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앗을 심은 호주 선교사들-베리 콜빈(Barry Colvin) 선교사전후 재한 호주 장로교 선교 복구의 숨은 손
전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교회 복구 실무자로 너무 바쁜 일정으로 한국어 배울 틈도 없어 본지는 지난 5월 호부터 생존하는 호주 선교사들을 직접 만나 이들에게 한국사역의 배경, 내용, 그리고 유산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두 번째 인터뷰 대상은 6.25전쟁 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선교회 복구 실무를 맡았던 재한 호주 선교부 관리책임자 베리 콜빈 씨(Mr. Barry Colvin, 1954-1958)와 함께 했다.(편집자주)
- 베리 콜빈 선교사님은 어떤 배경에서 자라나셨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까? “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장로교인이었지만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시던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일학교와 장로교 청년·청소년 연합회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기독교 가치관과 원리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찾아주시고, 삶의 여정을 이끌어 때가 되자 한국선교에 쓰일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고 확신합니다.” - 대부분의 재한 호주 선교사들은 빅토리아주 출신인데 반해, 드물게 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자원하셨습니다. 어떻게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습니까? “2차세계대전 이전의 대부분의 호주 선교사들은 빅토리아주 선교부에서 파송한 분들이었습니다. 이후 장로교회가 선교사역을 연방관리로 바꾸고, 연방선교부 APBM를 시드니에 설치했지요. 저는 항상 선교에 관심이 많았고, 20대 초반에는 장로교 청소년·청년연합회 (PFA 15-30세까지 장로교 소속 젊은이들의 연합모임, 성경공부와 자치활동을 함 역주)에 깊이 관여하다가 1953년 말 선교부에 자원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회계와 행정 경험자가 간절히 필요한 때여서 받아들여졌습니다.”
- 한국선교를 나가기 위해 어떤 훈련을 받으셨나요? “제가 한국에서 했던 일은 주로 행정이었기 때문에 따로 훈련은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드니를 떠날 때 회계 쪽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격이 된다고 인정되었지요. 그러나 한국사역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도리어 회계는 제 업무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회계뿐 아니라 문서작성, 선교차량의 임시운전사, 특히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던 통관업무, 차량관리, 재산관리, 외부기관 대표, 선교부 재정책임자, 병원조달도 해야 했지요. 이밖에도 다양한 일을 하면서 4년간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 1954년부터 재한 호주 선교부의 관리책임자로 일하셨는데, 당시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고, 사역을 하면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1954년 3월 영국 수송선 갑판 위에서 바라보던 부산항의 모습이었는데,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갈색에 민둥산들과 바쁘게 돌아가는 복잡한 항구의 모습은 제가 꿈꾸던 선교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내리자마자 확연한 가난, 피난민 그리고 수많은 군인들이 첫 인상이었고, 초기의 한국생활은 매우 험난했습니다.” - 당시 재한 호주 선교회에서 선교사님은 선교회재산을 회복, 재건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셨고, 여기에는 일신병원이 포함되더군요. 이런 업무에서 어떤 애로사항이 있었습니까? “2차세계대전 이전, 재한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거창, 진주, 마산, 통영, 부산과 동래에 학교, 병원, 선교시설과 경상남도에서 일하는 여러 선교사들의 사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환자선교회는 저희 사역지였지만 소유재산은 아니었지요. 1955년 초 선교기지 안에 세워진 새 교회는 영국의 나환자선교회기금으로, 건물재료와 기초공사에 미군의 상당한 도움으로 지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1955년 4월 30일 홍콩 나환자선교회의 프레이저 박사가 개관했고, 여기에 제가 조그마한 공헌이라도 한 것을 큰 특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일은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들을 만날 때, 그리고 종종 세관, 경찰 기타 정부기관의 부패한 관리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 △말(영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통역사에 의지해서 일을 해야 했던 것 △먼지와 돌 투성이의 지방도로로 종종 매우 위험한 운전을 해야 했던 것 △제가 신경써야 할 문제들은 인력지원이 너무 없는 상태에서 충분한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는 점 같은 것입니다. 자동차도 아주 낡았었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지요. .”
- 재한 호주 선교사들은 비교적 한국어 공부를 잘하는 편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어를 배우는데 어려움이 많으셨던 모양이지요? “제가 해야 할 일은 호주 선교회가 예상했던 것을 초월해서 급속도로 늘어났고, 따로 한국어를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서울로, 지방으로 자주 다녀야 했고, 꾸준히 공부할 시간이 없었지요. 오랜 근무 시간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았고, 몸도 자주 아팠습니다. 소아마비에 걸려 고생도 했고요. 결국 당시 맥켄지 자매(헬렌과 케서린)와 친한 친구이자, 제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에디스 칼트 선교사가 많이 돌봐주었는데, 막상 에디스는 저와 같은 병에 걸려 죽고 말았지요.” - 말씀을 들어보면 서울, 지방 등으로 여행을 많이 다니신 것 같은데 무슨 일로 다니셨나요? 그리고 당시 지방 사정은 어땠나요? “지방에 갈 때는 기차나 버스를 이용했지만 특히 마산에 갈 때는 지프차를 썼습니다. 그러나 진주, 거창, 통영 등에 선교회 재산의 기록 파손이나 기타 무단 점거 문제로도 가야했지요. 서울에는 통관 문제로 인해기차로 갈 때가 많았는데,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당시 통관 건은 서울에서 모두 허가가 났으니까요.” - 선교사님은 1958년 병으로 인해 호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후에는 무엇을 하셨고 이후 한국 선교에 관여하신 적이 있나요? “1958년 초 시드니로 돌아왔을 때는 병 때문이 아니라 저의 4년 임기가 다 끝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첫 번째 숙제는 회계학 공부를 마치는 것이었지요. 그 후로는 한국선교에 별로 관여하지 못했지만, 정기적으로 일신병원의 의료선교사들과 연락했고 맥켄지 자매가 호주로 돌아올 때마다 만났습니다. 1977년 부산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이십 년 동안 변한 한국의 모습에 많이 놀랐습니다. 이후 1992년과 2002년, 일신병원 50주년 기념식을 마지막으로 다녀왔지요. 부산과 그 주변의 발전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로선 1958년 한국을 떠날 때 건강 등의 문제로 다시 한국에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 4년 동안 제가 하려는 것을 다했기도 했구요. 그곳에서 일신병원의 맥켄지 자매와 에디스 칼트와의 교제는 아름다운 추억이었고, 일신병원을 짓는 기간 동안에 같이 했다는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뷰에 감사합니다.〠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신학편집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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