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특별 기고

이제는 선교의 빚을 갚을 때입니다 - Gratitude and Privilege -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30 [14:38]
▲ 경남성시화운동 본부 대표회장 구동태 감독이 호주연합교회 맥크레이 총회장에게 감사패와 호주 순직 선교사 묘역 완공 기념 앨범을 증정했다. ⓒ Christian Review   

 

호주인 최초의 한국 선교사 데이비스 

나는 시드니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 데이비스(Joseph H. Davies) 선교사와 엥겔(Gelson Engel) 선교사의 육필일기 「쥬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아 주쇼셔」(크리스찬리뷰, 엮은이 권순형)를 읽고 있었다.

비행기로 10시간 남짓 걸리는 머나먼 길을 어떤 마음과 어떤 느낌으로 떠났을까를 알고 싶어 한숨에 책을 읽어내려갔다.

32살의 청년이었던 데이비스 선교사에게는 가장 은혜스러운 이름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호주인 최초의 한국 선교사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이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그런 명칭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신을 부르시고 세우신 이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길을 떠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콧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신선한 여행길이었다.

배라는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을 갖는 긴 여행행로를 평안한 마음으로 즐기는 여유가 보여서 좋았다. 아마도 사도 바울도 선교 여행을 다닐 때 이런 넉넉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여행을 즐기지 않았겠는가?

데이비스 선교사가 1889년 10월 2일 드디어 부산항에 도착하였고, 10월 4일에는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바로 그의 복음 사역은 불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특별히 교육사역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인도에서 선교할 때에도 학교를 통한 선교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미션 스쿨을 세워 교육을 통한 선교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인도 부모들이 선교사들의 미션스쿨에 아이들을 보내면서도 신앙은 못받아 들이게 했다. 이때 그는 그런 간접적인 선교만으로는 심령을 바꾸어 놓기엔 문화의 힘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데이비스 선교사는 교육을 통한 선교에 희망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직접 복음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조선에서는 순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영적전쟁의 승리가 성령의 도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면서 복음의 불길을 되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익히자마자, 거리 전도자로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길을 다니면서 지역주민을 직접 대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겁도 없이 노랑머리에 하얀피부와 파란 눈을 가진 이방인이 노방전도자로서 나선 것이다.

그가 쓴 선교 일기(3월 26일)를 보게되면, “아침 6시 30분에 문을 막아 놓고서 헬라어 성경을 꺼냈는데 내 시선이 멈춘 첫 말씀이 `우리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였다(고전 4장 9절)... 결국 나는 나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그들을 돌려보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나를 실컷 구경하게 했다.”

또한 그의 선교보고를 보면, 데이비스 선교사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쪽지를 주고, 복음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어도 너무나도 기뻤다” 그의 선교 보고 편지에 나타나 있다.

데이비스의 삶은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뒤로한 복음전도자였다. 그는 문자 그대로 온몸을 바쳐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 데이비스 선교사의 일기 (3월 26일) ⓒ Christian Review    


복음의 씨앗 

19세기 말 한국땅은 무지와 몽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굶주림과 헐벗음, 한 번 전염병이 만연하면 수만 명씩 떼죽음을 겪으면서도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에게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핍박이었다. 120여 년 전 한국 땅은 ‘예수’라는 이름만으로 치를 떨었었다. 믿음을 가지기는커녕, 그 이름만 올려도 목숨을 잃었다. 예수를 금하는 국법은 엄하고도 철저했다.

1866년 병인년의 천주교 박해 때는 9명의 프랑스 신부를 비롯하여 8천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을 당했다. 비록 1880년대 초 구미 열강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그동안 굳게 닫혔던 쇄국의 빗장이 열렸지만, 데이비스 목사가 한국에 온 1889년에는 아직도 조선사람들의 정서는 ‘예수’는 끔찍한 이름이었던 때였다. 󰡐예수󰡑라는 이름은 수많은 사람의 목이 떨어져 나간 것을 기억나게 하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5개월의 시간을 서울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 준비를 마친 데이비스 선교사는 드디어 부산으로 향했다.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거쳐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에 도착한 지 이틀만인 1890년 4월 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국에 온 지 6개월이 되는 시간이었다.

인간의 시각으로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가 멜본을 떠나 뱃길에 오를 때만 해도 그는 선교의 비전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어찌 선교의 꽃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질 수 있는가?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젊은이의 죽음을 통해 한국선교의 길을 열었다.

그는 꽃이 아니라 씨앗이었다. 복음의 씨앗이었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씨앗으로 모든 세상을 살리는 기초가 되었듯이 말이다. 그는 예수님의 나이와 같은 33세에 주님 곁으로 갔다. 그의 죽음이 호주교회의 젊은이들의 마음에 선교의 불을 질러 놓기에 충분했다. 호주 장로교회는 한국선교를 결의하고 그 이후 13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것은 젊은 종 데이비스 선교사의 희생의 결과였다.

 
나환자들의 아버지 맥켄지 선교사 

나는 과거에 부산에서 잠시 머물며 엥겔 선교사가 세운 수안교회에서 목회를 배웠고, 헬렌 맥켄지(Helen Mackenzie)가 세운 일신기독병원을 방문하여 자랑스런 호주 선교사들의 헌신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부산 끝자락인 감만동에 자리잡고 있는 나환자들을 위하여 세워진 상애원이었다.

James Noble Mackenzie(한국명 매견시), 곧 헬렌의 아버지로서 1912년 5월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름 지어지고 활성화되었다. 당초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어빈(Irvin)에 의하여 부산 감만동에 자리를 잡았었다. 그러나 1909년 부산지역이 호주장로회 선교구역으로 정해져 운영권이 호주선교부에 이관되었다.

맥켄지는 목사와 의사로서 상애원 환자들에게 쏟은 정성이 지극하였다. 1911년 40명의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1938년에는 600명으로 늘어났다. 1930년대 전국의 나환자 수는 2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3에 해당하는 6~7천 명이 경상남도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맥켄지의 상애원 운영은 더 큰 관심과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에게 삶의 여건을 개선하고 약물 치료를 통하여 사망률을 감소시키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였다. 1917년부터 피하주사(대풍자유)를 사용한 이후 25%의 환자 사망률을 2%로 줄이는 놀라운 성과도 거두었다. 상애원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활하는 생활공동체 기능과 신앙 수련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공동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31년 한국에서 의사면허증을 받았으며 나환자를 위하여 평생을 몸 바친 삶에 대하여 "나환자들을 위한 선교사역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침울하고 맥이 빠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진실로 세월이 지나갈수록 나환자 가운데 살면서 사역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선교 사업은 없다"고 했다. 그 후 1939년 6월 30일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하여 1956년 7월 1일, 91세로 별세하였다.


지상 최대의 주님의 명령
 
또한 지난 해에는 현재까지 힘 있게 성장하고 있는 창신학교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교육 발전을 위해 수고한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볼 수 있었다.

부모를 떠나고 친척과 친구들을 등지고 자신이 공들여 쌓아왔던 명예와 전문직을 내버리고 뱃길로 마차로, 여러 달 걸리던, 땅끝, 조선을 찾아왔던 호주 선교사들의 순종의 삶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주님의 명령이었다. 바로 선교라고 하는 지상 최대의 주님의 명령이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기억상실증, 하나님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린 모든 인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도바울은 이런 말을 했다. “차라리 내가 더 빨리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주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기를 원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래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생각처럼 빨리 죽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이처럼 오래 살도록 남겨 두신 이유는 선교 명령을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사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이다.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이 명령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누구를 사랑하고 전도하는 것은 내 인격과 내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이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선교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선교 명령이다.

내가 왜 존재하며, 공부하며, 사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한다. 우리는 선교하기 위해 지금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왜 목사가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다. 선교를 하라고 하나님께서 목사로 세우셨음을 믿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단세포적으로 말한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흑백 논리로 말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병들었든지, 건강하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하든지,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 모두는 선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한국 행사들 

이번에 필자가 속해 있는 교단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총회장을 모시고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교단차원에서는 서울 소망교회에서 있었던 120주년 기념예배를 시작으로 한·호 선교 120년 기념행사들이 시작되었다. 내가 참여하였던 행사에 관하여 참석기를 시간적으로 써내려 가도록 하겠다.

사실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을 위한 공식적인 행사는 지난 2009년 7월 17일 금요일에 여의도에 있는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있었던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및 「쥬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아 주쇼셔」 출판 기념 감사예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과 다수의 한국 기독교 국회의원들 그리고 전 미 상원위원과 호주대사까지 참여하여 축하를 하였다. 바로 지난 120년 동안 호주 선교사들이 폐허와 절망의 땅을 새로운 소망의 땅으로 바꾼데 대한 헌신과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호주대사 샘 게로비치는 축사에서 호주가 한국에 복음의 빛을 전해주고 한국전쟁에 일조를 하였는데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한호 관계가 선교에서뿐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방면에서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말로써 호주의 선교사들의 헌신을 더욱 돋보여 주었다. 호주 시민권자로 살아왔던 나에게도 고맙고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

 

▲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사진전이 시드니와 멜본 등 8개 지역 교회에서 개최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Christian Review  

 
시드니 기념대회

10월 2일에는 열린문교회에서 환영 및 감사예배를 드렸다. 세련된 예배당에서 잘 차린 식탁을 대하면서 참으로 고마운 마음을 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첫째는 많은 선교사들을 모실 수 없었다는 안타까움이었고, 둘째는 참여한 소수의 선교사들에게조차 시간을 드려 그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격려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행사 내내 가졌다.

한국에서 흔하게 보는 일이지만 정작 주인공인 선교사들은 뒷전에 두고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대부분의 순서를 맡아 지루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설교를 맡은 통합측 총회장은 영어로 설교를 하는 시도는 좋았으나 그로 인해 모든 행사를 준비한 호주 준비위원들이나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의 말조차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10월 3일 토요일에는 시드니제일교회에서 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정병준 박사, 이덕주 박사, 변조은 박사 등 3인의 강사들이‘해방이전의 호주선교사들의 활동과 선교정책 연구’ 그리고 ‘왕길지 교수를 중심으로 한 호주선교사들의 신학사상’ ‘한·호 선교 120주년 역사 평가와 전망’ 관해서 특강을 하였는데 과거 호주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 현대 한국교회 선교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너무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10월 4일 주일은 동산교회에서 기념예배를 가졌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예배였다. 성령님이 분명히 기뻐하셨으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설교를 맡은 호주연합교회 총회장 앨리스터 맥크레이(Rev. Alistair Macrae) 목사의 설교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Small resources, great need, faithful God"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께서 한국 선교에도 함께하셨다는 말씀이었다.


▲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시드니대회가 동산교회당에서 열렸다. ⓒ Christian Review    


멜본 기념대회 

10월 10일 토요일에는 멜본 한빛교회에서 감사잔치가 벌어졌다. 말 그대로 너무도 준비가 잘된 잔치였다. 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참여하여 몹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밤이었다. 영어로 사회를 진행하는 김윤상 목사의 멋진 진행은 감동을 주었다. 모인 모든 선교사들이나 그 자녀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신들의 한국에서의 선교에 대하여 간증하였다. 선교사들의 입으로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참으로 행복을 느꼈다. 

이날 그 자리에 참여했던 몇 명 안되는 한국 목사들을 앞으로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선교사들에게 한국식으로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시로 큰 절을 하도록 하였다. 선교사들에게 갖고 있던 가슴 벅찬 감사의 표시를 큰 절로나마 할 수 있어서 참으로 기뻤다.

10월 11일 오후에는 멜본 어번연합교회에서 마지막 기념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은 바로 멜본 교회들이 연합하여 지난 1년 동안 준비한 동영상이었다. 동영상의 내용은 지금껏 살아계신 32분의 선교사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영상이었다. 참으로 수고하고 애쓴 모습이 역력한 멜본 한인교회들의 연합에 감사를 드린다.


▲ 열린문교회에서 개최된 환영 및 감사예배에 참석한 호주 선교사들과 가족들. ⓒ Christian Review    

 
감사와 특별한 은혜

이번에 호주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바로 “Gratitude and Privilege” 였다.

선교사들은 세 가지로 감사를 하였다.

첫째는, 연약한 자신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둘째는, 한국사람들에게 감사를 하였다. 자신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인데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마치 천사처럼 맞아 주었다는 것을 감사하였다.

셋째, 호주 교회에 감사를 하였다. 자신들이 선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쉴 곳을 주었고,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 주었음에 감사를 하였다.

이번에 모든 행사에 참석하면서 내가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도 같았다. ‘감사와 특별한 은혜’ 였다. 오래 전부터 한국 땅에 와서 복음과 더불어 수많은 사랑의 손길을 펼친 선교사들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또한 내가 30년을 넘도록 시드니에서 살면서 호주로부터 받은 사랑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20년 전 호주연합교회 목사로 세움 받고 목회를 시작할 때 받은 사랑은 셀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마음에 새겨진 복음의 빚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선교의 빚을 갚을 때라는 사실이다. 내가 살아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평생의 빚이다.


▲ 지난 7월 17일 제헌절에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및 출판기념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국민일보  

 
지난 7월 17일 여의도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있었던 출판 기념회에서 설교를 한 박종순 목사의 말씀이 기억난다.

“지금 전 세계를 선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0만 명의 선교사들이 필요한데 우리 한국교회가 10만 명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서 닿았다. 지금도 각 한국교회들이 선교에 열심을 내지만 지금보다 더욱 힘을 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시는 기대가 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한국교회를 사랑하심이라 여겨진다.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 행사에 참여하며 다시 한번 선교의 사명을 깊이 깨닫는다. 이제 빚을 갚아야 하겠다. 우리가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세워주심에 감사를 드릴뿐이다. 눈을 들어보면 우리가 선교를 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 호주내에서든지, 한국에서든지, 중국이나, 필리핀 등 세계 곳곳이 다 우리의 선교지가 될 수 있다. 이제 빚을 갚으러 떠날 시간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변화시키를 원하신다. 세상을 섬기는 교회, 가장 큰 섬김은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교에 더욱 최선을 다하는 멋진 호주 교회와 한국교회를 꿈꾸며 기도한다.☺


▲ 멜본 어번연합교회에서 열린 기념대회에 참석한 필자 최승일 목사와 최경희 사모. 멜본순복음교회 박종환 목사가 함께 했다. ⓒ Christian Review  



글/최승일 상도교회(서울) 담임목사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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