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 해의 삶이 찍은 굵은 점 하나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07 [09:38]
▲ 호주인 최초 한국 파송 선교사 데이비스 (Joseph Henry Davies)  ©크리스찬리뷰

 
금년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된지 12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89년 10월 호주장로교회의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목사가 누이 메리 데이비스(Mary Davies)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함으로써 호주장로교회의 첫 한국 선교사가 되었고 한국 선교의 문을 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정확히 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흔히 '호주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1901년 이전까지의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한 표현이 못된다. 왜냐하면 '호주장로교회는 1901년 조직되었고,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회는 이보다 앞서 1839년에 조직된 빅토리아 주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호주연방이 형성되기 전이었고 빅토리아는 독립된 영국 식민지였다. 그러다가 1901년 호주연방정부가 구성된 후 장로교회도 이 영향을 받아 전국적인 조직인 호주장로교회, 곧 'The 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또 1901년 이후에도 사실 한국 선교는 거의 전부가 빅토리아 주 장로교회를 통해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 선교의 길을 함께 떠났던 누이 메리와 함께 파송되기 직전 기념사진을 찍었다.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고 유망한 사립학교의 교장이었던 사람으로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예리한 지성을 겸한 특출한 선교사였으나 그가 한국으로 향할 당시 여권의 직업란에는 '학자(man of letters)'로 기록될 만큼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한국에 온 지 겨우 6개월 후인 1890년 4월 5일, 부활절을 하루 앞둔 토요일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호주교회, 아니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고,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을 계승하려는 의지들이 모여 한국선교운동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그의 희생적인 헌신과 죽음의 결과로 호주의 한국 선교가 유지, 계승, 발전되어 지난 120년간 약 13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옛말에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120주년을 맞으며 그 근원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지난 역사의 뒤안길을 헤쳐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위한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누구를 통하여 시작하셨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의미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첫 호주 선교사였던 조셉 데이비스에 관해서여러가지 점에서 오류가 적지 않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공식 보고서인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Australia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에서 데이비스의 한국명을 대(代) 목사라고 오기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실 그의 한국명은 덕배시(德倍時)였고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영국 영사관 서기관이었던 캠벨(Campbell)씨가 작명해 준 것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한 번쯤 그의 생애를 정리해 두는 일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데이비스가 한국에서 체류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그가 한국에서 무엇을 이루었으며, 어떤 선교적 열매를 남겼느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가 선교사로서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호주교회와 한국선교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피는 일이 더욱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선교 역사란 하나님께서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보여 주는 기록이라고 할 때, 조셉 데이비스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호주의 한국 선교 120주년을 맞으며 한 근원을 살펴보려는 우리들에게 유익한 출발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양 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발급받은 데이비스 선교사의 호주인 최초의
한국여권   © 크리스찬리뷰
 
출생 및 성장 배경

조셉 데이비스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의 왕가라이(Wangarai)에서 9남 3녀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그가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멜본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모는 영국 쉬레스버그(Shrewesburg) 출신으로서 흔히 형제교회라 불리는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속한 매우 경건하고도 열심있는 신앙인이었다.

특히 그의 부모는 플리머스형제단 운동의 초기 지도자였던 다비(J.W. Darby), 뉴톤(B.W. Newton), 뮐러(George Muller) 등의 가르침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의 확산을 위해 이민의 길을 택했던 만큼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은 철저하였다.

이때의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조셉과 여러 형제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의 12남매 중(장남은 어린 나이에 죽었음) 다섯 사람, 곧 조셉 자신과 누나 메리가 한국 선교사로, 동생 타보(Tabor)와 사라(Sarah)가 인도 선교사로 자원한 것이라든지 남동생 존(John)이 장로교회 목사가 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조셉의 동생이었던 존의 기록에 따르면 조셉은 이미 11살 때 신앙의 확고한 고백을 가졌고 그 후 계속하여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살았다고 술회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셉 자신의 표현대로 어릴 적부터 선교사로서의 생애를 결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분으로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Solicitor)로 일했으나 불행하게도 조셉이 겨우 12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또한 병약한 상태였으므로 그는 이때부터 대가족을 이끌어가야 하는 힘겨운 임무가 부과되었다.

그는 이미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법률서기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였고, 이름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젊은 날들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조셉에게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다. 후일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법률 관계 직종이 유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그는 법률 서기직을 그만두고 당시 멜본의 대표적인 남자학교였던 투락 칼리지(Toorak College)의 교사로 일하면서 멜본대학교 문과에 등록하였다.


▲     © 크리스찬리뷰
 
▲ 데이비스는 바울의 선교 원리에 따라 복음이 전혀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떠났었다. 한글로 적힌 일기 부분과 선교 여행지 지도가 인상적이다.     © 크리스찬리뷰

그러던 중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직접적으로 주의 복음을 위해 위해 일할 목적으로 호주 CBS (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이것은 선교사로서의 그의 생애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결단에는 자기 자신의 강한 종교적 신념도 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그의 누이동생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 사라는 아직 10대 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나 1875년 남부 인도의 벨로르(Vellore)에 CMS 선교사로 파송됨으로써 인도에 파송된 호주 역사상 최초의 여선교사가 됐던 것이다.

조셉은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인도에 선교사가 매우 부족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도로 향했다. 이 날을 회상하며 쓴 그의 일기 속에는 '선교사는 그가 택한 사역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법이다. 선교사의 길이야말로 내가 어릴 적부터 꿈꾸어 왔던 희망이며, 나의 청년기의 목표이며,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서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적고 있다.

정확한 자료가 없어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이 때를 전후하여 데이비스의 가족들은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플리머스형제단을 떠나 코필드(Caulfield)에 위치한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 소속인 성마리아 교회(St. Mary)로 이적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복음에 대한 그의 가슴은 뜨거웠으나 선교사로 일할 만큼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 첫째 이유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플리머스형제단에서 받아온 신앙교육이 성공회 소속 선교단체인 CMS의 조직 속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도 또 다른 원인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건강이었다. 건강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지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결국 선교사로서 우선 합당한 자질과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은 채 1878년 5월 21일 멜본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보낸 21개월간의 사역은 앞으로의 그의 생애를 위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준 것이다.


▲ 데이비스가 발급받은 호주인 최초의 한국비자에 德倍時란 한자로 한국명이 적혀있다.     © 크리스찬리뷰
 
대학 교육과 교육 사업

멜본으로 돌아온 조셉 데이비스는 다시 멜본대학에 복학하여 열정적으로 공부하였다. 특히 그는 고전어에 매우 조예가 깊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고 2학년 과정을 마칠 때는 고전어 부분 특별상(Classical Exhibition)을 수상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고전어 외에도 자연과학 분야인 지학, 화학, 식물학, 비교 해부학 그리고 귀납 논리 등을 전공하여 1881년 3월 멜본대학을 졸업할 때는 고전어 부분 최우수상(An Exhibitioner and Honour Man in Classics)과 자연과학부분 특별상(A Scholar in Natural Science)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학적능력을 인정하여 멜본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리퍼(Leeper) 박사가 그를 사강사(tutorship)로 초청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고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는 선교지로 갈 수 있는 적절한 때가 오기까지 교육 사업을 시작하기로 작정하고 1881년 4월 코필드 그래머 스쿨(Caulfield Grammar School, 한국의 중등학교)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이때로부터 1888년까지 그가 교장으로 제직하는 동안 코필드학교는 명문 사립학교로 발전하였고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쟁기를 잡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교육 사업은 선교를 위한 일종의 준비사역이었지 그의 생애 목표는 아니었다.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항상 인도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였고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코필드학교 역사관에 보관된 그의 일기 속에는 이 점이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1884년 코필드 그래머 스쿨의 초대교사들과 데이비스 교장(앞줄 가운데)     © 크리스찬리뷰

한국 선교사로

어느덧 어린 동생들이 장성하여 자립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86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더 이상 가정의 일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는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지난 7년간 키워 온 학교를 성공회 목사였던 바넷(Rev. E. J. Barnett)에게 인계하고 1888년 4월 다시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데이비스 자신은 인도로 가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생각과 달랐던 것 같다. 중국 푸쵸(Foochow, 福丹)에서 선교하던 CMS 소속 선교사였던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가 한국의 부산을 방문한 이후 한국 선교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호소했는데 그의 편지가 성메리교회의 메카트니(H.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발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고 이 호소는 데이비스로 하여금 한국으로 향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어떤 기록에는 울프 주교가 직접 멜본을 방문하였고 성공회의 한국 선교를 위해 호소했다고 적혀 있으나 이 점은 분명치 않다.

어떻든 한국 선교에 대한 울프의 호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 당시 한국에는 1885년 이래로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회가 선교를 시작했으나 아직까지 소수의 선교사만이 사역하고 있었으므로 인도보다 더욱 긴박한 선교지라고 파악되어 그는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며 아직 한국에는 CMS 선교부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이 일은 데이비스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즉,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공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 곧 그토록 오랫동안 인도 선교를 꿈꾸어 오던 그가 한국 선교사로 지원한 과정과 성공회에서 장로교로의 이적에 관한 일차 자료가 없으므로 나는 이 점에 대해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가능한 빨리 선교지로 가려는 그의 열망이 중요한 동기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어떻든 데이비스가 장로교 목사로서 한국으로 행하게 된 배경에는 멜본의 투락장로교회의 젊은 목사였던 이윙(Rev. John F. Ewing)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얼마 전 투락교회로 부름 받은 젊고 유능한 목사였던 그는 후일 빅토리아주의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선교의 이상을 심어준 분으로서 데이비스를 장로교회로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1888년 11월 22일 장로교 총회에 전 일본 선교사였던 딕슨(W.G. Dixon)과 맥라렌(S.G. Mclaren)을 포함하여 17명의 지도자급 총대원들의 서명을 받아 데이비스를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인준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 청원서는 신중히 검토되었고 멜본 남노회는 데이비스가 에딘버러에서 6개월간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하기로 가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에딘버러대학교 내의 뉴칼리지(New College)는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신학교육기관으로 우수한 학교였으며 데이비스는 이곳으로 갔고, 이곳에서 오직 신학공부에 전념하였다. 데이비스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야말로 오직 공부 한 가지 일에만 전념했던 유일한 날들이었고 가장 복된 날들이었다고 했다.


▲ 투락교회 전경     © 크리스찬리뷰
 
이곳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마치고 1889년 5월 13일 멜본으로 돌아왔다. 그가 당시 주일학교 아동들을 위한 잡지였던 「주일학교와 선교」(Sabbath School and Missionary Record)라는 잡지에 쓴 편지를 보면, 에딘버러에 체류하는 동안 마침 휴가 중이었던 한국 선교의 선구자 존 로스(John Ross)를 만났고, 그를 통해 한국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멜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고시에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고, 빅토리아주 장로교단 설립 50주년 기념 총회인 1889년 8월 5일 빅토리아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자 이곳 장로교회의 모체교회라고 할 수 있는 스카츠교회(Scots Church)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때는 그의 은사이자 뉴칼리지의 학장이었던 레이니 박사(Dr. Robert Rainy)가 요한복음 4장 35~36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이 당시로 볼 때 명문 사립학교의 설립자로서 교장직을 버리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선교사로 가는 일은 일종의 이변에 속하는 일이었으므로 당시 멜본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이었던 「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는 데이비스의 목사 안수식을 이례적으로 보도하였던 일은 특기할 일이다.

빅토리아 장로교단의 목사가 된 그는 1년 전 창립된 청년연합회인 YMFU(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의 재정 지원 하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고,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멜본교회 기독교연합회(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 하에 함께 한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선교운동은 빅토리아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를 통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겨우 창립 일 주년 밖에 안된, 26개 교회 청년 300여 명으로 구성된, 청년연합회를 통해서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청년연합회는 1907년 장로교회 해외선교부가 정식 선교사를 파송, 지원할 때까지, 후에 언급될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P.W.M.U.)와 더불어 매우 값진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 총회 회관. 120년 전 데이비스 목사를 한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한 이후 한국 선교에 관한 각종 정책 입안, 행정 업무 등 주요 사건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 크리스찬리뷰
 
지금은 한국이 잘 알려져 있지만 지금부터 120년 전 한국은 극동의 고집스런 나라였고 외국과의 모든 활동이 단절된, 그리피스(Griffis)의 표현대로 은둔국이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래 쇄국정책이 파기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오랜 전통의 굴레 속에서 반외세적 성향을 지니고 있고 특히 선교의 자유가 공적으로 인정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 선교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현실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데이비스를 선교사로 인준하였지만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한국 선교부를 설치할 계획은 없었던 것이다. 이미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일이지만 영국인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호주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영국의 영향 하에 있었고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 주로 스코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한 그곳 장로교회 후예들로부터 전수되었으므로 호주의 장로교회는 영국의 장로교회의 모습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빅토리아주의 경우 영국의 장로교회의 전통과 교회 조직을 계승한 여러 독립적인 교회들이 1839년 연합을 함으로써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를 형성하였고 그 이듬해 총회 내에 해외 선교부를 조직함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이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선교 운동은 호주 원주민 선교와 지금은 '자유의 나라'라는 뜻의 바누아트(Vanuatu)라고 불리는 폴리네시아의 한 나라인 뉴 헤브리데스(New Hebrides) 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 선교부를 설치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호주교회의 한국 선교운동은 데이비스 개인의 선구자적 결단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울프 주교의 호소, 메카트니 목사, 이윙 목사 등의 후원과 격려, 그리고 청년연합회의 희생적인 지원 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 데이비스 목사 파송식을 가졌던 스카츠교회. 멜본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교회는 1888년에 세워졌으며, 많은 파송예배가 드려졌다.     © 크리스찬리뷰

한국에서 보낸 6개월

한국 선교사로 정식 부름받은 데이비스는 더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1888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본 시내 YMCA 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멜본에서의 모든 공식일정을 마치고 8월 21일 데이비스 남매는 멜본을 떠났다. 이것은 한국으로 향한 첫 여행이자 그의 생애에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드니에서 며칠을 보낸 후 다시 8월 28일 증기선 '치난'(S.S. Tsinan)호로 시드니를 떠났고 이로부터 40여 일간에 걸친 길고도 지리한 항해를 끝내고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항해 도중 데이비스 남매는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당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벙커(D.A. Buncker)씨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벙커 씨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4일 오전 11시에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다.

이때 마중나온 감리교 선교사였던 존스(Jones)를 만났고 곧 이어 헐버트(H.B. Herbert) 등을 만나 이국 땅에서도 결코 외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8시경 말을 타고 서울로 향했고, 도착한 첫날 의사 헤론(Dr. J.W. Heron), 스크랜튼 부인(Mrs. Scranton), 그리고 데이비스보다 5주 앞서 입국한 맥길 의사(Dr. Mcgill) 등의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어서 평안한 마음으로 서울에서 첫 밤을 지낼 수 있었다.       

이때로부터 서울에서 보낸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언어의 습득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가장 긴박한 요구였다. 12월 26일자로 쓴 그의 편지를 보면 조선말(Chosen Mal) 공부에 바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원래 언어에 재질이 있었으므로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5개월이 지난 때에는 일상의 대화는 물론 가벼운 설교까지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데이비스와 접촉했던 동료 선교사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그는 복음 증거에 대한 열정이 강했으므로 언어의 습득 또한 그만큼 빨랐었다고 쓰고 있다.

▲ 데이비스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글과 한문을 공부하던 공책 데이비스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글과 한문을 공부하던 공책     © 크리스찬리뷰
 
이 기간 동안 데이비스는 북장로교 선교사와 함께 지내며 사역하였는데 특히 언더우드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언더우드는 데이비스를 그가 만난 선교사 중에 가장 우수한 선교사였다고 평했을 만큼 데이비스의 인품과 실력과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특히 뜨거운 가슴과 함께 예리한 지성을 겸한 그에게서 언더우드는 동지적 의식을 느끼며 자신과 함께 서울에서 일해 주기를 여러 번 간청하기도 했다. 데이비스는 고전어에 상당한 실력이 있었으므로 아펜젤러 등과 함께 성경번역하는 일에 전념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당장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후일의 선교 사역을 위해 준비하는 인내를 겸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서울에 도착한 그 다음날부터 거리로 나가 전도하려고 했을 만큼 성격이 급하고 고집스런 면이 없지 않았다. 이윙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러면서도 그는 학문과 지성을 겸비하고 있었으므로 결코 완고하거나 자의식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강한 신념으로 복음을 위해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스와 언더우드는 유사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 데이비스가 죽은 지 20년 만인 1910년에 호주에서 제수(J. Davies, 왼쪽)와 조카(마가렛 데이비스)가 그가 잠들고 있는 부산을 찾아왔다. 마가렛은 그때부터 1940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 크리스찬리뷰
 
언더우드의 부인이 쓴 '한국의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에 보면 데이비스는 언더우드와 동일한 복음에 대한 열심과 동일한 정력과 동일한 성경 언어에 대한 은사를 지녔다고 기록했고, 두 사람은 똑같이 기도의 능력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 방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고 회상하였다.

데이비스는 서울에서 지낸 5개월 동안 동료 선교사는 물론 서상륜 등 한국인 매서인 전도자와 함께 과천, 수원, 용인 등 서울을 중심한 인접 지역을 답사하고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강구하였다.

데이비스는 그가 입국한 이후 서울 지역에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선교부 외에 또다른 선교사들이 입국할 전망이었으므로 바울의 선교원리를 따라 일단 선교사가 전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한때 군산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선교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기도 했다. 만일 그가 군산으로 갔었다면 호주교회의 한국 선교사, 아니 한국 교회사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교지역을 결정하기 전에 답사여행을 하기로 하고 일단 부산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은 부산이 한국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대펴족인 항구도시이며 일본과 인접해 있어 보다 더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도착한 그 다음해인 1890년 3월 14일,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났다.


▲ 초량마을(부산 영주동) 뒷산에 있던 데이비스 무덤(1895년 촬영)인데 재개발로 인해 이들의 흔적은 영영 찾을 수가 없다.     © 크리스찬리뷰
 
이제는 겨울도 거의 지났다고 보았던 그의 판단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3월이라고 하지만 추위는 계속되었고 그해따라 잦은 비가 겹쳐 먼길을 도보로 여행하는 일은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에 이르는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 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의 매서 전도 활동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고 복음에 대해 매우 수용적인 현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어서 적지 않은 격려를 받았으나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 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사실 데이비스가 택했던 부산까지 이르는 이 도보 여행길은 그 당시 서구인으로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무리한 여정이었던 것이다. 유독 추웠던 3월의 기후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은 허약한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으나 복음을 위해 감내해야 할 몫으로 보았기에 1889년 8월 21일 멜본을 떠나 시드니, 홍콩, 일본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긴 여정과, 서울 도착, 언어 공부, 선교 지역 답사, 부산까지 이르는 긴 여정, 그리고 그가 죽기 불과 5일 전인 1890년 3월 31일까지 기록된 8개월간의 일기 속에는 어떤 형태의 불평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리어 전도자의 벅찬 감격이 그의 행로를 따라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이날도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당시 부산에 있던 유일한 서구인이었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Dr. J. S. Gale)은 데이비스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가 자기 집으로 옮겼다. 데이비스는 곧 회복될 것이라고 도리어 게일을 위로하였으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 데이비스 선교사가 죽자 청년연합회가 그를 기리어 장로교 총회 바깥 벽에 설치한 기념명판     © 크리스찬리뷰
 
게일과 데이비스 이 두 사람은 함께 기도했다.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라고. 

일본인 의사가 와서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데이비스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데이비스가 코필드학교를 설립했을 때 정했던 교훈이자 자신의 생의 신념이었던 말 '열심히 일하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Labora ut Requiescas : Work so that you mau rest)처럼 그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 봉사의 날들을 끝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가 한국에 온 지 6개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꼭 183일째였다. 우리 인간적인 시작으로 볼 때는 너무도 짧은 생애였으나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가장 적절한 때였던 것이다. 멜본을 떠나기 전 청년연합회가 주관한 환송회에서 복음의 진보를 위해 생명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답사하였던 데이비스의 고백은 진실이었다.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 보이는 부산진 뒷산에 안장하였던 바 그의 장지는 후일 호주장로교의 한국 선교부를 위한 약속의 땅이 된 셈이다.

그의 죽음이 남긴 것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이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본으로 돌아옴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른 시작을 위한 값진 초석이 됐을 뿐이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호주의 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를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였다. 첫째로는 그처럼 유능한 실력있는 청년 선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그의 희생을 기초로 한국 선교 운동을 계승해야 한다는 자각을 심어 주었다. 5월 5일 멜본 시내 스카츠교회에서 거행된 데이비스의 생애를 감사하는 기념예배에서는 데이비스의 자기 희생적인 모범이 강조되었고 한국 선교를 중단될 수 없는 사명임을 확인하였던 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운동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둘째로는 친목과 교제를 위해 시작된 청년연합회로 하여금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Missionary sending organization)로 확고한 기틀을 세워 주었다. 당시 이 연합회의 회장이었던 질레스피(Gillespie)는 데이비스의 선교 자취를 따라 가자고 호소하였고, 1890년 7월 23일 소집된 집행위원회에서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 지원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891년에는 존 맥케이(Rev. J.H. Mackay) 목사 부부를, 1894년에는 앤드류 아담슨 목사(Rev. A. Adamson) 부부를, 1902년에는 커렐 의사(Dr. H. Currell) 등을 파송하면서 한국 선교사를 파송, 지원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셋째로는 한국 선교를 위한 또다른 조직으로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P.W.M.U.)의 조직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한국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메리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말하고 이때야말로 선교를 시작할 적기임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는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50파운드를 기증하였다.

또 이 당시 데이비스의 동생 사라〈이때는 선교지에서 본국으로 돌아와 케언즈(Cairns) 목사와 결혼하여 발라렛(Ballarat)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음〉는 발라렛에, 그리고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인 데이비스 부인은 질롱(Geelong)에서 하퍼 부인(Mrs. Harper)은 멜본시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선교운동의 조직화를 위한 개별적인 조직을 구성했던 바이다.

이 일련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서 1890년 8월 25일 정식으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데이비스의 형제들 가운데서 이 운동이 발의된 점이다. 이 장로교 여전도연합회는 처음부터 선교운동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고, 여성들에 의해서 여성들을 선교하는 단체(Mission work among women by women)임을 분명히 했다.


▲ 데이비스 목사의 제수와 조카 일행이 부산을 찾아왔을 당시 한국에 파송되어 있던 호주 선교사들이 항구에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 크리스찬리뷰
 
그리하여 이 P.W.M.U.는 1891년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인 멘지스 양(Miss B. Menzies), 페리 양(Miss J. Perry) 그리고 퍼셋 양(Miss Fawcett)을 시작으로 하여 약 40여 명의 여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는 등 한국 선교운동에 크나큰 공헌을 남겼다.

이렇게 하여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데이비스의 파송보다 50년이나 앞서 뉴 헤브리데스(New Hebrides)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1900년대를 경과하면서부터는 한국은 뉴 헤브리데스를 제치고 호주 장로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지역이 되었고 이때로부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선교부가 철수할 때까지 약 7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중에는 데이비스의 두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 양(Miss Margaret Davies, 한국명 대마가례, 1910~ 1940년까지 사역)과 진 데이비스(Dr. Jean Davies, 한국명 대지안, 1918~1941년까지 사역)도 약 30여년 간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점은 기억할 만하다.

마치 캐나다의 독립 선교사였던 맥켄지의 죽음으로 캐나다 장로교회(두에 캐나다 연합교회)가 한국 선교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장로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문을 열게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스의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았고 그에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하였다."☺ 


글/이상규(고신대학 교수)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참조-
http://www.christianreview.com.au/sub_read.html?uid=1507&section=sc1&section2=
 
http://www.christianreview.com.au/sub_read.html?uid=1557&section=sc1&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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