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으로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5/30 [11:18]
▲ 변조은 목사는 마산과 서울에서 12년 동안(1960-1972) 한국 선교사로 일했다.     © 크리스찬리뷰
- 서울에서 언어훈련을 마치고 1962년 통합측 마산노회소속으로 거제도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당시 농촌교회의 사역과 재정상태는? 거제도는 김영삼 전 대통령 아버지가 장로로 섬겼던 교회가 있었던 곳인데 관련은 없었는가?

“당시 농촌교회는 너무 약했다. 거제도 전체에 2명의 목사밖에 없었고 전도사나 장로들이 설교를 해야 해서, 나는 이들 교회의 (순회)당회장 역할과 매월 평신도 설교자들을 모아 하루 동안 준비시켜 주었다.

김영삼 전대통령 아버님이 장로로 섬기던 교회는 장승포교회로 기억하는데, 그곳은 기장 소속이어서 나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구제품이 나오면 교단에 상관없이 나누어 주었고, 그 교회를 직접 방문한 적도 있었다.”

- 마산노회에서는 이외에 다른 어떤 역할을 했나? 노마 사모도 전쟁 미망인을 돕는 사역을 하셨다는데..? 당시 경제적으로나 교단 분립 등으로 어려웠던 당시 농촌 사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건은?

“그 외에는 성경학교(이후 부산장신대로 발전)에서 가르쳤다. 농가에서 자란 배경 때문에 농촌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돼지나 염소를 나눠주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려운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과부들이 만든 물건을 호주로 보내어 5~6년 동안 팔았다. 당시 서울에서 다니면서 천을 가져다가 수를 놓은 수건등을 만들도록 했다.

▲ 한국 전통 풍경을 십자수를 놓아 호주에 판매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 크리스찬리뷰

한 번은 시드니에서 부산에서 왔다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1963년 소랑교회에서 나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더라. 당시 나는 거제읍에서 15리쯤 떨어진 소랑교회에서 일하기 위해서 온 가족들과 함께 사랑방 하나를 빌려 전도와 교육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50년 만에 다시 만났던 것이다.”

- 서구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에 오는 것만도 큰 희생이지만, 선교현지에서 서구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앞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변 목사님은 서울도 아니고 더 낙후된 도서지방의 지역민과 같이 생활하신 것 같은데, 그때부터 사회의식이 강했나?

“다른 선교사도 많이 그랬던 것 같은데... 선교하려면 현지인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 그리고 거제도 사람들도 (내가 가면) 조그만 생선이나 계란이라도 대접해주었다. 김치는 너무 짜서(짜지만 늘 먹었다)잘 못 먹었기 때문에... 어쨌든 농부 가족들에게 (분양해 준) 돼지가 잘 크느냐 물으면, 이미 처분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빚이 너무 버거워서 그랬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화가 많이 났다. 고리 때문에 고생하는 농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농민들은 고리 때문에 빈곤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그들 덕
분에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당시 사역에 대한 이전 기록을 보면, 1966년 농민들에게 가축을 분양하기 위해 호주에서 직접 가축과 함께 배를 타고 한국까지 수송을 하는 열성을 보였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적은 내용이 있다. 무슨 일인가?

▲ : 변조은 목사는 호주에서 염소와 돼지(호주대백종)를 가져와 번식시켜 농촌교회에 분배하였다.(1966년) 권오성 선생과 변 목사 딸 선혜(Alison)양   ⓒJohn Brown    
“아니다. 당시 젖을 짜는 양을 나눠주는 일은 잘 안됐지만, 돼지는 잘됐다. 재래종과 교배해서 잘 자라는 돼지가 생겼다.”

- 마산노회 때 영향을 준 동료선교사는 있는가?

“크로프트 목사(Rev. James A. Croft, 한국명 구의두)가 2년 전쯤 먼저 와 있었지만 5년을 마치고 호주에 돌아 왔기 때문에 별로 큰 영향은 못 끼쳤다. 별로 큰 도움이 될 입장은 아니었고 다른 외국 선교사는 없었다. 그러나 마산에는 결핵과 아동병원이 있었는데 영국분들이었다.”

- 1964년 광나루 장로교신학대학교에서 히브리어, 구약교수생활를 시작했다. 기록에는 처음으로 호주장로교에 신학교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교단은 기독교장로회(나에게는 이런 초청은 전혀 없었고 나의 선배인 권임함 목사가 1940년대에 이런 초청을 받았다)로 나오는데 장신쪽으로 간 까닭은?

당시 필드선교사가 매우 적어 이런 결정은 쉽지 않았을텐데 호주장로교 교단선교정책에 변화가 있었나?

“전쟁 전 커닝햄 선교사(Rev. Frank W. Cunningham, 한국명 권임함)를 통해 호주 선교
부로 한신(조선신학교)의 공식초청이 있었지만 논의만 하고 그것으로 끝났다. 마산 노회에서는 당시 일 년에 두어 번씩 찾아가 예식을 거행해주는 당회장 역할이 큰 도움이 되는지 논란이 있었다. 나는 한인 목사님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물론 교
수직을 하면서도 임시 당회장 역할을 계속 하긴 했지만...

당시 호주장로교 선교부정책이 변화가 있어서 내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신 교수직을 하면서 총회일을 많이 했다. 3개 선교부의 모든 사업을 총회 아래 두며 이뤄졌던 협동사업부 한완석 총무, 내가 영어 담당으로 같이 일을 많이 했다(1969~1972년).
- 중간에 안식년으로 공부를 다시한 것으로 아는데, 어떤 것을 공부했나?

“1965년 멜본대에서 안식년 동안 로버트 앤더스 교수에게 구약신학을 공부했다. 학생
이 둘밖에 없어서 거의 개인교수를 받았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한국에 가서 교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공부한 분야는 신ㆍ구약 중간사, 이사야 40~55장, 포로시대 역사 등이다. 돌아와서 68년부터 전임으로 강의를 했다.”
 
▲ 거제읍 소랑리에서 강습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변조은 목사가 딸 선혜(Alison)양을 안고 있으며 오른쪽 옆에 노미연(Norma) 사모와 아들 선태(Michael)군, 그리고 오른쪽 끝이 이명자 선생.(이명자 선생은 후일 지태영 목사의 사모가 되었다.)     ⓒJohn Brown    

도시산업 선교회
 
- 당시 호주장로교의 선교에 대해 도시산업를 많이들 떠올린다. 그러나 원래 도시산업선교는 1957년 루브랙 선교사가 총회 내 산업전도위원회를 만들고, 화이트 선교사가 연대안에 도시산업선교에 대한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출발됐다. 변 목사님은 언제부터 관련되었나?

“마산에서 있을 때, 공장을 경영하는 장로님이 직원들에게 설교를 부탁해서 관계를 했을 뿐이지, 도시산업선교는 서울에 와서 학생들을 통해 배웠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우튼 목사(Rev. Richard F. Wootton, 한국명 우택인)가 영등포의 조지성 목사와 3년간 일하기 시작했고 나에게도 소개해 주었다.

▲ 거제도 녹산교회 주일학교 아동들     ⓒJohn Brown    

1968년부터는 가르치던 학생 중에 인명진, 김진홍, 홍길복 목사처럼 산업선교와 도시선교로 이미 사역하는 분들이 있었다. 당시 내가 가르치던 예언서를 보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의 입에서 교회예식보다는 사회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가르치는 내용을 이미 현장에서 실천하던 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김진홍 목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아 알아보면 경찰서에 있다고 해서, (교수로서) 나 역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교실에서 현실적인 사회정의를 다룰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학생들에게서 많이 배운 셈이다.”

-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 주류는 사회정의에 대해 무관심했는데, 이 문제를 강조하던 교수로서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별로 없었고, 학교나 총회가 나를 잘 봐주었다. 보수적인 김석찬 목사의 문창교회에서는 성경해석문제를 제기한 적은 있지만 그 외는 갈등이 별로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인명진 목사를 많이 도와준 교회가 바로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였다. 무관심한 것 같아도, 그런 어른들이 있어서 힘을 얻었다. 그 외에도 몇몇 교회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도시산업선교 때문에 호주까지 보호해 주신 분이 있는가? 당시 비자 등 받기도 힘들었을 텐데...

“인명진 목사가 가족과 함께 두 번에 와서 일 년이나 쉰 적이 있었고, 그밖에도 몇 분이 그랬고 홍길복 목사도 원래 그 때문에 호주에 왔다. 김진홍 목사는 남양주에 있을 때 한 번 왔다 갔다. 교단에서 많이 도와주었고, 호주정부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 정부는 정말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정부였다. 요즘에는 자유당이 자유당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당시 말콤 프레이저 수상이 많이 도와주었다.”
 
▲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스탭들(1976년). 왼쪽 조치송 목사, 나병도 선교사(Stephen Lavender) 오른쪽은 인명진 목사. ⓒJohn Brown    

한국교회의 성장

- 재한 주요선교부의 통합체였던 협동사업부의 영문서기로서 활동하셨는데, 당시 한국교회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지만, 1952년 천만인전도운동,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 1973~4년 익스플로어 집회(빌 브라이트), 1984년 개신교선교 백주년 행사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외적성장 드라이브로 몰아가며 사회정의의식이 많이 약화됐다는 평가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교회와 관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그래도 학교와 총회에서 잘 배려해 주어서 별 문제는 없었다. 총회 총무였던 김윤식 목사나 한완석 목사는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나와는 친했다. 나는 한국교회 성장주의에는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문제는 성경중심으로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언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는데 환영은 안해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성경과 구약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사회정의문제, 이웃을 돌봐주는 책임,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을 돌봐주시는 분이란 것을 당연히 말할 수 있었다. 이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이니까....”

- 호주장로교 에큐메니컬운동이 활발해졌을 때, 한신을 제외한 다른 장로교 총회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에큐메니컬운동에 반대하던 합동측과의 결별 뒤 통합 역시 60년대 말이나 복귀가 재개된다. 61년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세워진 연세대 연합신학원쪽으로 가지 않고, 통합쪽 교단학교에서 같이 일하게 된 이유는?


▲ 회갑기념으로 출간한 민족을 초월한 복음(보이스사) 출판기념회에서 인사하는 변조은 목사(1993. 12)     © 크리스찬리뷰
“이미 한신이 나갈 때 통합과 나갈 것을 결정을 해서, (호주장로교선교회 한국 사역 안에서는)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교제하는 분들 중에는 한신측도 있었다. 당시 구약을 가르쳤던 문익환 목사도 그랬는데,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강조했고 내가 많이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한신에 가서 강의를 한 적은 없고, 1960년대 교회가 갈라졌을 때, 통합측도 상처가 있었다. 실제로 통합 안에서도 미국선교사를 제외하고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주류였는데, 우리와 가까웠고... 이를 가지고 의심하거나 시비한 일은 없었다.”
- 1967년 미국장로교 신앙고백이 한국장로교에 소개되었을 때, 특히 성경무오론 등을 부정한 태도에 대해 반발이 컸고, 이를 통해 한국기독교의 보수적 성격이 잘 드러났고, 이후 이런 경향은 더 심해졌는데, 교수로서 이에 대한 반응은?

“사회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알기에 아무리 성경을 보수적으로 해석해도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성경무오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경무오설은 미국에서 나온 현상으로, 그것을 신조로 믿는 것보다 실제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무오론은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정의를 가르치는 것 외에는 다 싸이드트랙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경무오론 논쟁은 곁가지 문제에 불과하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복음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 당시는 이런 문제로 크게 싸우던 상황이었는데, 직접 문제가 된 적은 없었나?

“그 문제를 관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당시 Keith R. Crim(한국명 김기수) 남장로교 선교사가 총회에서 큰 문제(1966년 요나서의 내용이 역사보다는 비유라고 주장하면서 벌어진 논란)가 되었다. 나도 같은 의견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힘든 적이 있었다. 크림 선교사는 유능한 구약학자였는데 한국에서 쫓겨나갔다. 당시에 나는 호주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연관되지는 않았다.〠 <계속>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객원기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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