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성경신학의 중요성 (2)

커리큘럼으로써 성경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4/29 [11:56]
지난 호에 우리는 주일학교 교육은 많은 내용을 한 번에 전달해 효과를 보기보다는, 치밀한 체계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신학적 내용과 초점), 장기적으로 조직적으로 분산배치 교육하는 것(커리큘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자라지 않는 신앙생활

물론 분산배치에는 잊기 쉬운 핵심을 적절히 반복하고, 영적 긴장이 풀려질 때마다 부흥회나 선교여행 같은 일시적 자극으로 동기부여를 주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교육에 동원되는 모든 내용과 도구들이 서로 치밀하게 잘 조율되지 않고서는 인력적, 자원적 낭비가 많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이런 체계와 목적을 정하고 움직이는 현장이 많지 않다. 때문에 주일학교뿐 아니라 장년도 ‘자라지 않는’ 신앙생활에 대해 하소연 할 때가 적지 않다. 주일학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발견될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교회 전체가 추구해온 신학적 체계와 초점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하시는 ‘건강한’ 기회다.

이 문제의 뿌리는 신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인별로는 뛰어난 신학교수진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자체가 뚜렷한 틀이나 방향도 없거나, 있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엮어낼 틀이 없이 허겁지겁 졸업하는 신학생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신학교에서 시험으로 챙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장에서 담임목회자나 장로 같은 지도자들이 나서서 현장과 씨름하며 멘토해 줄 때 제대로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커리큘럼을 만드는 데 장기적이고 장기적인 내용 배치 문제는 목회적 감각이 요구된다. 신앙의 기본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기본이고, 교인들의 영적 상태나 상황에 따라 더 강조하고, 보강할 내용을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즘처럼 교회 내 윤리나 이단 문제가 커지는 상황에서는, 이에 대한 환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전체 틀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윤리나 정통신앙고백을 강조한다고 해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 겸손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 소홀히 돼서는 안된다. 영적 문제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요즘처럼 신학이 교회성장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며 우습게 보는 분위기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인기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거창한 시설 아래서 12년간의 주일학교를 거치고도 복음도 모르는 아이가 넘쳐나고, 많은 업적을 만들며 20년을 제직으로 뛰어다녔지만 영적 성숙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교인이 흔한 현실을 보며 과연 하나님은 뭐라 하실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학적 틀은 무엇을 사용해야 할까? 칼빈, 웨슬리, 재세례파신학 같은 교리신학을 활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이런 교파적 고백들은 교파 장벽을 넘어 서로 배울 수 있는 점을 놓치기 쉽고, 평신도 교사가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를 가장 좋은 대안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바로 성경이다.
 

오직 성경으로

이것은 개신교의 뿌리와도 관련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눈에 보이는 교회나 전통에 의지할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러기엔 타락한 인간의 본질과 흠결이 교회나 전통 곳곳에 너무 깊이 배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성경’과 이를 내 것으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문제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이런 발견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체 지내왔다는 점이다. 사회적 문맹정도가 심했던 과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대중교육의 혜택을 받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불필요할 만큼 복잡해진 신학도, 개신교 안에 스며든 카톨릭식의 성직우월주의 같은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

이 점에서 현대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유산인 ‘오직 성경으로’ 정신을 실제로 성도의 삶 속에서도 회복시켜야 할 숙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교회나 전통이 아닌, 우리 각자와 인격적으로 만나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성도가 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 성숙에 필요한 자극과 지혜를 꾸준히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읽어나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것은 장년과 주일학교 모두에게 적용되는 숙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과연 우리가 성경을 나와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하나님의 계시로 읽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더 이해해 가고, 또한 복음으로 계속 돌아가 자신을 비추도록 읽혀지는가?

주변에 많은 ‘성경읽기’방법들이 소개되지만, 역사적 맥락, 주인공 심리, 윤리적 교훈에 조명을 맞추는 수준에 머무를 때가 많다. 이런 식의 성경읽기로는 다른 고전을 대하는 감흥이나 교훈과 그리 다를 수 없다. 성경이 복음을 채우고, 복음을 드러내고, 복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될 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끊임없이 자라는 일도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성경읽기 방법을 호주 신학계에서는 ‘성경신학적’ 성경읽기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신학교에서 성경신학이라고 하면 ‘성경 각권의 문학적 맥락이나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사용할 성경신학이란 말은 ‘성경을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내용으로 읽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호에는 바로 이 성경신학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계속>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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