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은 인간의 공통된 소망이다. 부요한 삶, 성공의 삶은 현대인의 꿈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복과 부요함, 보장된 성공의 자리를 포기한다. 그저 광인이 되어 사명을 위해 산다. 그 사명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미친 듯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올인하게 만든다. 갑작스런 자연 재해나 뜻밖의 사고,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있지만, 귀한 생명을 복음을 전하다가 바친 사람들이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후세에 많은 기독교 리더를 키워낸 순교자들이 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로 작정했다면 마지막 길은 편안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의 자리였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의 총칼에 살해당하는 비참하고 억울한 순교도 있었지만, 어떤 이의 순교는 긴 순교였다. 긴 순교자들은 이 땅에 살아 있으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보장된 성공과 부요함을 포기하고, 보장된 직장을 포기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가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헌신한다.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만큼 귀히 여긴다. 그래도 이들의 헌신과 수고를 매스컴은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긴 순교자들은 변함없이 성실하게, 버림받은 영혼들을 내 자식처럼 돌보며 땀을 흘리고 핏방울을 흘린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의 시작은 불순종이며 그 마지막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힘이 있다. 죽음은 활력과 생명을 잃게 만든다. 꿈과 소망도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인생의 종착역이 아님을 알려준다. 부활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단과 천국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대부분 짦은 순교를 두려워하고 긴 순교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짧은 순교는 피를 흘릴 뿐이지만, 긴 순교는 피 흘림보다 더 큰 고통이 있어 누구나 긴 순교를 할 수 없다. 아니 부요함과 성공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긴 순교는 어떤 이에게 환상일 뿐이다. 행복과 성공을 뒤로한 채 무명으로 산다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긴 순교를 포기하고 싶을 때 미친 듯이 시작했던 그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 걸어가는 그 길의 마지막 종착역을 바라보아야 한다. 순교의 길이 어렵다고 느낄 때 왜 시작했는지, 왜 가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어도, 이룬 것이 별로 없어도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긴 순교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어 있다. 환경에 쉽게 위축되지 않는다. 또한 어려울 때 사단의 공격을 알아야 한다. 순교자의 삶을 살아갈 때 개인적인 삶, 가정의 삶, 직장과 목회현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생긴다. 이때 질문해야 한다. “악의 공격이 아닐까?”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문제보다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고 기도와 금식하며 씨름해야 한다. 하나님의 싸움이 우리 싸움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상황을 바꾸어 주셔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신실함을 지켜야 한다. 사명을 붙잡고 끝까지 가야 한다. 이것이 사단도 더 이상 손 댈 수 없는 힘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이 나를 부르신 신실함, 교회를 부르신 신실함,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신실함을 끝까지 붙들고 완주해야 한다. 나의 꿈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꿈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나 긴 순교자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보장된 행복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으며, 때론 살아생전에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은 오늘도 긴 순교의 길을 가는 신실한 사람이다. 강승찬|시드니새생명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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