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GN TV 대표 조정민 목사

글|송기태,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7/31 [10:55]
▲ 고교시절 통도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시도했던 ‘늦깎이 목사’ 조정민은 방송기자 출신으로 iMBC사장을 지냈다. ⓒ크리스찬리뷰    

갈아 입은 옷

그의 이력은 상당히 구미를 당긴다. MBC 사회부·정치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뉴스데스크 앵커, 보도국 부국장,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이만한 이력이면 한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의원회관으로 직행하는 코스이다. 더구나 그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것도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바꾸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사에 입사한 것도 순전히 얼굴을 널리 알려서 정치 쪽으로 진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총선 때가 되면 얼굴이 잘 알려진 메이저 방송 뉴스 앵커들은 각 정당의 영입 영순위이다. 열세지역에 그들을 공천하기만하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특히 MBC 입사 동기생으로 그보다 앞서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던 정동영 씨가 국회의원, 장관을 거쳐 대선후보까지 되지 않았던가. 마음만 먹으면 당초 의도한대로 방송 기자의 이름을 팔아 정치권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동체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생 후반전을 달릴 복장으로 ‘목사’라는 ‘빛의 갑옷’을 입었다. 영적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조정민 목사이다. 그가 그렇게 옷을 갈아입는 데는 홍역을 앓았다.

▲MBC 뉴스데스크 앵커 시절의 조정민 목사(1996년)

“iMBC 사장을 지낸 후 50을 넘긴 나이에 보스톤에 있는 고든 코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 공부를 하는 4년이 너무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로 새벽에 교회 문도 따고 밤에 전깃불도 끄면서, 또 쓰레기도 치우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쁘냐. 그 질문에 통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안면마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아 나는 이제 끝났구나!’하고, 절망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말로 전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심장병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지금은 그 병을 잊어버렸습니다. 때로 숨쉬는 순간순간 감사하고, 쉬지 않고 뛰는 심장에 감사합니다. 들숨이 날숨되지 않는 순간이 죽음이고 심장 멎는 순간이 이별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를 필요로 하는 시간까지 살려둘 것을 믿기에 이 땅에서 맡겨진 일을 마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대략 훑어본 그의 커리어를 보면 오랜 세월 흔들리지 않은 뿌리 깊은 신앙가문에서 성장했거나 성령충만한 신앙으로 농축된 결과로 신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알기 쉽다. 그가 신학교에 가는 데에는 신앙 연륜은 5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47세까지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달려왔다.

단지 교회와의 인연이라면 온누리교회와 담 하나 사이에 둔 서빙고 신동아 아파트에 거주한 탓으로 아침 저녁 출퇴근 길에 육중한 교회 건물을 마주쳐야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온누리교회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골프연습장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회 건물이 교회와의 물리적인 접촉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을 결코 들어가지 않은 주변인이었다. 그런데 교회 안을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생겼다.


 47세에 ‘카메라 고발’ 잠입 취재하며 만난 예수

“아내가 새벽기도를 나간다기에 잡으러 간 것이지요. 아침에 와글와글 방언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게 이단 집단이로구나! 우리 집 앞에 대형 이단 교회가 있구나!’ 생각했어요. 쇼킹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정체를 밝혀서 MBC의 ‘카메라 출동’에 고발하기 위해 일 주일 동안 잠입 취재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정확히 알아보겠다고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 영어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알게 됐습니다. 사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가 밥이고 생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만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새벽 기막힌 찬송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그때까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들이 얼마나 자신을 눌렀던지.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장남으로 태어나 편모슬하에 자란 어린 시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언론인으로서의 의무감, 평생 무겁게 짓누르던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갖게 된 이후 가정에도 변화가 왔다. 그것을 트위터에 기록했다.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야…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결혼은 나의 성취가 아니라, 포기다!”

“사랑은 입술로 한 순간 말하고 일생 손발로 증명하는 삶이다!”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와 우여곡절도 많이 겪어야 했다.

“사람에 대한 요구를 내려놓은 것이지요. 철들고 나서 늘 제 주장을 말하며, 상대방이 변해야 한다고, 조직이 변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습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랬지요. 진짜 문제는 제가 바뀌어야 하는 것임을 나중에 깨닫게 됐습니다. 두 아이(2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늘 내 판단을 강요하며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큰 아이가 열네 살 때 제가 사과를 했습니다. 제가 약속을 어기고, 아이를 기준 없이 다루며 스스로 기분이 좋으면 나무랄 일도 지나가고, 기분 나쁘면 크게 나무라고 했던 것을 반성했지요. 제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아무 말 없이 한 시간을 울더군요.”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난 그는 종교와 기독교를 분별했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그것을 발견해 나갔다.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비즈니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종교를 멸하려 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부족해서 필요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그분은 종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참 신앙의 길,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자유인의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착각하던 종교인인 바리새인들은 정작 하나님마저도 우상으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첫 번째 하신 일이 성전 중심의 신앙을 삶 중심으로, 예전 중심의 예배를 삶 중심의 예배였습니다. 죽음이란 틀에 갇혀있던 무덤에서 해방하신 분, 이분을 따라가야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교회가 기준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난 것인가를 파악이 됐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얻게된 해답은 한국교회나 이민목회가 ‘병목’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 교회는 종교로서 권력이 됐습니다. 돈·명예·인기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 종교인의 길을 가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100%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야 하는 길이라면 몇이나 남아있겠습니까? 특히 현 정부가 ‘고소영 정부’로 불리면서 ‘교회=MB 정권=부정부패’라는 등식이 만들어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거나 권력화하면 무섭게 타락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침묵기에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그야말로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는 또 다른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1년 6개월이 지났을 때부터 든든한 믿음을 바탕으로 간증을 했다. 거듭나는 과정을 겪지 않아, 미지근한 데다 의심도 안 해 뭘 믿어야 할지 모르는 모태 신앙이야말로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본격적으로 죄 지을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걸 영적 교만이라고 지적합니다. 살인자나 창녀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니 돌아올 수 있지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돌아올 수가 없어요. 명확하지 않은 분은 로마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 시드니를 방문하여 시드니온누리교회 이기훈 목사(왼쪽)와 담소하는 조정민 목사 ⓒ크리스찬리뷰    
 

52세에 신학을 하다

2001년 iMBC 사장이 된 그는 회사가 흑자로 돌아서면 신학공부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엔 야간신학교에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영적 멘토였던 하용조 목사에게 의논했다.

“제가 신학도가 되겠다고 결정하고 얘기했을 때, 그분은 지난 5년 동안 기다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인내심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에 대하여 ‘하나님께는 풀타임으로 헌신해야 한다’며 미국 유학을 권했습니다.”

그 권면에 따라 2003년 사표를 내고 보스톤 고든콘웰신학교로 진학했다. 가족들도 말릴 정도였다.

“보스톤 온누리교회를 개척하면서 신학을 했습니다.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습니다. 그때는 뭘 모르고 하루 두세 시간 자면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어려운 신학, 막상 지내놓고 보니 광야가 가장 큰 축복의 시간,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 광야처럼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과 가장 친했던 시간도 드물 것 같습니다.”

광야체험은 앞서 밝힌 대로 두 차례의 심장수술과 심장약 부작용으로 안면마비까지 왔던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힘겹게 공부를 마치고 2007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에게는 좋은 멘토, 지난 해 소천한 하용조 목사와의 만남이 소중했다.

“47세 때 처음 만났는데, 제 인생의 첫 번째 멘토였습니다. 기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분이 가장 솔직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지닌 분이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제가 너무나 비판적인 질문을 해도 잘 답변해 주셨습니다. 정말 교회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도 잘 받아주셨던 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비판적인 저를 저도 잘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밀어넣어 ‘목회가 쉬운 것이 아니다. 목회가 단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연령은 5년 차이지만 영적인 아버지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하 목사님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 목사님이 CGN TV(이하 CGN)라는 방송국을 비전문가들을 데리고 하신다기에 제가 질문했습니다. ‘방송을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어떻게 시작합니까?’하니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할 수 있느냐가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느냐 아니냐? 이것이 기준이오’하시는 거예요. 그의 이 말씀이 저에게 가장 큰 유산이 되었습니다.”

 
▲ 조정민 목사  ⓒ크리스찬리뷰

CGN, 인생 후반전

귀국 후 목사 안수를 받은 그의 인생 후반전은 더 바빠졌다. 두란노서원 원장을 거쳐 2007년 6월부터 CGN 대표로 일하고 있다. 물론 온누리교회 목사로서 조용히 어려운 가정들과 특히 55~62세 가정들이 속앓이 하는 가정들을 회복시키는 일에 기도하며 섬기고 있다. “은혜의 빚을 갚은 심정으로” 소그룹 성경공부 3팀을 인도하고 있다.

“평생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걷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CGN은 글로벌 ‘열방이 교구다’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은혜의 계절’은 늦게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기독교에 비판적인 저를 일찍 불렀다면 교회나 목회자에게 굉장히 공격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일반 미디어에 훈련받게 하시면서, 아무리 비난해도, 비난하는 사람이 더 나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CGN은 2000년도에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하며 이름을 지을 때부터 관여를 했다. 그가 귀국하자 CGN은 방송과 신학이란 양수겸장의 노련한 경험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일반 방송에 비해 너무 한심하고 보잘것없고, 예산은 거의 50분의 1, 100분의 1밖에 안되는데 24시간, 일 주일 내내 여러 언어로 중남미 태국, 일본 등 12개 언어로 전세계를 커버하는 소명이었습니다. 엄청난 비전은 있는데, 돈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 갖고 하는 게 아니구나! 우리는 돈과 삶과 조직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이냐? 구원에 필요한 일이냐가 기준이다. 좋다 이미 주셨다. 주신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자. 그렇게 계속 인도하여 러시아 방송들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격히 변하니 얼마든지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전세계가 연결된, 열방 가운데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급박한 심정으로 CGN은 세상 방송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방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방송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왜 갔느냐고 하지요. 세상은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만들어도 그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방송 해도 영혼이 죽어갑니다. CGN은 복음만이 생명이고, 하나님의 메시지만이 영생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해야만 하는 방송입니다.”

CGN의 분명한 정체성, 영성, 비전을 통한 굿뉴스, 하나님 말씀의 전달, 콘텐츠도 특정인(광고주)에게 휘둘리지 않고 최고 품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 CGN만의 특장임을 간파했다. 그는 대표 취임 즉시 글로벌 컨텐츠 허브가 되겠다는 각오로 뛰었다.

“아시아존에서 싱가폴 등 기독교가 부흥하는 나라의 컨텐츠들을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중심을 둡니다. 전세계적인 선교사 네트워크로 선교사들이 서로 깨어나고 도전받고,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에 인사이트를 얻게 하는 선교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하 목사님이 시작하실 때부터 ‘선교사가 살아야 선교지가 부흥한다’면서 선교사들의 영적 재충전을 위해서였습니다. 끝까지 선교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 조정민 목사    © 크리스찬리뷰

CGN은 현재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태국어 등으로 방송되고 있다. 미국, 일본, 대만에 현지 방송국을 설립, 선교지의 맞춤방송을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CGN TV를 보는 가구는 172만 7,436가구(국내 166만 9843, 해외 5만 7593)에 달한다. 미주 지역에서는 DTV와 지상파 방송을 통해 비기독인에게까지 선교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2015년까지 12개 언어로 맞춤방송을 하고, 올해 안에 아랍어와 프랑스어 방송을 위한 기반 마련에도 박차를 가하려 한다고 했다. 인터넷, 케이블TV, IPTV, DTV, 모바일 등 멀티미디어 환경 전체를 선교 터전으로 활용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CGN 사역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방송기자로 일할 때는 많은 한계에 부딪혔지만 CGN을 섬기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을 전하기 때문에 좌절이나 낙심할 필요가 없음을 매순간 확인하게 됩니다”라고 했다.

또 그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선교의 역량을 극대화하는데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튜브나 아이폰이 차세대를 향한 가장 매력적인 선교채널임을 강조한 그는 한국교회가 차세대들에게 멀티미디어를 선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미디어와 메시지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영적 전사들을 길러야 할 것을 주장했다.

“언론인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에 갇히면 영적인 황폐를 경험합니다. 자신 안의 분노와 좌절, 절망이 어둠의 메시지를 낳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찬 언론인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토대로 한 제작과 보도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합니다.”

그는 “매스 미디어가 종식되고 이제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며 “크리스찬 청년들이 부패하고 변질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선플 운동 등 소극적인 역할을 감당하는데 그치지 말고 ‘내가 곧 미디어’라는 자각을 갖고 보다 창의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일에 동참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과거 우리가 공산주의는 모르는 채 안티 공산주의를 배웠다고 하면 대중들이 기독교의 본질은 모른 채 안티 기독교에만 노출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이해되도록 하고, 기독교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앞으로 100전 100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미디어 전쟁뿐만 아니라 영적 전쟁에서도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가올 세기의 영적인 흐름에 비춰 봐도 기독교 미디어와 크리스찬 언론인의 역할과 소명이 매우 중요합니다.”
 
▲  조정민 목사   © 크리스찬리뷰

뉴미디어 시대의 전사

그는 25년 동안 언론인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는 사람이 학교였고, 사람이 직업이었고, 사람이 선물이었다. 그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새로운 공동체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늘 말하고 주장하던 기자가 늘 말을 듣고 섬기는 목사가 되어 또 하나의 섬김으로 트위터를 시작했다.

트위터 2010년 5월 3일 처음 들어가니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트위터가 노방 전도를 대체할 있는 새로운 도구가 될 것을 확신했다.

“안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코드로 다가갈 것이냐? 어떤 말로 다가갈 것이냐?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코이네 그릭’에서 쓴 5천여 개의 단어가 지금은 어려운 말이지만 그 당시 시장에서 쓰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그러면서 사상이 담긴 말, 또 하나 30-40대가 즐겨 읽을 수 있는 말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나도 직장인이었는데 직장에서 고통받는 젊은이들한데 오아시스처럼,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명수처럼 다가가자. 좋다. 이 시대의 잠언록을 한 번 써보자!’하는 각오로 ‘하나님, 솔로몬에게 3천 절의 잠언을 주셨는데, 저에게도 주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두 줄 정도씩 묵상한 쓰다보니 두 줄로 압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훈련 뉴스 앵커하면서 글을 줄이는 연습을 시키셨습니다. 뉴스를 쓴다는 게, 센텐스 12~14줄로, 1분 20초 안에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도 리포트 해야 합니다. 앵커하면서 메인 아이디어에서 어떤 복잡한 사안도 압축하는 훈련을 많이 받았으니 140자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떠오를 때 짧게 쓰는 게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가 되어 제일 고통스러운 길게 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다시 말 줄이는 훈련을 하겠다고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트위터에서 팔로워들과 나눈 ‘잠언’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1,700절이 쌓이자 365개씩 추려서 두 권의 책으로 냈다. <사람이 선물이다>와 <인생이 선물이다> 바로 그것들이다. 현재 8만여 명 트위터 팔로워를 가진 그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SNS 광장에 대해서도 진단했다.

“SNS를 돌아다니면서 확인한 것은 우리 시대의 타는 목마름입니다. 메시지는 갈수록 범람하지만 물밀듯 밀려드는 그 메시지가 오히려 마음을 힘들게 하고 움츠러들게 합니다. 그 많은 메시지가 사람에게 힘을 주고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사람에게 생명을 부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품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위해 눈물짓는 생명의 메시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다지도 거칠고 황량해진 것일까요?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인생을 내가 시작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이 결코 우리 자신만의 의지로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인생 전체는 내가 받은 선물이기에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더 나아가 기쁨을 함께 누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기를 권했다.

그는 이 메시지들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로 가서 다른 이를 품고,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트위터는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동시성이 있고 파워풀한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걸러지지 않은 정보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것은 조심해야 할 듯 싶습니다. 쌍방향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일방적 형태이고 지명도에 따라서 빈익빈 부익부라는 지적도 있지요. 말을 줄여야 하니까 어법도 파괴가 많아지고 상대방에 대한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것도 아쉽습니다.”

그는 뉴미디어를 통한 새로운 목회의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책을 내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하는 것 자체가 목회인 시대가 왔습니다. 올드 패러다임이 아니라 새로운 메시지의 신앙이 탄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메이저 미디어 전체를 비기독교인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디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미디어 전사, 미디어 게릴라’의 양성이 시급합니다.

무엇보다 기독 언론인들이 철저히 복음적인 신앙관에 투철해야 합니다. 기독 언론인은 복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신앙적 관점을 넘어서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메가 솔루션이라는 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 절대적 진리가 부정되고 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언론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주어져있는 상황을 전하는 것 외에 아무런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사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습니다.”

 
고교시절 출가할 뻔

‘늦깎이 목사’인 조정민 목사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부산 명문인 경남고등학교 재학 중일 때 양산 통도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시도했다. 그는 “할머니, 어머니가 통도사에 다니셨기 때문에 불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고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로 돌아온 그는 재수를 거쳐 연세대에 들어간다. 방송기자 초기에 그의 말투에 남아 있던 경상도 억양이 문제가 됐다.

“발음과 억양을 고치지 못해서 동기생(정동영, 강성주, 구영회, 배귀섭 등)들보다 한발 늦었죠. 대학원까지 마치고 왔기 때문에 한발 앞서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어요. 제 뜻과는 달리 사회부 경찰 기자 생활을 6년이나 해야 했어요.”

그는 오전 4시에 나가 경찰서를 돌며 삶의 바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게 만났다. 당시는 그게 너무 힘들었지만 나중에 살아가는 데 큰 버팀목이 돼줬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경찰기자 시절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83년 대한항공 비행기가 옛 소련군의 미사일에 맞아 격추됐을 때 일본 홋카이도 왓카나이에 급파돼 맹활약을 했다.

“당시 서울시경을 출입할 때인데 대한항공 전용기로 급하게 가서 한 달간 취재를 했어요. 일본어를 못할 때여서 교토통신 기자가 영어로 적는 것을 한글로 번역해서 송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엔 걸프전 취재를 하느라 39일간 지국 사무실에서 숙식을 했다.

“아내가 집에서 가져온 국물에 코피를 쏟을 만큼 강행군이었는데, 경찰기자 시절을 생각하니 견딜 수 있었어요.”

호주는 김영삼 대통령 국빈 방문 때 취재 차 왔었고, 2000년 밀레니엄 특집, 생태마을 브리스번, 시드니 등지를 돌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인생 전반전엔 한 순간의 여유도 없을 만큼 매스미디어 현장에서 숨가쁘게 살아온 그는 이제 새로운 하프타임에서 ‘뉴미디어의 전사’로 신발끈을 조여매고 있다. 마지막으로 호주 교민들에게 부탁했다.

.“시드니나 브리즈번 등 호주 전체를 보면 참 광대한 지역이지만 영적으로는 더 채워저야 할 나라입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 텐 포티(10-40) 윈도우를 품어야 할, 영적으로 좀 깨어나야 할 나라입니다. 단순한 이민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처럼 열방을 품는 교회가 되어야 마지막 시대 얼마남지 않은 긴박감을 갖고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1.5세 2세들이 땅끝을 품고 나아갈 때 한국에서 나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없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한인교회들이 더 깨어나고 연합해서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바울같은 사람, 훌륭한 담임목사도 파송하여 단순히 이민자들의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를 배출해 내기를 바랍니다.

디아스포라 교회들의 소명 가운데 하나는 주류 교회를 깨우는, 한국 크리스찬들의 선교의 열정, 기도의 영성이 그들에게도 전해져 그들을 깨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글|송기태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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