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앗을 심은 호주 선교사들-변조은 목사

호주 선교부 철저하게 신사참배 반대

글|김석원,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5/02 [12:10]
▲ 변조은 목사와의 인터뷰는 지난 3월 15일 캔버라 시티 유나이팅 쳐치에서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본지는 현재 생존하는 호주 선교사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그들의 한국 사역을 소개하고, 한국과 호주를 이어주는 영적 유산을 호주 한인 독자들에게 전해 왔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한국사역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기억을 정리하여 이후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유산을 검토할 필요도 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번 호부터 이들 선교사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한국사역의 배경, 내용, 그리고 유산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인터뷰 시리즈를 기획했다. 인터뷰 내용은 지면관계로 편집을 거쳤지만, 내용은 육성으로 녹음된 내용에 충실했다. 바라기는 이 시리즈를 통해, 호주장로교의 한국선교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역사적 계승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첫 번째 인터뷰 대상으로 변조은 목사(Rev.Dr. John P. Brown, 1960-1972 사역)와 함께 했다.(편집자주)

 
▲ 거제도 농촌 사람들에게 돼지와 젖양을 분양해 주기 위해 젖양을 배에 싣고 있는 변조은 목사.          이 사진은 멜본에서 발행되는 The Age에 보도됐다. ⓒThe Age    


- 성장배경과 신앙은..?

“부모님은 스코트랜드 가난한 하이랜드 지방출신으로 이민 와서 사우드 오스트랠리아에서 정착했다. 한 열 명쯤 다니던 지역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하고, 다행히도 장학금을 받고 헤밀톤 하이스쿨을 4년 공부하고 졸업했다. 누나가 그곳 우체국에 취직해서 자신의 작은 보수를 갈라서 하숙비를 내주는 바람에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굉장히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헤밀톤 학교내 크리스찬 클럽이 있어서 서기로 열심히 일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교회를 다녔고 15살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로도 일했다.”

- 어렵게 들어간 멜본대에서 중동어를 전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로선 드문 일 같은데? 또 이후 신학교로 간 이유는?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했는데, 학생이 나와 다른 아랍계 학생 둘밖에 없어서 거의 오후마다 교수실에 가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언어를 좋아해서 시작했다. 당시 신학교육은 사역후보생으로 일반학부에 위탁되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멜본대학에서의 공부는 오몬드신학교의 위탁학생격이었다. 원래 나는 의대 지망생이었는데, 12학년 때 아버지가 몹시 아파서 농장 경영을 해야 해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졸업하고 대학교를 갈 수 있었다.”

- 아내 노마 목사를 만난 곳이 멜본대학교의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어떤 기록에는 노마 목사가 먼저 한국선교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선교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노마와는 입학하는 그날, 기독교학생회 모임이 있어서 그곳에 갔다 만났다. 모임은 EU의 총무역할을 했다. 이후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EU입장에서 탈피(outgrown) 하게 되었다. 아내가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고... 1952년 대학 입학 때, 당시 한국전쟁으로 한국전 피난민 사진과 기사가 많이 멜본 언론에 나왔다. 매혜란, 매혜영 선교사의 일신병원사역을 세우는 과정이 장로교신문을 통해서 거의 매주 접할 수 있었다. 멜본대학을 다니는 동안 1953 ~4년에 처음으로 한국선교사역 지원했다. 아마 내가 1호로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그후 선교사로 바로 나가지 않고, 일반 목회를 하셨는데, 어떤 일을 하였고, 결국 한국선교사로 가게 된 과정은..?

“멜본대와 오먼드신학교(당시 빅토리아주장로교신학대학)를 졸업 후, 빅토리아주 서부 깁슬랜드지역, 번스데일교회 부목사에서 일하면서, 두 노회에서 기독교 교육을 담당했다. 주로 청년들을 담당했고 아동과 교사도 교육했다. 그러다 한국선교를 지원한지 6~7년이나 지난 상황에서, 갑자기 선교부에서 어떻게 할 지를 묻는 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바로 그날이 번스데일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는 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한국선교사로 결정하고 나갔다. 선교훈련은 지금은 사라진 올세인트 바이블칼리지에서 받았는데, 하버필드에서 세교단(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이 1958~9년쯤 세워 성공적으로 운영한 학교였다. 우리는 급했기 때문에 6주만 공부를 했고, 나는 일 년을 교육받고 바로 나갔다.”

▲ 변조은 목사는 은퇴 후 호주 원주민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존 하워드 총리와 논쟁을 벌일 정도로 원주민 인권보호에 앞장섰다.     © 크리스찬리뷰

 
- 빅토리아주 장로교회가 해방 후에는 한국선교사로 나간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변 목사께서 지원할 때 알고 있던 한국선교 상황은?

“원래 호주선교부는 1920년대부터 세계대전으로 여러 가지 상황이 어려웠다. 일차세계대전으로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나가서 호주 전체가 경제난이 왔고, 선교부도 인력이나 선교사 보낼 돈도 항상 부족했다고 회의록에 나온다. 그때 선교사가 30명 정도였고, 재한선교사들의 형제 자매 중에서만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12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해방되었을 때 선교사들이 당장 들어갔어야 했는데, 1945년부터 50년까지는 6명밖에 나가지 못했다. 남자 셋 (나예인, 안대손, 권임함)과 여자 셋이 전부였다. 그때 경남부산노회에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그때 선교사를 보내지 못해, 당시 미국계 보수적인 장로교 단체들이 그 공백을 채웠다.

이들은 자유신학와 근본주의의 싸움 중에서 자라나 근본주의신학을 가지고 전도와 사역을 했고, 이전 호주에서 보낸 장로교 선교사들이 가졌던 주류 신학과는 많이 달랐다.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 신학출신은 거의 없었다. 해방 전 선교사들은 너무 나이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이라도 빨리 들어갔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 당시 빅토리아주 장로교 선교부 총무는 해방전 한국선교사로 일했던 서덕기 목사였다. 그의 한국선교 경험이 한국선교 재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당시 빅토리아주 장로교 선교부 총무 서덕기 목사는 해방 후 1년 반 정도 한국에서 일했다. 그는 한국 선교에 대한 동원에 관심이 많았지만, 부인이 한국가기를 꺼려서 한국에 가지 못한 분이었다. 그때 많은 사람이 한국으로 나갔는데, 예를 들어 1953년 캐년, 1955년 시드니에서 조은배, 1957년 서두화, 헤이즐딘, 구의두 등이 나갔다. 그때 같이 나간 여자 선교사들도 좋은 분이 많았다. 1946~56년까지 일을 많이 한 전은혜 선생이 있었다.

1960년에는 나를 비롯해 이태선, 원성희, 안덕희 등 총 12명이 나갔다. 당시에는 한국뿐 아니라 뉴헤이브리즈에도 많이 선교사가 나갔다. 그때는 경제도 좋아지고 선교에 대한 관심도 커졌기 때문이다.”

- 1960년 한국 도착 후 2년간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했는데....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국 실력의 비결이 따로 있었는지? 당시 파악한 한국 상황은?

“언어의 재능이 좀 있었고, 한국 어학당에서도 잘 가르쳐 주었다. 호주 선교부 정책도 언어 교육을 강조해서 오전 4시간 개인교수를 두고, 오후 4시간 학교를 다녔다. 개인교습은 아내와 내가 두 선생에게 두 시간씩 바꿔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모두 우리처럼 공부했지만, 호주 사람들은 잘하는 편이었다. 잘 배우고 기회가 좋았던 것 같다.

언어과정 중에는 한국 상황을 특별히 따로 살필 겨를이 없었다. 도착해서 바로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 종로 5가의 미국 선교사 자택에서 있었고, 요리할 필요도 없이 하숙비 내고 부부가 6개월간 공부만 하면 됐다. 주말이면 시장에 가서 연습을 했고, 주일에는 옆집의 곽안전(앨런 클럭) 선교사가 당회장이었던 교회에 다니면서 한국어 연습을 많이 했다.

이후 신촌에서 혼자서 학생들과 함께 하숙했는데, 아내가 첫아기 때문에 마산에 먼저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아내의 언어교사가 지태영 목사(전 제일교회목사)의 부인 이명자 선생이었는데 같이 살면서 도와주었다.”

▲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창립 35주년 기념예배에서 설교하는 변조은 목사. 변 목사는 동교회를 설립했으며, 초대목사로 시무했다.     © 크리스찬리뷰

- 1945년 빅토리아주 총회에서 신사참배로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특별기도시간이 있었다고 나오고, 일제말에도 신사참배에 가장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이 호주장로교회였는데, 해방 후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철저한 회개보다는 덮고 가자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에 따른 분열(고신)도 있었는데, 호주선교사로서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1942년까지 호주선교부는 철저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때문에 수감된 호주 선교사도 있었다. 그런데 1950년쯤 한국에 있었던 호주 선교사 앤더슨과 커닝햄, 레인 목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아직 교회가 갈라지기 전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갈라진 상태였고, (고신파)이들이 너무 자기만 옳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이 많았다.

당시 더 복잡하게 된 것은 미국계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와서 이런 상황을 부추겼다. 이들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 실제로 호주 선교사들은 곤란한 입장이었다. 당시 우리 친구들은 주로 고신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들이 고신에 많이 갔기 때문이다.

당시 재한 호주 선교사들은 이들이 너무 교만하게 한다고 지적하면서도, 마음은 많이 아팠다. 당시 개개 지도자들의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교인들이 계속 모일 수 있도록 끝까지 교회를 문닫게 하지 않으려고 양보/타협한 분, 고생을 많이 목사들도 있었다. 문제는 흑백으로 나눌 문제가 아니었다.”

- 1959년 중앙선교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미국북장로회를 중심으로 선교에 대한 모든 결정을 한국교회가 하도록 결정했지만, 교단분열로 집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교단분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던 간에 이후 모든 지원이 주로 통합측으로 쏠렸는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는지?

“내가 한국에 도착한 1960년에는 이미 합동은 나눠졌다. (그 배경으로) 호주장로교단은 원래 세계교회협의회 회원이었는데, 미국에서 맥킨타이어의 주도로 보수기독교단체들이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으로 몰 때 거기에 휩쓸린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WCC에서 7년간 중앙위원으로 일했지만 공산당은 결코 아닌 주류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들이었고, 반대측의 공격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왔을 때는 다른 선택권은 없었고,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교회는 통합측밖에 없었다. 바로 통합측 마산노회의 노회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마산 제2문창교회 같은 고신교회들과는 강단교류도 하고 친하게 지냈다. 특히 지방에 다니면 당시에는 합동교회는 별로 없었고, 고신교회들과는 별다른 갈등없이 잘 지냈다.

당시 한국 내 호주선교부 대표는 따로 없었다. 매혜영, 매혜영 자매와 맥비나 등이 한국에서 태어났고 이미 자리했던 스튜어트, 헤이즐딘 목사가 어른 역할을 했지만 한국교회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당시 온 선교사들을) 잘 지도해 줄 분이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 당시 한국선교는 주로 빅토리아주에서 하던 것이 연방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를 통해 한국선교의 후원배경이나 선교사 출신지가 넓혀졌는지? 변 목사의 스폰서는?

“1946년에 연방선교부로 이관됐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주로 지원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에 나왔다. 내 지원은 선교부 자체가 책임졌다. 그러나 실은 내 봉급을 10년간 멜본이 아니라 시드니 시내 맥콰리 스트리트의 세인트 스테판교회가 혼자 지원했다.

특별한 경우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한국교회처럼은 아니고 선교부를 거쳐서 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매달 선교편지를 보냈다. 그 교회는 1958년부터 빅토리아주 선교 총무를 사임하고 연방 선교 총무로 이임한 서덕기 목사에게 안수를 받은 목사가 사역하던 곳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지원교회들이 빅토리아주 밖에서도 있었는데 내가 간 그해도 이미 퀸슬랜드에서 나간 분이 한 분 있었고, 내 이후에도 3명이 있었는데, 이중 안덕희 목사는 퀸슬랜드 출신이지만 멜본 롤랜드여성신학교에서 교육받았다. 뉴사우스웨일즈주 출신은 구의두 목사가 있었다. 당시 뉴사우스웨일즈주는 내부적으로 신학적 갈등 때문에 보수-진보로 내부적으로 나눠져 있었고, 이에 반해 멜본은 주류중심으로 그런 분리가 없어서 (선교참여가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계속>

 
▲ 캔버라 시티 유나이팅 쳐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후 기념촬영한 변조은 목사          © 크리스찬리뷰


김석원|크리스찬리뷰 객원기자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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