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복음은 ‘부활의 복음’이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으신 예수를 증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했다. 사도들이 부활을 증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외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Lord)’이라는 사실을 설득하고 선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Lord)이 되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롬14:9). 결국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황제, 즉 시저가 주인이라는 고백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고백을 하였고 핍박 속에서 순교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호주를 비롯한 신앙의 자유가 있는 지역의 교회들은 엄청난 위기를 맞이했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삶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21세기 교회를 진단해 볼 때, 세속화된 교회, 크리스찬 무신론자들이 가득한 공동체로 변질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개인의 기분과 감정에 더 충실하고, 순수한 믿음의 동기보다 악할지라도 큰 열매를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다. 큰 죄를 지어도 유명한 목회자에게는 면죄부가 적용되고, 죄라는 단어보다 스트레스라는 말을 더 선호하며, 사람들에게 진정한 회개를 요구하는 대신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세상의 이치를 적용하여 죄를 묵인하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대형화된 공동체일수록 복음을 위해 헌신된 예수제자보다 팬들이 가득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역사가 있는 교회들은 기독교 전통을 중요시하는 박물관으로 변해 버렸고,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교회의 위기를 느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을 시키고, 영적 대각성을 위해 집회를 가져도 사람들은 잘 변화되지 않는다. 때론 변화된 사람들도 다시 옛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정말 이 시대에 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일까? 역사의 간격이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우신 초대 교회는 성령께서 이끄신 교회였고, 생명력이 있는 공동체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변화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 밖에는 없었다. 초대교회의 원형 복음은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이시요,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복음의 핵심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와 성도들의 주인이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승부수는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었다. 그래서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증거’(행17:31)로 주신 하나님의 승부수였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학식이 풍부한 자도, 무식한 자도, 주인도, 종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증거는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며 기독교의 최고봉이며 기독교의 심장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마귀의 일을 멸하셨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셨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엡3:6).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마28:20). 우리의 마음 눈이 밝아져서 부활과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 집중하며 새생명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부활은 지금도 하나님의 승부수이다. 〠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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