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대화법 (1)

대화법과 교육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9/30 [11:59]
지난 두 번에 걸쳐 성경신학의 의의와 내용 개괄을 했다.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면, 성경신학은 유형론적 해석을 바탕으로 신구약의 점진적 발전과정을 더듬어 보고, 이를 통해 정리된 성경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성경해석의 범위를 통제하는 이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성경신학이 중심이 된 설교나 교육은 자의적 성경해석의 최소화(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비유가 가져오는 탈선방지), 그리스도의 인격을 모델로 한 윤리적 도전(성경에서 법 조문 같은 것을 찾아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모델로 추구하는 윤리), 은혜와 심판이라는 두가지 축의 균형을 추구하는 식으로 드러난다.

더 나가서는 성경신학이 중심이 된 사역에는 성경의 흐름과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순종’의 문화가 만들어진다. 다른 말로는 성경신학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성경 본문의 의도, 핵심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더 조심하며, 성경의 핵심이라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적용하는 씨름이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동시에 성경본문을 무원칙하고 시대착오적인 방법으로 지도자의 필요에 따라 짜 맞추는 오용을 방지하고, 복잡한 삶의 현실을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보다 역동적이고 현실적인 답으로 인도해준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도록 개인을 준비시키는 것, 이를 통해 복음의 내용을 더 풍성하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가는 습관을 만드는 것, 결과적으로 삶의 긴 여정을 끊임없이 말씀이 드러내는 회복된 인간모델 ‘예수’를 바라보며 자신과의 씨름을 하는 과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원칙에 동감하더라도, 막상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좀 더 복잡하기 때문에 여전히 뭘 해야 할 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교사들도, 원칙이야기보다는 당장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 방법 같은 것에 더 목말라 한다.

그러나 흔히 빠지는 함정은, 한 곳에서 적용되는 것이 다른 곳에선 더 적용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남의 교회에서 성공한 기술이나 방법이 우리 교회에서는 안 먹힐 확률이 매우 큰 사회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한 가지 방법에만 목을 거는 것이 매우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한 곳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 ‘다원주의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 문화란 사회 안에서 공통되는 가치관이나 사유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가치관이 자신을 숨기지 않고 공존하는 그런 사회를 말한다. 역사상 이런 현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런 다원주의가 한 자리, 한 공간, 한 사회 안에서 어느 하나가 뚜렷한 우위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경쟁하는 정도는 지금만큼 강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다. 이것은 노소 세대 간의 갈등에서도 나타나고, 경제력, 교육수준에 따른 계급갈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민사회는 언어권 차이뿐 아니라, 호주에 온지 5년차 10년차 15년차식의 차이까지도 갈등을 만들어내기에 더 복잡하다. 한마디로 ‘전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이게 맞아 그러니까 너한테도 맞을 거야’ 라고 말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설득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제는 원칙의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정립한 뒤, 이것을 다양한 환경에서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것을 여기서는 다문화 대화법이라고 부른다.

물론 다문화 대화법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베드로 역시 다양한 유대교 종파들의 존재를 활용해 복음전도를 했고, 초대교회의 바울이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한 설교도 다원주의 환경을 배경으로 복음이란 원칙을 전하는 노력이었다.

이런 노력은 특히 선교학을 중심으로, 교회성장학에서 일부 차용되어 이어져 왔다. 그러나 교회성장학에서 차용된 다문화 대화는, 자신을 내려놓는 성육신의 모습보다는 자기 물건을 수단과 방법을 다해 팔려는 마케팅에 더 가까운 문제를 노출한다.
 
다문화 대화법이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다문화 대화ㆍ소통은 몇 가지 전제에서 시작된다. 1) 모든 교육은 대화를 기반으로 한다. 2) 대화는 자신을 전달하는 방법이자, 자신을 바꿀 수 있는 모험이 될 수도 있다. 3) 세대간, 문화간, 계층간, 언어간 갈등은 대문화 대화법의 생활화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4) 다문화 대화법은 원칙을 바탕으로 상황과 필요에 따라 적용되야 한다.

다문화 대화법이란 한마디로, 나와 상대의 문화가 같지 않음을 뚜렷하게 전제하고, 이야기를 할 때 상대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내 입장을 정확히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과정이다.

특히 남의 입장을 해석하는데 따라오는 오해나 착각을 줄이기 위해, 상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과정, 내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는 노력이 주를 이룬다. 대화법이 깊어지면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신의 ‘선입견’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하고, 대화의 결과에서도 내 결론으로 강요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동시에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대화를 통해 인되는 결론으로 마음을 열어보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도그마적’ 성격이 강한 신앙에서는 잘 안맞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가진 깊이에 비추어 보면, 진리에 대한 확신이 반드시 교조주의적일 필요는 없기 때문에, 지적 모험의 정신과 ‘보수적 신앙’도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실제로 다문화대화법의 신학적 모델은 인간을 구원하는 자신을 낮춰 우리 옆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정신과 맞닿아 있다.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던 창조주께서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인간의 아픔과 갈등을 직접 체험하시며 더 나가서 우리가 따라가야 할 회복의 모델을 직접 보여주셨다.

이때 사용된 그리스도의 ‘비유’들과 ‘기사’들은 인간의 한계와 이해수준에 눈높이를 맞춰주신 하나님의 배려를 잘 보여준다. 창조자로서 인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아픔과 배고픔, 상처와 갈등 속에 직접 들어와 공감하시고, 연대를 보여주시고, 고민을 같이 품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죄성에 휩쓸리기 보다는, 결국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모델로 하나님이 원래 기획하신 참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모델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이 점에서 상대를 공감하려는 노력, 상대에 눈을 맞추려는 대화법이 그리스도의 삶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기독교교육은 다문화 대화법을 좀 더 활용해야 하고, 특히 교회공동체와 인격적 성숙을 위해서도,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 맞는, 청소년들에게는 청소년들에게 맞는 또 어른들에게도 어른들에게 맞는 끊임없는 다문화 대화문화를 훈련시키고 적용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를 통해 진리를 잘 설명하고 아는 수준에서 벗어나,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같이 성장하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인격으로 이어줄 수 있다. 또 이것이 없이는 신앙은 정죄에만 능한 이론으로, 내용도 없는 감정적 교류로 남을 수 있다. 다음 호에는 호주 사회학자 맥케이의 다문화 소통론을 기반으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계속>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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