는 연락이 일신병원으로 왔다. 훈장추서에 대하여 계속 심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가지 절차와 현장 확인 등의 과정을 거쳐 지난 3월 7일  훈장 추서에 대한 국민공개검증 의견쓰기에 51명이 참가했고, 최종 결정인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4월 6일 오후 2시 서울 코엑스에서 거행되는 제40회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될 예정이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전·현직 대통령과 배우자, 외국 대통령에게만 주어지는 무궁화대훈장 다음으로 높은 등급의 훈장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한 선교사의 공적을 선교활동을 넘어 국가공헌으로 평가한 것을 인정한 셈이다.

한국은 쇄국정책 탓에 아시아에서 가장 개신교 선교가 늦은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 아시아 전체의 개신교 신자 가운데 4분의 1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런 성장의 바탕엔 구한말 낯선 한국 땅에 와 젊음과 열정을 바친 선교사들이 있다.

1892년 조선에 살던 미국인 78명 중 44명이 선교사와 가족이었다. 117년 전 한국에 와 ‘전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렸던 유진 벨 선교사 집안의 4대 외손 인요한이 특별귀화자로 선정돼 최근 법무부로부터 한국 국적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한센병 환자들의 은인 포사이트 선교사를 꼽았다.

포사이트가 누군가? 호남 지역 ‘한센병자들의 아버지’로 꼽힌다. 1905년 목포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포사이트는 광주의 동료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그는 누더기 옷에 손발이 상처로 짓무른 여인을 길에서 만났다. 바로 한센병 환자였다. 포사이트는 여인을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광주에 들어갔다. 동료는 숨진 뒤였다. 포사이트는 여인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고 정성껏 보살핀 뒤 목포로 돌아갔다. 서양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구했다는 얘기가 퍼지자 한센병 환자들이 광주로 찾아들었다.

포사이트는 광주에 최초의 한센병원을 세웠다. 그는 괴한에게 귀가 잘리는 봉변을 당하고 풍토병에 걸려 활동이 어렵게 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거기서도 한국 한센병 환자를 돕는 모금·강연을 하다 1918년 소천했다. 환자들은 돈을 모아 광주 한센병원에 포사이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이 병원은 1926년 총독부 퇴거 명령에 따라 여수로 옮겨져 애양원으로 불리게 됐다. 병원이 이사할 때 환자들은 광주에서 여수까지 상여를 메듯 비석을 어깨에 지고 보름 동안 밤길을 걸어 옮겼다

그의 영향을 받은 앞서 말한 서서평 선교사, 그리고 좁은 골목도 다닐 수 있는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여 북한을 26차례나 찾아가 결핵 퇴치운동을 벌이는 인세반, 인요한 형제들이 있다.

한국 땅을 한국사람 못지않게 사랑한 선교사들, 그들은 기꺼이 한국 땅에서 한 알의 밀알로 심겨져 썩어졌다. 씨앗 한 알은 셀 수 있지만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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