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불꽃이 되어-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존 뉴튼(John Newton: 1725-1807)의 생애에서 얻는 교훈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7/02 [11:55]
 
본란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브리서 13:7)의 말씀에 따라, 이천 년 기독교 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여러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합당한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다.<편집자>
 
1748년 3월 21일, 그레이하운드 호는 1년여 동안의 일을 마치고 북대서양을 통하여 잉글랜드로 항해하는 중이었다. 23살의 청년 존 뉴튼은 여느 때와 달리 이상스럽게 불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는 잠결에 선실에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
 
배안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갑판으로 달려 올라가자 선장이 그를 멈추어 세우고 그에게 펌프질을 시켰다. 그보다 먼저 그 일을 하던 선원 한 사람이 큰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안 되면 이제 끝장이다. 하나님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속으로 되뇌며, 새벽 3시부터 정오까지 정신없이 펌프질을 해댔고, 그 후 다시 배의 조타 장치에 붙어서 자정까지 사력을 다하여 배를 움직였다. 그런데,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의 역사가 그의 영혼에 임하였다.

이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그 자신의 지나간 인생과 영적인 상태에 대한 생각이 떠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튿날 저녁 6시경이 되자,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살아날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향해 임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으나 믿음의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를 아버지라 부를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불신앙적인 생각이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게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짐을 뒤져서 급히 성경을 찾아내어 읽었다. 누가복음 11:13(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에서 큰 위로를 얻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본문의 약속도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이 책을 기록한 그 성령이 필요하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했으니, 내가 그것을 달라고 구해야겠다. 이것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가 반드시 자기의 말씀을 이루실 것이다.”
 
응답
 
남은 항해 기간 내내 그는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성경을 좇아 기도했다. 4월 8일 그레이하운드 호는 아일랜드에 닻을 내렸다. 훗날 뉴튼은 이 당시 두 주간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 내게 응답이 임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의 진리 그 자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마음에 생겼고, 그것이야말로 내 모든 필요를 정확히 채워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내게 전능하신 주님이 절실히 필요했고, 신약 성경이 말씀하는 바로 그 분을 찾은 것이다.

이제 나는 불신앙자가 아니었다. 과거의 모든 세속적인 삶의 자세를 마음으로 다 버렸고,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고, 분에 넘치는 자비가 내게 임했다는 확신으로 가득하였다.

과거에 잘못 산 세월이 정말 후회스러웠고, 즉각 삶을 변혁시켜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툭하면 저주를 퍼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마치 제2의 본능처럼 삶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습관에서 정말 자유로워졌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면에서 새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의 작자 존 뉴튼은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신앙생활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출생과 성장
 
존 뉴튼(John Newton)은 1725년 7월 24일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신앙에 별 관심이 없는 근엄한 사람으로 지중해를 오가는 무역선의 선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지극히 경건한 신자였고, 그의 아들을 참된 신앙인으로 키우는 것을 자신의 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날마다 아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주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암송시켰고, 위대한 찬송작가 아이작 왓츠(Isaac Watts)의 찬송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을 쏟아 부었다. 이런 어머니의 열정에 힘입어 존 뉴튼은 4세에 이미 글을 쉽게 읽을 정도가 되었고, 4세부터는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한 가르침은 그가 7세 되던 해에 어머니의 사망과 더불어 끝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스트랏포트(Stratford)의 학교 기숙사에 보내졌으나, 기숙사 사감의 무자비한 학대로 인하여 책과 공부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그는 10세에 그 학교를 떠났고, 결국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지 2년 만에 학교와 완전히 결별하고 말았다.

11살부터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나가 높은 파도와 싸우는 뱃사람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18세가 되기까지 다섯 번이나 지중해 항해를 했다. 이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며 나를 설득하였으나 정작 아버지는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내게 아버지는 두려움과 복종의 대상이었다. 그의 근엄한 자세가 내 마음을 주눅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1742년 12월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켄트(Kent)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에 그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본래 그는 속히 런던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옛날 어머니의 임종을 맞은 집이 켄트에 있었으므로, 그 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또한 어머니의 옛 친구들에게도 인사를 드리고픈 마음이 간절하였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그들을 찾아 반가운 해후를 누렸다. 어머니의 친구에게 두 딸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중의 언니인 메리 카틀렛(Mary Catlett)을 어머니가 생전에 미래의 그의 신부감으로 지목했었던 것이다.

그는 첫눈에 메리에게 반하여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열일곱 살이었고 메리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으나, 메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고 끊임없이 그 사랑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는 그때의 일에 대해, “1742년 12월 12일은 정말 기념할만한 날이었다. 그날의 사건이 나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라고 말하였다.
 
방탕과 죄악된 생활
 
그리고 얼마 후부터 시작된 방종한 생활 속에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은 마치 캄캄한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별처럼 은은히 그에게 빛을 밝혀 주었다. 그는 훗날 술회하기를,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감히 말하자면, 그 후에 온갖 비참하고 악한 일들을 다 경험하였으나 그 어느 때에도 그녀에 대한 생각이 한 시간 이상 내게서 떠난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 후 베니스로 간 그는 거기서 방탕하고 죄악된 생활에 빠졌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자각이 이따금씩 생기기도 했으나 이내 다시 어쩔 수 없이 죄악된 생활 패턴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하였다.

1743년 12월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켄트로 내려가 메리와 함께 보내며 거기서 오랜 기간을 머물렀다. 이 일 때문에 화가 난 아버지는 그를 강제로 다른 배의 선원으로 만들어 바다로 내어보냈다.

1744년 12월, 그의 배가 동인도로 출항하기 위하여 다운스에 정박하자, 그는 무조건 켄트로 향했다. 일 년 동안 괴로움에 찌들어 있던 그는 떠나기 전에 메리를 꼭 만나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약속된 귀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그는 그 일로 선장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이후 더욱 더 혹독한 생활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생활을 견디지 못한 그는 배를 버리고 도망하다 붙잡혀서 온갖 고초를 다 겪기도 했다.

이 시절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는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조금도 없었고, 양심의 가책도 전혀 없었다. 오로지 메리에 대한 사랑만이 내게 마지막 남은 유일한 절제 수단이었다.”
 
처참한 노예생활과 영적 죽음의 상태
 
1745년 말부터 그는 악독한 선주(船主)를 만나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동쪽의 작은 섬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극한 시련을 겪었다. 선주의 흑인 여자 정부는 그를 미워하여, 자기가 먹고 남긴 접시를 핥아 먹게 하기도 하고, 사슬에 채우고 다녔다.

선주가 여행을 떠나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면, 그를 갑판에 사슬로 묶어 놓기도 하고, 선주의 식탁에서 먹다 남은 닭의 내장을 그에게 던져주고 그것으로 생선을 잡게 해서 주린 배를 채우게 하기도 했다. 그의 처지가 얼마나 처참했든지, 심지어 흑인 노예들이 자기들의 초라한 양식을 몰래 가져다주는 일도 있었다.

거의 일 년 동안 처참한 노예 생활을 하던 중, 다행히 선주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그는 노예 수용소를 관리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극적인 사건을 통하여 자유를 얻게 된다.

섬 근처를 지나가던 배가 섬에서 피운 연기를 보고 닻을 내렸는데, 그 배의 선장이 존 뉴튼의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747년 2월이었으니 그가 아직 만 22세가 채 되기도 전이었다. 그 배는 금과 상아 등을 실었는데, 화물을 가득 채우려면 아직 일 년 이상 여러 곳을 더 다녀야 했다.

그는 선장실에서 기거하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배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이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술에 취한 적은 거의 없었으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등 그의 죄악된 행위는 극에 달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렇게 대담하게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사람을 나 자신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욕이나 저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날마다 새로운 욕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심에서 울리는 경고도 날로 희미해져갔다.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마음의 동요도 전혀 없었다. 영적 무감각함, 아니 영적 죽음의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배는 이윽고 케이프 로페즈(Cape Lopez)를 지나 귀환 항해를 시작하였다. 서쪽으로 브라질 해변을 바라보며 북진하다가 뉴펀들랜드(Newfoundland) 해변을 지났다. 그리고 3월 1일 드디어 대서양의 망망대해로 들어섰고, 거대한 조류와 싸우는 힘겨운 항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3월 9일, 그는 선실에서 토마스 아캠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전기를 발견하고는 별 생각 없이 한가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일들이 참말이라면 대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그 책이 주는 강력한 도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 책을 던져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이제 가까이 오고 있었다. 이제 파란만장한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게 될 결정적인 위기가 그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 21일, 서두에서 언급한 바로 그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 것이다.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새로운 삶
 
1748년 3월 21일 존 뉴튼은 그레이하운드 호의 항해 중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여 새로운 삶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아직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신앙은 미숙하기 그지없었고, 구원받은 후 그의 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749년 12월 그는 다시 노예 무역선의 선장이 되어 바다로 나갔다. 훗날 그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를 격려하여 노예무역의 폐지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나, 이 당시에는 아직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결함이 있었다. 엄청난 죄를 깨달아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내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는 악에 대해서는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계속해서 그를 의지하는 데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내 과거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 주님의 긍휼임을 인정하였으나, 주로 나 자신의 결심에 의지하여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힘썼다. . . . 그 이후 상당한 기간이 흐르기까지 나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1750년 2월 1일 그는 8년 동안 연모해오던 메리 카틀렛과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결혼 후 뉴튼은 세 차례 더 노예 무역선의 선장으로 항해하였고, 그때마다 메리는 10-13개월을 홀로 지내며 그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1754년 11월 그는 간질 발작을 겪게 되어 항해를 완전히 접고, 이듬해 8월부터 리버풀에서 탐조사(探潮士: Surveyor of Tides)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리버풀을 방문한 위대한 전도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설교를 통해서 뉴튼은 큰 영적인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집회 때마다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작은 휫필드”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아직 모든 면에서 미숙한 뉴튼에게 있어서 휫필드와의 만남은 믿음의 큰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아내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 이런 가슴 벅찬 기쁨이 잘 배어 있다.

“수요일 휫필드 목사께서 도착하여 저녁에 설교했고, 어제도 두 차례 설교했다오. 나는 첫날밤 그에게 나아가 나를 소개했고 이튿날 아침 그 분과 대화를 나누었고,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했소... 내가 이런 귀한 특권을 누리게 되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오...

그분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소. 그분과 대화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온갖 근심거리들과 십자가들에 대해 염려하지 않게 되고, 내 믿음이 강건해지는 것을 느끼는구려. . . . 그분이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소. 이런 귀한 분을 만나게 하셨으니 죽는 날까지 나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 마땅할 것이오.”

이때부터 그는 독학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 시리아어를 익혔고, 라틴어와 영어와 불어로 된 최고의 신학서들을 탐독하였으며, 또한 성경 연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이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수고와 헌신 끝에 1760년대에 이르러 뉴튼은 철저한 칼빈주의적 사상을 견지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신학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앙 체계를 갖추어, 유능한 복음사역자로서의 영적 자질을 갖춘 것이다.
1764년 그는 앵글리칸 교회의 올르니(Olney) 교구의 목사로 청빙을 받아 16년 동안 사역하였고, 이어 54세에 런던의 울노스(Woolnoth) 교구의 청빙을 받아 27년 동안 사역하였다.
 
강력한 복음적 설교자로 변신
 
그는 쾌활하고, 부드러우며 온유하며, 언제나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평화를 사랑하였고, 43년 여에 걸친 목회 생활 동안 이러한 그의 성품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그 당시는 물론 후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자기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신자의 삶에 대하여, “신자는 자기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믿고 느끼며 또한 주님의 은혜와 용서하시는 사랑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언제나 온유하며 부드러운 자세를 지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선포한다.

“여러 사람이 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 그 중 한 사람을 구해주었다고 합시다. 그 건져진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이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자기는 빠져나왔는데 아직도 구덩이에 있느냐고 하며 그들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겁니다. 그 사람들을 욕하고 조롱하는 대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우려 하지 않겠습니까?...

진리의 빛을 받아 참된 구원을 얻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맹인 바디메오가 눈을 뜬 후, 거리에서 다른 맹인을 만날 때마다 왜 눈이 멀어 있느냐고 소리치며 지팡이로 그들을 때리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고 구원의 필요와 그 가치를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혹시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며 영혼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면, 하나님의 온유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부드럽게 사람들을 권면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처절한 두려움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할 때에도 그런 온유함과 부드러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뉴튼은 이러한 성품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가운데서도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당하던 찬송시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 1731-1800)와의 교제는 특히 유명하다.

뉴튼은 올르니 교구로 이주해 온 쿠퍼를 처음 만났고, 그 후 이 두 사람의 교제는 뉴튼이 올니 교구를 떠나기까지 계속되었고, 또한 그 이후 1800년 쿠퍼가 사망하기까지 서신을 통하여 계속 유지되었다.

쿠퍼가 우울증이 깊어져 홀로 지낼 수 없게 되자 뉴튼은 그를 두 차례 자기 집에서 각각 5개월과 14개월 동안 정성껏 보살폈다. 뉴튼은 쿠퍼의 우울증을 호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를 설득하여 교회를 위하여 찬송시를 쓰도록 하였고, 후에 이 시들이 모여 “올니 찬송가(The Olney Hymns)”라 불렸다.

이로 인하여 윌리엄 쿠퍼의 주옥같은 찬송시들이 오늘날 우리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한글 찬송가 80장, 190장, 243장이 쿠퍼의 찬송시들이다.)

뉴튼에게서 평생 깊은 영향을 받은 또 한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였다. 그는 정치 초년생이던 1785년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끝에, 뉴튼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뉴튼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영적인 성장을 추구할 것과 정치를 계속할 것을 권유하였다.

“주께서 그의 교회의 유익과 국가의 유익을 위하여 그대를 세우셨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믿네.”

윌버포스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뉴튼과 교제하며 항상 그에게서 자문을 받았다. 1787년 그는 노예무역의 폐해를 심각하게 느끼고 그것을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로 결심하였고, 뉴튼도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노예무역 비인간성과 죄악성 폭로
 
뉴튼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관한 소고”라는 글을 써서 노예무역의 비인간성과 죄악성을 알렸고, “아프리카 노예무역만큼 사악하고 잔인하며 포악스럽고 파괴적인 사업이 없다”고 강변하였다.

노예무역에 각종 이권이 개입되어 있던 탓에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계속되는 좌절의 쓰라린 아픔을 당하면서도 윌버포스는 20년 동안 불굴의 투지로 끈질기게 노력하였고, 결국 1807년 2월 24일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영국 하원이 찬성 283표, 반대 16표로 그 법안을 가결시킨 것이다.

또한 토마스 스코트(Thomas Scott: 1747-1821)도 뉴튼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적인 목사로서 뉴튼의 복음적인 설교를 조롱하고 그의 신앙을 지독한 광신으로 매도하였으나, 마침내 뉴튼을 통하여 참된 신앙을 찾아 강력한 복음적 설교자로 변신하였다.

그 외에 페르시아어 신약 성경을 번역한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in: 1781-1812),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인도 선교사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 등도 뉴튼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호주 신대륙에 영향미친 뉴튼
 
뉴튼의 영향은 신대륙 호주(Australia)에도 미쳤다. 1786년 영국 정부는 일단의 죄수들을 호주 보타니 베이(Botany Bay)로 보내어 정착시키기로 했는데, 뉴튼은 신대륙에 복음의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윌버포스를 설득하여 이를 정부 정책에 반영시켰고, 또한 성실하고 유능한 복음사역자인 리처드 존슨(Richard Johnson: 1753-1827)을 천거하여 파송하였다. 뉴튼은 호주로 떠나는 존슨 목사를 환송하며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가라, 미지(未知)의 땅에 구주의 이름을 전하라,
 남반부의 세계에 그의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라;
 그대의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여,
 그들의 마음을 이끌어 그의 얼굴을 구하게 하리라”
 
존 뉴튼은 1807년 12월 21일 8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 임종까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종 한 달 전 그는, “죽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육체와 마음이 무너질 때에 하나님을 우리 마음의 힘으로 삼고 우리의 영원한 분깃으로 삼는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영원의 세계로 들어갔다.

“나의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구주께 내 영혼을 의탁합니다. 내가 배도자요 신성모독자요 불신자였을 때에 그는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를 살리시고 보존하셨으며, 나 자신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의 해변에서 처참한 상태에 빠져있을 때에 나를 구하셨으며, 지극히 무가치한 나로 하여금 그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게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원광연|시드니영락교회 EM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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