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1

글/노블 맥켄지,번역/지응엽-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5/30 [14:07]
▲ 제임스 노블 맥켄지(한국명 매견시) 선교사 가족사진. 장녀 헬렌, 둘째 캐더린, 셋째 루시, 매견시, 넷째 실라, 그리고 어머니 메리 맥켄지 선교사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931년 부산) ⓒLucy Lane    
글/제임스 노블 맥켄지
번역/ 지응엽

지난 4월 호주 맥켄지 한센 선교회가 최승일 목사(상도교회)가 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공식 출범했다.

부산에 상애원을 설립하여 나환자들의 피고름난 상처를 싸매주고 고독한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의 아버지요 형제요 벗이 되어 주었던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의 숭고한 사랑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맥켄지 한센 선교회 출범에 즈음하여 본지는 부산진교회(담임목사 이종윤)가 출간한 자서전 중에서 저자 서언, 나의 고향과 한국 선교 부분을 발췌하여 연재한다.

연재를 허락한 부산진교회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저자 서언
 
나병 선교회에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나의 친구 몇 사람은 나에게 수시로 외국에서의 귀중한 선교사업의 경험을 기록해서 출판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의 권고를 물리쳤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스코틀랜드(Scotland)의 「나환자 선교회」의 총무직을 오랫동안 맡아왔던 맥커차(Mackerchar)여사의 간절한 출판 권고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녀는 자기 자신의 선교사업에 대하여 출판한 경험이 있었으며 거기서 얻어진 이익금은 선교회에 기부하여 재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에서의 나환자에 대한 선교 경험 중에서 스코트랜드(Scotland)의 하이랜드(Highland)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고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하면서 나에게 큰 숙제를 던져 주었습니다.

나는 결국 맥커차 여사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편집자의 주장에 따라 자서전으로 변신하게 될 줄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던 선교사업이 그 자체로 나에게는 큰 위로와 은혜가 되었습니다. 만일 나의 일생의 사업인 선교에 대한 이 기록이 「나병 선교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만큼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적에 대한 칭찬은 나에게 돌리지 말고 편집인에게 돌려야 합니다.
 
나의 고향

나는 스코틀랜드(Scotland)의 로스(Ross)주에 있는 어웨(Ewe)섬에서 1865년 1월에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에게 네 아들과 세 딸을 남기고 돌아가시어 가정형편도 대단히 가난했으며 그 당시 나의 맏형은 열네 살이었고 막내 동생은 겨우 두 살 반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얼마 안 되어 우리 가족은 로스 주의 서안에 위치한 그 당시 한참 개발붐이 일어나고 있던 작은 도시 플록톤(Plockton)으로 이사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케네드 에이 맥린(Kenneth A. MacLean)씨였는데 그는 독실한 자유교회의 지도자였다(1843년 영국 국교로부터 분리하였는데 그 분쟁 때 그 동리의 전 주민이 분리하였다).

그는 예리한 교육자였으며 학교의 교육 수준을 올려놓았으며 그의 가족은 모두 맥린과와 그의 어머니 7명이었고 모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그 중 한 사람은 목사가 되었고 두 사람은 의사이며 나머지 네 명의 딸은 모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은 윌리엄 신클레어(William Sinclair)씨였는데 아주 존경 받을만한 분이었다. 그의 외모는 위엄이 있었으며 그는 종종 실크 테있는 모자를 쓰지않고 공석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의 교회 설교는 우리에게 지나칠 정도로 신학적 이론과 율
법적인 면이 많았으며 사랑과 은혜가 풍부하였으나 복음적인 면은 미약한 편이였다.

이사해 온지 몇 년 후에 나는 글라스고우(Glasgow)의 자유주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일 년생이 되였다. 나는 그 대학에서 블루스(Bluce)교수를 만나게 되였다.

교수와 내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였을 때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의 어느 지방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내가 플록톤이라고 대답하자 바로 그는 플록톤에 대해서 생생한 기억이 하나 난다고 하였다. 그가 어느 안식일에 학생들과 같이 하이랜드에 도보 여행을 하고 있을 때 그들 일행이 주민 한 분에게 자유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제일 가까운 교회는 플록톤에서 6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들 일행은 부지런히 그 교회까지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며 신클레어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일생에 가장 신학적인 설교였다고 말했다. 나는 부르스 교수의 이 말씀을 듣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하이랜드에 사는 선량한 교인들은 주말마다 지나치게 신학적인 설교로 인해서 오히려 정신적인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곳 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풀어 나가기 위
해 필요한 믿음과 복음에 관한 설교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이랜드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한 목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5일간의 성찬휴가와 행사는 모든 주민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다. 일반 주민들은 모두 일상 업무를 중지하고 학교도 모두 쉰다.

이 성찬휴가 시기에는 플록톤에 있는 특별한 작은 분지에 야외극장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다. 전체를 정식 좌석에 배열하고 그 세 측면에는 각각 약 50mx30m 크기의 특별 잔디좌석을 만든다. 그리고 제일 위쪽 좌석의 뒤쪽에는 낭떠러지가 있으며 제일 아래쪽 끝에는 작은 조립식의 설교단과 조사가 쓰는 방이 놓여진다.

이와 같이 특별한 야외 예배 장소가 해마다 성찬휴가 때에 이곳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히 성찬예배를 위하여 특별설교 목사님이 초청되였다.


▲ 맥켄지 선교사 목회 20주년 기념비석 제막기념 (1930)     © 크리스찬리뷰
 
그 당시로는 로찰슈(Lochalsh)의 맥콜(McColl)목사님은 성찬주일의 특별 강사로 거의
빠짐없이 초청되였으며 그의 설교는 하이랜드 주민에게 항상 은혜가 풍성하였다. 성찬
주일에는 일반교인들은 물론 그 근처의 목사님들까지 이 성령 모임에 참가하였다. 근처의 교회들은 각각의 주일예배에 교인들을 잡아두기가 어려웠다.

개릭 말('스코틀란드'의 전통적인 케일러)에 친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각 교회에서
는 그들을 위하여 따로 예배를 준비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은 어머니와 큰누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열세 살 때에 심상찮은 특별한 영적 경험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통해서 ‘새롭게 거듭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맥콜 목사의 율법에 관한 설교는 항상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나는 언젠가 한번은 내 영의 구원에 대하여 목사님과 대화를 갖고 싶었다. 나는 목사님이 특설 야외예배당에서 성찬 특별설교를 끝내고 목사관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를 만나기 위하여 뒤따랐는데 그때 목사님은 두 할머니와 함께 가고 있었다.
 
나는 도중에 두 할머니와 헤어지는 것을 보고 목사님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나는 케일 말로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이루어 질 것이다." 그때 목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약속만 해주었으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왜 나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나의 정신상태는 그의 설교 때문에 혼돈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의 일생 60여 년 동안 여러 나라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설교한 경험을 통해서 그 당시의 일을 회고해 보면 맥콜 목사님은 그때의 나의 정신상태에 대하여 기도할 좋은 자료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목사님은 나에게 조그마한 용기도 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절망상태에 빠져있었다.

나는 그의 무관심하게 보이는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목사님이 나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셨다면 그것은 성령 역사에 관한 일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걱정하였을지도 모른다.

만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에게 충고해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목사님으로서 가장 중요한 책무의 일부를 망각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 생각된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 앞에서 설교하신 만큼 개인에게도 친히 많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유명한 방문목사인 앤거스 갈브리드 라세이(Angus Galbrith Rassay) 씨의 설교를 통해서 나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나의 걱정이 더욱 커져서 나는 목사관으로 가서 목사와 면담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내가 목사관의 대문에 도착하였을 때 크게 실망하였다. 왜냐하면 목사님에게 시중드는 사람은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었으며 나에게 목사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꼼꼼하게 물어 볼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점은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전 6학년 과정을 통과한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글라스고우에서 창고 일에 종사할 소년을 찾는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주당 5실링의 보수로 취직하였다. 그 돈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종종 끼니를 걸러야 했다.

▲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로 불린 매견시 목사     © 크리스찬리뷰
그러나 얼마 안되어 나의 보수는 7실링 6펜스로 올랐으며 일 년 뒤에는 10실링을 받았다. 나의 큰누나는 항상 나에게 편지를 써서 나의 영적 문제에 대하여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나의 하숙방에서는 내가 주장하는 <교회연합>의 문제가 의논되었다. 나의 하숙집 여주인의 동생은 거리낌없이 구원은 네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나를 깨우쳐 주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구원해 주신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의심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나 자신을 확실하게 그리스도에게 맡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열아홉의 나이로 글라스고우에 있는 <희망의 거리 갤릭(Hope Street Gaelic)>의 통신회원이 되었다.

내가 점차로 해외 선교사업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활동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첫째가 「캠브리지 세븐」 (Cambridge Seven: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1884년 중국의 선교사업에 자원한 캠브리지 학생들)으로부터 받은 논설들이었으며, 둘째가 글라스고우에  있는 선교회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선교사업에 열중한 나머지 일찍이 중국선교사업에 참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나는 모든 점에서 아직까지 내 자신이 미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앤드류 보나(Andrew Bonar) 박사, 카아로웨이에 있는 루이스(Lewis) 목사와 나의 아저씨인 로더라이드 맥크레(Roderide Macrae) 목사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두 목사 모두로부터 대학의 전 과정을 밟게 되면 나는 외국에 가서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유용하게 된다는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학비 조달 때문에 어떻게 대학을 마칠 것이며 나에게는 특별한 공부 재주도 없어 아마 십년 동안 어려운 과정을 공부해 낼 수 있을 것인지 큰 걱정거리였다.
 
나는 보조 우편배달부로 확실한 직업을 잡았다. 나의 책임은 아침과 저녁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었고 부수는 주당 14실링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개의 강좌를 수강할 수 있었으며 개인지도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6개월 전에 아저씨가 사는 칼로웨이(Carloway)의 목사관에 들어가서 아저씨와 살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대학에 입학한 다음 첫 학기를 끝내고 나는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에 속하는 「하이랜드 부인연합회」에서 운영하는 클래다크(Cladach)에 있는 한 학교의 교육을 책임지고 가르치게 되었다.

이 부인연합회는 1843년에 있었던 교회 분리분쟁의 결과 에딘버러에 생긴 단체로서 스코틀랜드와 하이랜드 지방의 도서지역과 고립된 벽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학교들의 교사는 하이랜드 출신의 여러 학생들 중에서 선정하여 6개월간 근무토록 하였는데 이들 학생들은 대학 공부에 필요한 학비를 충분히 보상받았다. 그런데 겨울에는 교사 봉사에 참여하는 대학생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벽지 학교에서는 그 학교의 상급반 학생이나 일부 유급 대학생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그 당시 하이랜드의 개릭말을 할 줄 아는 젊은 목사들은 여름휴가 동안 벽지학교에서 번 돈으로 학비를 지불했다. 나는 클래다크에서 예배를 드릴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곳에서 예배드릴 것을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부터 63년 전에 그 곳에서 나의 첫  설교를 시도하였다. 그 예배에서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긴 기도를 해주어서 나를 도와준 셈이 되었다.

나는 대학의 둘째 학기가 끝난 다음에 칼로웨이 학교로부터 12개월간의 교사직을 제안받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대학을 일년간 휴학을 하고 칼로웨이학교에서 라전어 기초와 헬라어 및 수학을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그 곳에서 가르친 한 학생을 런던에서 만났는데 그는 「미
드랜드(Midland) 은행」 본점에서 출납업무를 맡고 있었다.

나는 칼로웨이에서의 근무가 끝난 다음에 콜(Coll) 섬의 동쪽 끝에 있는 외딴 학교로 옮겨 3년간 교사직을 맡게 되었다. 나의 큰누나 앤은 나를 위하여 그곳까지 와서 집안 살림을 맡아 주었고 내가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겨울에는 내 대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아 주었다. 그 옛날 학교 건물은 친근감을 주는 갈대 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내가 1938년에 스코틀랜드를 마지막으로 방문하였을 때 나는 헥터 맥다골(Hactor MacDougall)씨의 초대객으로 갔었다. 그는 콜 학교 시절에 나의 제자였으며 젊은 나이에 일찍 경찰에 들어가 검열관까지 승진하였고 경찰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유명한 「개릭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옛 콜 학교의 학생시절의 재미있었던 일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기 아야기한 첫 번째 일은 아침 첫 시간에 있었던 성경읽기였다. 그 성경읽기 시간에는 영어와 개릭어로 된 성경을 같이 공부하였는데 성경말씀은 영어에서 개릭어로 또는 반대로 개릭
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공부방법은 사회에 진출한 다음 질문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맥다골 씨는 회상하였다. 또 다른 잊지 못할 일은 돌아가신 맥린(MaLean) 추장의 딸들이 콜 학교의 학생들을 초대하여 일 년에 한 번씩 클래다크에 차려주는 식사였다고 기억을 피력하였다.

그때 학생들이 식사 초대를 받은 장소까지 가려면 대략 20리 정도는 걸어야 하는데 가는 도중에 골짜기 하나가 있어서 그곳에 이르면 나는 학생들에게 우리가 운동장에서 부른 찬송가를 연습하도록 지도했다. 우리가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 부르기 위하여 선정한 찬송가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 ‘보혈로 가득한 샘’ 그리고 ‘열려있는 문’ 등이었다. 맥다골 씨가 기억하고 있는 많은 즐거운 추억 중에서 위의 두 가지 이외 다음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하면 그 당시 벽지학교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교실에는  토탄으로 난방을 하였는데 두 개의 토탄을 매일 교대해서 학생들이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하루는 아침에 토탄 당번 학생이 집에 토탄이 떨어져 빈 손으로 학교에 가는 도중에 그 학생은 토탄 대신 흙덩이 하나를 주어 교실 구석에 있는 토탄 보관장소에 던져놓았는데 선생님은 학생을 꾸짖지 않았다고 한다. 맥다골 씨는 옛 추억 이야기를 다 마치고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학교는 우리에게 작고도 귀중한 교육을 준 신성한 곳이었습니다.”  

▲ 매견시 선교사(오른쪽) 둘째 딸 Cath의 첫돌 잔치에 참석한 선교사들(부산, 1916) ⓒLucy Lane    

내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자유교회」의 산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나는 글라스고우에 있는 「아자일」교회의 학생부 조수로 임명되었다. 나는 막내 동생 어웬(Ewen)은 그 당시 토리돈(Torridon)에 있는 작은 벽지학교를 맡아 가르치고 있었는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콜에 있는 벽지학교로 옮기고 나의 큰누나는 대학의 학기 동안에는 글라스고우에 와서 나의 생활을 도왔다.

그 뒤에 동생 어웬은 글라스고우 대학에서 의사 자격을 받고 졸업하여 뉴 헤브리이즈로 나와 같이 가서 그곳에서 선교 의사로서 열심히 봉사하였으나 그곳의 풍토병인 흑수열병에 걸려서 아깝게도 일찍이 생을 마쳤다.

나의 맏형 케네스는 호주에 살고 있었는데 나의 뉴 헤브리이즈 선교사업에 동참하였고 우리들은 다른 선교 단원들로부터 맥켄지 형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시 옛날 대학시절로 이야기를 돌려서 내가 신학과정을 밟고 있을 그 당시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많은 학생들에게 선교사업 봉사에 참여하기를 권하는 초청이 왔다. 이러한 초청의 주도자는 존못(John Mott)과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 두 사람이었다.

내가 신학부 1학년(1891년) 때 미국으로부터 와일더(Wilder) 씨가 영국대학에서 「자유선교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건너왔다. 글라스고우에서는 수년 전부터 미국에서와 같은 자유선교 학생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단지 외국에서 선교할 것이 분명한 학생만을 받아 들였다. 따라서 와일더 씨는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우리들을 찾아왔다. 우리들은 그와 면담을 한 후 「자유선교단」 명부에 서명하고 서약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외국 선교사업에 나의 생명을 다하여 헌신할 것을 서약합니다.”

서명한 학생 중에서 일부는 와일더 씨와 함께 타 대학을 방문하여 「자유선교운동」에 대한 설명을 하며 와일더 씨를 도왔다. 그리고 이 운동을 시작한 대학에서는 「자유선교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자기 대학에서 개인적으로 동급생들에게 외국 선교사업에 대한 우리들의 책무를 설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우리 학급에서는 나 혼자만이 자원자였다. 대학을 졸업한지 오랜 후에 나의 절친한 동급생이었던 니콜 맥니콜(Nicol MacNicol)로부터 우리 대학시절에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라고 권한 사람은 너뿐이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아마 그 일이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혹은 그 당시 젊은 선교사 제임스 베인(James Bain)이 리빙스토니아에 가서 선교하다가 얼마 안되어 반다웨(Bandawe)에서 목숨을 잃은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작은 기념비의 제막식에서 받은 감동일지도 모른다.

이날의 제막기념예배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깊은 감명을 새겨주었다, 맥니콜과 나는 ‘모든 거룩한 사람들 수고를 끝내고 쉴 때라’는 찬송을 들으면서 계단을 내려올 때 눈물을 흘렸으며 지금도 그 찬송이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이때 나는 그에게 선교사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의 질문이 너무 부담스러웠는지 잠시 후에 맥니콜은 「자유교회」의 선교사가 되겠다고 대답하였다.

36년간 그의 헌신적이고 신성한 선교활동은 봄베이(Bombay)의 푸나(Poona)에서 실
천되었으며, 그의 주에 대한, 그의 교회에 대한, 그리고 인도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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