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도로 간 호주 선교사 제임스 맥켄지 초기 울릉도교회에 견인차 역할을 하다

양명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6/25 [12:42]
▲ 울릉도 도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울릉도 선교기념관 기공 감사예배 전경(2012년 5월 23일)   © 울릉군청

지난 5월 23일 울릉도선교기념관 기공 감사예배가 울릉도(옛 이름은 울도)에 소재한 도동제일교회에서 열렸다. 1909년 울릉도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예장 통합 총회는 울릉도(독도)선교 100주년 기념관 건축위원회를 임명하여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기공 감사예배에는 총회와 노회 관계자 70여 명이 참석하여 울릉도에 복음이 전하여져 교회가 설립된 100년을 감사하고, 기념관을 통하여 미래의 복음 전도와 성장을 기도하고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이 행사에는 울릉도 교회 관계자들은 물론 울릉도군 정부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하여 기쁨을 나누었다.

이날 관심을 끈 것은 이 행사 중 호주 선교사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 한국명 : 매견시, 梅見施) 목사가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필자는 신비의 섬 울릉도를 처음 방문하면서 맥켄지 선교사 부부가 그 옛날 이곳을 방문하였다는 기억을 알고 왔지만 막상 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가 첫 방문할 당시의 1910년 울릉도는 일제의 핍박 하에 있었고 그곳 한국인들은 “정말 비참하도록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호주 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242)고 증언하고 있는데 어떤 동기로 그곳까지 갔을까? 지금은 세 시간이면 가는 뱃길이지만 당시는 이틀에서 나흘 걸렸다는 거친 바닷길인데 어떤 열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그가 특별히 좋아했다던 울릉도 지역 감독 일은 어떤 사역이었을까?

그의 부산지역 나환자 사역은 유명한데, 울릉도 행적은 왜 잘 알려져 있지 않을까?  이글은 이런 질문에 대한 일차적인 대답이며,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를 제시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호주 선교사는 왜 울릉도에 갔을까
 
제임스 맥켄지 선교사의 울릉도 방문은 그가 한국에 도착한 첫 해인 1910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울릉도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경상노회 소속이었으며, 맥켄지 선교사도 부산ㆍ경남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므로 경상노회와 긴밀한 협조 하에 있었다.
 
그는 울릉도를 순행한 첫 외국인 선교사였으며, 10여 년 후에야 미국선교사들도 그 뒤를 잇고 있다.

그가 울릉도를 방문하기 한 해 전인 1909년 울릉도에 첫 교회들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 나리교회, 장흥교회, 저동교회 그리고 도동교회 등이 그것이다. 강원도에서 온 김병두라는 교인의 영향으로 한 해에 네 쌍둥이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경북교회사, 56).

맥켄지 선교사는 이 네 교회의 초기 발전에 큰 견인차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울릉도 기독교 90년사’를 보면 저동교회, 장흥동교회 그리고 현포교회의 창립자를 맥켄지 선교사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울릉도 기독교 90년사, 66~67).

▲ 울릉도(독도) 선교 100주년 기념관 건축위원회 관계자들이 울릉군 도동제일교회에서 열린 기공예배 후 시삽하고 있다.     © 울릉군청   

또한 한국인 창설자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창립자 맥켄지의 정확한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먼저 울릉도의 첫 교회인 나리교회 (현 천부제일교회)부터 보자. 이 교회는 “1909년 3월 나리동에 거주하던 함영수, 송광수 등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 송광수가 경북 경산에서 매견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나리동 176번지에 정착하면서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에는 나리동교회로 불렀다.

울릉도에서 처음 성례식을 베푼 맥켄지 목사는 이 후 경상노회의 파송을 받아 울릉도의 순행목사(巡行牧師)로 시무한다”(이연경, ‘100년을 하루같이 울릉도 복음의 등대가 되어 온 세 교회’, 주간기독교, 2009).

이 내용을 보면 맥켄지 선교사는 나리교회의 창시자 송광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인연이 되어 울릉도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경상노회는 매견시 선교사를 울릉도 순행목사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저동교회(현 울릉동광교회)에서 맥켄지 선교사는 변선욱이라는 한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양성하였는데, 1919년 그는 저동교회의 초대 교역자가 된다. 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1915년경 경남선교사 매견시 목사가 울릉도 교회의 순행 목사로 파송되어 울릉도중(島中) 5개처 교회(장흥, 도동, 저동, 천부, 현포)를 순행할 때 저동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영수와 집사를 임명하게 된다.
 
 이때 변조사의 아버지와 온 가족이 처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였고 집회 기간 중에 매견시 목사는 청년 변선욱의 인물이 매우 영민함을 보고 부친에게 장남을 교역자로 양육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 받은 뒤 울릉도 순행을 마치고 육지로 떠날 때 함께 동행하여 대구동산성경학원(현 영남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김기백, ‘저동교회 최초 교역자 변선욱 조사’, 울릉동광교회 홈페이지, 2009).

또한 울릉도 북면에 평리교회(현 현포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맥켄지 선교사는 1910년 제직을 임명하는데 다음이 그 기록이다.

“그때에 경남 선교사 매견시가 섬에 들어와 교회 직원을 선택하니 정윤식은 영수로, 박춘목은 집사로 임명되었다” (경북교회사, 64).

또한 도동교회(현 도동제일교회)에서의 사역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자기 가옥을 봉헌하여 설립했던 도동교회의 김성서가 1915년 모든 교인을 데리고 안식교로 넘어가자 교회를 다시 찾고자 관청(울도청)을 방문하여 문부를 확인하니 이미 교회는 안식교로 넘어가고 김성서의 명의로 되어 있어 권리회복을 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김기백, 2009).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초기 울릉도 교회사에 있어서 맥켄지 선교사의 역할은 실로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누아투에서 한국을 위해 헌금하다
 
▲     경북교회사 35페이지에 ‘매견시 목사 입도’라고 기록되어 있다.(왼쪽에서 3번째 줄 아래 부분)       ©크리스찬리뷰

잘 알려진 대로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기 전 남태평양의 바누아투 (Vanuatu, 옛 이름: 뉴헤브리즈)의 산토 섬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15년 동안 성경번역과 찬송가 등을 만들며 원주민 사역을 하였는데 흑수열병으로 아내를 잃고, 선교본부의 권유로 1909년 호주로 귀국한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전혀 다른 기후와 언어의 한국으로 자원하여 입국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파송하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의 재정 지원이 어렵자 산토 섬 노구구(Nogugu) 교인들이 매켄지의 사역을 위해 헌금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장로들은 회의를 열고 한국에서의 그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만장일치로 200파운드(2년간 칡을 팔아 얻은 돈)를 주었다”고 헬렌 맥켄지는 그의 책에 쓰고 있다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169).

또한 다른 글에서도 이 사실이 잘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산토의 사람들에게 눈물로 안녕을 고했을 때 그들은 그에게 그의 새 사역을 위하여 200파운드를 주었다. 이 돈은 활과 화살 그리고 다른 물건을 2년간 팔아서 모은 것으로, 가장 관대한 선물이었다” (Vanuatu Victory, 158).

산토 섬의 가난한 부족사람들이 활과 칡 등을 팔아 모은 큰 돈을 선뜻 한국선교를 위하여 헌금을 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고, 맥켄지 선교사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신뢰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 집 앞의 산토 추장(몰리) 올빼미 깃털로 머리를 장식하고, 돼지 엄니로 만든 고리로 장식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현재 한국에서 파송되어 바누아투에서 사역하는 원천희 선교사는 몇 년 전에 산토 섬의 노구구를 방문했다. 당시 그가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그 지역인들에게 듣기로 산토에서 선교했던 호주선교사(맥켄지를 지칭)가 한국에 가서 복음을 씨앗을 뿌렸고, 교회를 세웠으며, 그리고 지금은 그 열매로 한국 선교사(원 선교사 지칭)가 노구구를 방문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마 이들에게는 큰 감동이며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더 놀라운 보고를 덧붙이고 있다.

당시 “맥켄지 선교사는 이 헌금으로 울릉도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원천희 선교사 보고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2)는 것이다.

이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 보고자 필자는 여러 관계기관에 연락을 하며 산토 섬 부족인들이 헌금한 돈이 울릉도의 교회를 건축하는데 쓰여졌는지, 어떤 교회에 쓰여졌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아직까지 그 내이 내용이 사실이던 아니던 한국선교를 위하여 노구구 교인들은 헌금을 하였고 그 헌금으로 맥켄지 선교사가 사역을 하면서 울릉도까지 갔다면 울릉도교회 역사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 울릉도의 명물 오징어 건조장     ©크리스찬리뷰
 
또한 관계된 울릉도교회들과 헌금한 산토 섬의 노구구에 있는 교회들이 서로 자매관계를 맺어 협력하는 기회가 있으면 유익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후에 맥켄지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바누아투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 그곳 1917년 총회에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보고했음은 물론이요, 이 보고를 통하여 노구구의 교인들도 본인들이 헌금한 돈이 한국에서 어떻게 귀하게 쓰여졌는지 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총회도 도전을 받고 있는데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져 있다. 

“맥켄지 선교보고를 듣고 나서 (중략) 더 강력한 사역을 위해서 재정적 지원을 하면서 뉴헤브리즈교회에서 더 많은 토착인 장로나 목사들이 발굴되어야 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253).

사실 예장 통합 총회와 바누아투장로교회 총회는 2010년 바누아투장로교회 총회사무실이 있는 수도인 빌라(Villa)에서 자매결연을 맺었다. 당시 산토 섬의 노구구 교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두 가지를 요청했다. 양 교단 자매교단 결연식 행사를 노구구에서 하자는 것과, 노구구에 교회를 건축 중에 있는데 맥켄지 목사 기념교회로 지원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 이 두 가지는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기 울릉도교회 설립에 견인차 역할을 하다
▲ 예장(고신) 바누아트 파송 원천희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어떤 이유에서인지 맥켄지 선교사는 그의 자서전에 울릉도를 순회하며 선교한 사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맥켄지 선교사는 울릉도를 최소한 일곱 번 방문하였다.

1910년 처음 방문한 이래로 1912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울도 저동교회를 비롯한 6교회를 감리교회가 경남장로교회에 허락함으로 같은 선교사 매견시가 울릉도에 들어와 장로회 규례대로 본 교회 주신조를 영수로, 도봉기를 집사로 임명하였다” (경북교회사, 81).

그 다음 해인 1913년에는 “울도 장흥교회에 경남 선교사 매견시와 조사 이용하가 순회차 섬에 와 직원을 선정하니”(경북교회사, 88) 라고 기록되어 있고, 호주에서 발행되던 선교 소식지에는 맥켄지 선교사의 당시 울릉도 사역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He spent the Saturday talking with people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conducting examinations for baptism and the  catechumenate. He found nine men ready for baptism and they were baptized at the service next day, but the women had had no woman to teach them and so were not ready to receive baptism.” (The Messenger, April 4, 1913, 211)

“그는 토요일에 교회의 조직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고 세례를 위하여 교리문답을 실시하였다. 아홉 명이 세례 받을 준비가 되었고, 그들은 다음 날 예배 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여성이 없었고, 그래서 준비가 안되어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1915년의 방문 내용은 위에 이미 언급하였고, 1916년에는 “경남선교사 매견시가 순행
하여 함근복이 영수로 장호범이 집사로 시무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30여 명의 교인이 되었다”고 나리교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경북교회사, 112).

1917년에는 맥켄지 선교사가 울릉도 장흥교회에서 송원수를 영수로 임명하고 있다 (경북교회사, 120).
 
그 중 특별한 것은 1915년 아내 메리 켈리 맥켄지 선교사와 함께 동행한 것이다.
울릉도 여성들의 간청에 의하여 메리 선교사도 “복음을 갈망하고 있는 울릉도 여성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고 믿음을 나누기 위해서 갔다”고 설명하고 있다(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242).

그 당시의 문화 속에 남자 선교사가 방문하여 교육할 수 없었던 여성들을 위하여 메리 선교사도 울릉도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이 방문의 귀한 사진 두 장이 남아있는데 하나는 관모봉이 멀리 보이는 도동항에서 찍은 사진이며 또 하나는 짐꾼을 앞세운 메리 선교사의 사진이다 (김기백, ‘교회초기 울릉도로 찾아 왔던 매견시 목사의 흔적들’, 울릉동광교회 홈페이지, 2010).

메리 선교사는 한복을 입었고 임신으로 인하여 배가 나와 있으며, 그 해 11월 25일 출산하여 얻은 딸이 헬렌 맥켄지의 동생 캐서린 맥켄지일 것이다. 이 둘은 후에 부산일신병원의 설립자가 된다.

맥켄지 선교사의 마지막 울릉도 방문은 1927년 원산에 있는 미국선교사 휴양관에 가는 길에 들렸으며 본인이 관할하였던 지역의 교회들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며 현포교회와 남서동교회에서 세례를 베푼 내용이 교적부에 기록되어 있음을 울릉도기독교100년사를 쓴 김기백 장로는 증언하고 있다.
 
▲ 맥켄지 선교사의 아내 켈리 선교사가 1915년 울릉도를 방문한 사진     © 크리스찬리뷰
이상의 기록들에서 맥켄지 선교사의 울릉도 사역 전체를 전망해 볼 수 있는데 부흥집회 인도, 세례와 성만찬 교육과 집례, 제직임명, 교회조직, 감독, 심방, 교회 재산권 보호, 목회자 발굴과 교육, 이단과의 싸움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고, 이러한 그의 사역이 초기 울릉도 개척교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목회적 돌봄과 힘이 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맥켄지 선교사는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을 순행할 때는 자신의 방문이 한국인에게 누가 될까 하여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거친 파도를 넘어 울릉도에 다니면서 입었던 그의 옷, 가지고 다녔던 음식, 또한 이웃들과 나누었던 대화 등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29년을 봉사하고 귀국한 그는 1941년 호주빅토리아주 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호주교회 속에 선교열정을 불러 일으키며, 한국선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 맥켄지 선교사의 아내 켈리 선교사가 1915년 울릉도를 방문한 사진     © 크리스찬리뷰
현재 추진되고 있는 울릉도(독도)선교100주년기념관에 여러가지 내용이 담기겠지만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선교방문한 제임스와 메리맥켄지 선교사부부를 기억하고 그의 사역을 기리는 일도 꼭 포함되어야 하겠다.
 
그의 기념비를 세우거나 기념동판을 개막하는일은 후세대에게 선교의 비전과 꿈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과 호주의 선교관계를 더욱튼튼히 하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ㆍ경북교회사, 박문영 편사, 김병희 편역, 코람데오, 2004.
ㆍ맥켄지가의 딸들, 일신기독병원 총동문회, 도서출판 글꼴, 2012.
ㆍ울릉도 기독교 90년사, 울릉도기독교구십년사 편찬위원회, 포항,
   1999.
ㆍ울릉도 기독교 100년사, 김기백, 2012.
ㆍ제임스 노블 맥켄지 목사 자서전, 제임스 맥켄지, 지응업 역,
   부산진교회, 2004.
ㆍ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헬렌 맥켄지, 김영동 역,
   기독교서회, 2006
ㆍVictory Vanuatu, Helen Gillian, 1998.

글ㅣ양명득/호주연합교회 한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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