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생 루시와 실라 여사 인터뷰

나의 아버지 맥켄지 목사님

글|정지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7/31 [10:06]
▲ 1931년 부산에서 촬영한 맥켄지 선교사의 가족사진. 맥켄지 선교사, 실라, 메리, 헬렌, 케서린, 루시(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Lucy Lane  

호주 맥켄지 한센 선교회(이사장 최승일 목사)는 오는 9월 2일부터 6일까지 멜본과 시드니에서 제1회 맥켄지 호주 선교대회를 개최한다.

금번 선교대회는 △호주 맥켄지 한센 선교회를 국내외에 홍보하고 △후원 교회·후원기관 및 개인 후원자들을 모집하여 △청년·대학생들을 선교에 동원하는 사역을 통해 △장기 및 단기 선교사를 발굴, 중국을 비롯한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 지역에 한센 전문인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에 본지는 부산에서 출생하여 현재 멜본에 거주하고 있는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의 두 딸 루시(Lucy Lane, 1918. 10.11 )와 실라(Sheila Krysz, 1922. 12.20) 여사를 만나 ‘나의 아버지 맥켄지 목사님’이란 주제로 지난 7월 3일 오후 2시부터 실라 여사가 거주하고 있는 카라나 양로원(Karana Community)에서 본지 영문편집위원인 정지수 목사의 사회로 1시간 30여 분에 걸쳐 단독 영상 인터뷰를 가졌다.

본 인터뷰는 다큐형식 DVD로 제작되어 금번 선교대회에서 상영될 예정이며 대회 참석자들에게 전 내용을 담아 홍보용으로 배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크리스찬리뷰와 인터뷰 중인 루시와 실라(왼쪽) 여사  ⓒ크리스찬리뷰

- 안녕하십니까?  두 분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셨지요?

루시·실라 : 네,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 한국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말씀해 주시지요.

루시 :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한국 사람들이 다니는 유치원 1년과 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습니다.
 
▲ 동생 루시를 안고 있는 케서린(가운데)과 헬렌 ⓒ Lucy Lane 

그곳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한국 학교에 다녀서 우리들의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어머니가 저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이 입양한 한국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여성들을 위한 훈련센터가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한국분들이 저희들에게 잘 해주셨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저희들이 그곳에서 식사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저희들이 한국 사람들의 음식을 먹으면 그곳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셨습니다.

저희들은 한국 음식과 놀이를 아주 좋아했는데, 특히 널뛰기를 좋아했습니다. 또한 작은 돌맹이로 하는 공기 놀이도 좋아했습니다. 9살 때 기숙사가 있는 선교사 자녀 학교에 가기 전까지 저희들은 한국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고, 어머니께서 저희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 선교사 자녀 학교가 평양에 있었나요?

루시 : 미국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평양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인 선교사 스무 가정 정도가 있었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또한 대구, 순창, 광주 등 전국 각처에서 사역하는 해외 선교사 자녀들이 평양에 있는 미국 선교사 자녀 학교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서울에도 외국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지만, 기숙사가 없어서 평양에 있는 학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약 12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는데 우리는 다른 한국 학교 학생들과 농구, 하키 등과 같은 운동 경기를 즐겼습니다.

겨울철엔 학교 기숙사 뒤에 작은 강이 있어서 수업을 마친 후에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타곤 했습니다. 또한 가끔씩 대동강에 나가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미국에서 오신 분들이고, 3년 동안 저희들을 가르친 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한국 선생님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은 과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주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또한 한국인 간호사 한 분이 계셨고, 우리가 호주 사람으로 유일하게 그 학교에 다녔습니다.

우리가 호주로 돌아 갔을 때, 평양에서 미국식 교육을 받은 것이 조금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36년에 호주로 왔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호주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미국 사람들도 호주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루시(오른쪽)와 실라 여사와의 인터뷰는 실라의 노환으로 무산될 뻔했으나 실라는 병환중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본지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 언제까지 평양에서 공부하셨나요?

루시 : 저는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실라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은퇴하셔서 호주로 돌아 왔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자녀 학교에 다닐 때는 한국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국 교회에 가지도 않았고, 학교 안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미국 선교사 자녀학교가 조금 특이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방학이 되어 부산으로 내려가면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실라 : 저희들이 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이 되면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기차는 밤새도록 달려서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루시 : 개학해서 부산에서 저희들이 기차를 타고 가면, 대구 등에서 다른 학생들이 타지요. 약 12시간 이상 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희들이 한국에서 자라는 동안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철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한국에 있는 동안 일본 사람들은 거의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실라 : 저희들은 일본어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 루시(오른쪽 7번째)의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평양에 있던 미국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 ⓒ Lucy Lane    


- 루시께서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루시 : 저는 공군에서 근무했는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에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았고, 전쟁 중에 간호사 일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제 친구와 간호사 훈련을 받은 후에 공군에 입대했습니다. 저는 파푸아뉴기니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근무했는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다시 호주로 돌아와 공군에서 근무할 때 의사였던 제 남편을 만났습니다. 만약 공군에서 근무하지 않았었다면 남편을 만나지 못했겠지요.

실라는 간호사 훈련을 받고 바누아투에서 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간호사로 봉사했습니다.

실라 : 저희 아버지가 바누아투에서 사역했다고 합니다.

- 아버지가 사역했던 곳에서 봉사하셨나요?

실라 : 아버지가 사역하셨던 같은 섬(산토)에서 봉사했습니다.


루시  : 헬렌 언니와 실라가 아버지가 사역하셨던 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 현재 바누아투에서 선교하는 한국인 원천희 선교사가 그곳에서 아버님의 선교 기록과 기념물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루시 : 네, 저희 아버지께서는 산토 섬에서 사역하셨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사역하시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사역을 접고 철수하셨습니다.

- 맥켄지 선교사께서 산토 섬을 떠날 때, 그곳 원주민들이 아버님의 한국 사역을 위해 200파운드에 달하는 선교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루시 : 헬렌 언니가 쓴 책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4월 6일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故 매혜란(헬렌 맥켄지) 선교사에게 임채민 복지부장관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 크리스찬리뷰

- 혹시 아버님께서 그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루시 : 아버지는 그곳에서 성경 번역을 하셨고, 첫 번 째 부인이 말라리아에 걸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도 말라리아에 걸리셨지만, 회복되셨습니다. 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셨습니다. 말라리아 때문에 아버지는 한국으로 사역지를 옮기신 것입니다.

- 저희들은 가난한 산토 섬 부족들이 사역지를 떠나는 맥켄지 선교사에게 선교 헌금을 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루시 :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잘 모릅니다.

- 맥켄지 선교사께서 한국에 가셨을 때 울릉도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버님이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바누아투에서 받은 선교헌금을 울릉도 교회 개척에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루시 : 네,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버지가 처음 한국에 가셨을 때, 여러 지역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배와 바다를 좋아하셔서 섬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 아버님이 울릉도를 방문하셨을 때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을 보여 주며)이런 사진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루시 : 아니요. 이런 사진은 처음 봅니다.

-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언제 호주로 오셨나요?

루시 : 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호주로 돌아 왔습니다. 그때 저희보다 먼저 호주에 들어온 캐더린 언니가 간호사 훈련을 마쳤습니다. 제가 아동 병원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을 때, 언니는 같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일반 병원에서 훈련을 더 받았는데 훈련을 마친 후에 공군에서 근무했고, 결혼한 후에는 더 이상 간호사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을 돌보는 평범한 주부로 살았습니다.

- 실라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온 후에 어떻게 지내셨나요?

실라 : 저는 PLC(장로교여자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식 교육을 받아 미국 역사, 미국 지리 등을 배웠는데, 호주 PLC에서는 호주 역사, 호주 지리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미국식 발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시 :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저희들이 미국식 영어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미국식 영어를 집에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학교에 가서는 미국 영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실라 : 저는 호주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언니들이 의사와 간호사가 되어서 저도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간호사 훈련을 받은 후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바누아투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는 의사가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마취하는 방법 등 의사가 해야 할 일들 중 일부를 저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  큰 언니 헬렌은 의사였고, 작은 언니 캐서린을 비롯해 두 분들은 모두 간호사였습니다. 자매들이 의료계에서 일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나 사연이 있었나요?

루시 : 저는 어려서부터 항상 간호사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실라 : 아버지가 부산에서 사역하실 때 많은 환자들이 아버지를 찾아 와서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의술을 배우신 것 같습니다. 팔이나 다리를 다친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 오면 아버지는 그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 집에 찾아 와서 아버지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 모습을 저희들은 어려서 보았습니다.

- 루시는 부모님이 한국에서 은퇴하시기 전에 호주에서 혼자 사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루시 : 아니요, 저희 언니들이 호주에 먼저 와 있었고, 어려서부터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헬렌 언니와 함께 저는 아는 여자 집사님 댁에서 지내다가 간호사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병원 기숙사에서 지냈습니다. 여 집사님 가정은 저희 부모님과 친분이 있는 가정이어서 저희들에게 잘해 주셨습니다.

- 당시에는 비행기편이 없어 한국과 호주를 오고 갈 때 배를 타셨지요?

루시 : 네, 배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국에서 호주를 오는데 약 5주가 걸렸습니다. 우리가 탄 배는 부산에서 나가사끼를 경유해서 홍콩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브리즈번을 지나 시드니와 멜본으로 왔습니다. 주로 여름에 여행을 했고, 태풍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홍콩에서 여러 날을 머물기도 했지요. 저는 배 멀리가 심해서 고생을 했습니다.

실라 : 부모님은 갑판에서 저희들 보고 선실에서 나오라고 소리치시곤 하셨지요. 저희들은 배 멀리가 심했습니다.

- 금년 9월 일신기독병원이 창립 60주년을 맞습니다. 10년 전 실라께서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셨는데 혹시 올해에 두 분 중에 누가 한국을 방문하실 수 있는지요?

루시 : 제 아들 찰스가 저희들을 대신해서 한국을 방문합니다. 우리들은 너무 늙어서 가기가 어렵습니다. 찰스는 저희 아버지를 많아 닮았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처럼 수염도 길렀는데, 정말 아버지와 많이 비슷합니다.

▲일신기독병원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실라 여사(가운데)가 어린시절 자신이 살았던 집을 병원 관계자들과 함께 찾았다. ⓒ 크리스찬리뷰

- 한국 정부가 지난 4월 언니 헬렌에게 일신병원에서 봉사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루시 : 저희들은 언니 헬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언니가 죽은 후에 훈장을 받게 되어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그리고 캐더린 언니도 일신병원 설립과 사역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캐더린 언니는 헬렌 언니를 도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캐더린 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헬렌 언니가 그런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언니들은 함께 일했지만 다른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캐더린 언니는 키가 컸고, 헬렌 언니는 키가 작았습니다. 두 사람이 성격도 달랐지만, 그런 차이점들 때문에 두 언니가 함께 잘 사역했던 것 같습니다.

캐더린 언니도 나이팅게일 상을 받았는데 간호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실라, 10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산에 있었던 집에 찾아간 것을 기억하세요?

실라 : 네,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시멘트 길을 기억하느냐고 하는데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루시 :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담장 밖에 없습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찾아가 보았습니다.

- 한센병 환자들이 잘 다닐 수 있도록 아버지가 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알고 계세요?

루시 : 언덕에 좁은 길이 있었던 것은 기억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만든 길은 잘 모르겠습니다.

루시 : 이것은 아버지께서 사용하셨던 지팡이입니다. 지금은 제가 사용하고 있는데 이 지팡이는 금강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아버지가 금강산에서 가져왔다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루시 여사 ⓒ크리스찬리뷰

- 모세의 지팡이 같네요.

루시 : 제가 이것을 갖고 쇼핑을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이 지팡이를 부러워합니다. 70년 이상된 지팡이입니다.

- 작년에 호주 맥켄지 한센 선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다음 달에는 멜본과 시드니에서 선교대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루시 : 저는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한센 환자들이 여러 나라에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센 환자들을 돕는데 저희 아버지 이름을 사용하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한센 병자를 돌보신 맥켄지 선교사에 대해서 좀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루시 : 저희 아버지가 처음 한국에서 사역하실 때는 주로 지방 도시들과 섬들을 방문하며 전도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에게 부산에서 한센 병자들을 돌보는 사역이 주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의술에 관심이 많으`셨고, 특히 불치병으로 알려진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는 한센병의 진행을 조금 늦출 수 있는 약을 환자들에게 발라 주셨습니다.

한센 병자들을 돌보는 사역이 아버지의 주된 사역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사역에 집중하셨고, 많은 한센 환자들이 찾아 와서 항상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초과되곤 했습니다. 저희들은 집 앞에서 여러 명의 한센 환자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하지만 병실이 부족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가끔씩 한센 환자들이 정원을 가꾸거나 하면서 저희 집안 일을 도와 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자라면서 한센 환자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좋은 옷과 음식들을 제공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저희들은 호주에서 온 선교 선물 박스를 받아서 정리하는 일을 돕곤 했습니다. 저희들은 선물을 잘 분배해서 모든 환자들이 성탄절에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는 한국인 사역자들과 함께 고아처럼 버려진 한센 환자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성탄절이 되면 그들에게도 선물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들 중 한 어린이는 목수 일을 배워서 성장한 후에 건축 사업을 했는데, 그분이 일신병원 건축을 감독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5년 먼저 1905년에 한국에 가셨고, 아버지는 1910년에 한국에 가셨습니다.
 
▲ 맥켄지 선교사의 부인 메리(Mary)가 운영했던 부산진고아원 12주년 기념사진(오른쪽 두 번째가 맥켄지 선교사)

- 한국에서의 추억을 소개해 주시지요.

루시 : 한국 목사님들이 점심 시간 때쯤 저희 집을 방문할 때가 있었는데, 저희는 그분들이 점심을 드시기 위해 방문했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분들이 식사 기도를 너무 길게 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희들은 음식이 식을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는 모유를 먹지 못하는 아기들에게 콩우유를 나누어 주셨는데, 당시에는 콩우유가 아기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번은 제가 담장 위로 올라 가다가 넘어져서 다리에 상처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꿰매야 한다고 주장하셨고, 어머니는 약만 발라 주자고 하셨습니다. 두 분이 논쟁을 벌이는 동안 저는 누워서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 아버님께서 은퇴하신 후 호주로 돌아 가셔서 어떻게 남은 여생을 지내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루시 : 아버지는 73세에 은퇴하셔서 멜본으로 돌아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다음 해에 빅토리아 주 장로교회 총회장이 되셨고,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에 대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선교 사역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교회 연합 운동에도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유나이팅 교회 연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91세에 돌아 가셨는데, 돌아 가시기 전까지 사람들이 아버지를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가 생선을 좋아하셔서 매일 저녁 생선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부산에 살았기 때문에 다양한 생선을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역이 일본 정부에도 알려져서 당시 블루 리본 훈장과 후원금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들이 집에 찾아와 사진을 찾으려 했습니다. 허락 없이 부산의 지형을 찍으면 간첩으로 오해 받던 시기였습니다. 아버지가 경찰서로 끌려 가셨는데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실을 모르고 일본 경찰이 아버지를 끌고 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이 사실이 알려져 무사히 풀려 나셨습니다.

- 호주 맥켄지 한센 선교회 사역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루시 : 호주 맥켄지 한센 선교회가 한센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 이외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실라 : 형님(언니)의 말에 공감합니다.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루시 : 저희들은 정말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글/정지수|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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