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들의 사도 존 페이튼(John Gibson Paton 1824-1907)

기획연재|복음의 불꽃이 되어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2/24 [11:40]
 
▲ 존 깁슨 페이튼(John G. Paton)                 
 
초년생 선교사의 죽음
 
1861년 정월 초하루, 악성 홍역이 나돌아 수많은 원주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중에 선교사들은 약품과 음식과 물을 그들에게 나르느라 정신없이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들은 선교센터에 함께 모여 주위의 식인종들의 구원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주께서 그들을 보호하여 지켜주시고, 식인종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그들의 삶이 변화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각에 사나운 식인종들이 센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외지인들이 믿는 신이 그런 몹쓸 질병을 가져다주었다고 믿고는 그들을 다 죽여 그 고기를 먹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선교사들은 기도와 찬송을 계속하였다. 예배를 마친 후 한 초년생 선교사가 자기 방으로 가려다가 갑자기 이들의 공격을 받았다. 땅에 쓰러지면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큰일났습니다!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왔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한 선배 선교사가 문간으로 달려가 센터를 에워싼 식인종들에게 소리쳤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보고 계시다. 너희가 그의 종들을 죽이려 하니 벌을 내리실 것이다.”

두 사람이 곤봉을 휘둘러 그에게 날렸으나 그를 스쳐지나갔고, 이것을 보고는 모두들 허겁지겁 수풀로 도망하였다.

초년생 선교사는 정신이 들었으나 공포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며칠을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고생하다가 결국 3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선배 선교사는 이미 그 비슷한 공격을 여러 번 당했고, 그때마다 놀라우신 은혜로 죽음을 면했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다하기까지 결코 하나님이 목숨을 거두시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훗날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위기가 닥쳤을 때 나는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게 평정을 유지하였다.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다 걸고 든든하게 서 있었다. 이 얼마나 귀한 약속인가! 이 약속을 주신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 약속 위에서 기뻐한 것이 몇 번인가! 그의 이름이 진정 복되도다!

그 선배 선교사는 다름 아닌 뉴 헤브리디즈 군도의 식인종들의 구원을 위해 평생을 바친 존 깁슨 페이튼(John Gibson Paton)이다. 뉴 헤브리디즈(New Hebrides)는 피지(Fiji)나 사모아 제도(Samoa Islands) 등과 함께 남태평양의 대표적인 군도(群島)로서 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1980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바누아투(Vanuatu)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존 페이튼의 가족 사진    
 
뉴 헤브리디즈의 순교자들
 
뉴 헤브리디즈에 기독교 선교사가 처음 들어간 것은 1839년이었다. 런던선교회는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를 그곳에 파송하였으나, 이들은 그 해 11월 20일 에로망가(Erromanga) 섬 해변에 상륙한지 몇 분 만에 식인종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그들에게 먹히고 말았다.

그로부터 46년 후 존 페이튼은 말하기를, “이처럼 뉴 헤브리디즈가 순교자들의 피로 세례를 받았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통해서 이 군도가 그의 것임을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1842년 런던 선교회는 또 다른 팀을 타나(Tanna) 섬에 보냈으나 이들은 7개월 만에 섬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1848년 인근의 아네이티움(Aneityum) 섬으로 파송된 존 기디(John Geddie)와 1852년에 파송된 존 잉글리스(John Inglis)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1854년에 이르러 그 섬의 인구 중 절반에 해당되는 3,500여 명의 야만족들이 우상들을 버리고 이교적인 관습들을 포기하고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서원하게 된 것이다. 기디 선교사가 사망한 1872년에 와서는 아네이티움 섬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 존 페이튼의 자서전 표지    
 
출생과 성장
 
존 페이튼은 1824년 5월 24일 스코틀랜드의 덤프리즈(Dumfries) 인근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제임스(James)와 자넷(Janet) 페이튼의 열한 자녀 중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는 양말 짜는 일을 업으로 삼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사는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었다.

그들의 오두막집에는 방이 세 개였는데, 그 중 하나는 골방으로 제임스는 틈만 나면 그 방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존은 “아버지가 저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존의 아버지 제임스 페이튼은 목사가 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람이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목사가 되지 못했고, 그리하여 자기 아들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 바칠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였다. 엘가나와 한나가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린 것처럼, 이들도 아들들이 주께 쓰임 받도록 그에게 드렸고 힘써 아들들을 가르쳤다. 결국 아들들 중 존과 월터와 벤자민 등 세 아들이 신실한 복음의 일꾼들이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존은 열두 살부터 아버지의 일을 배우고 함께 도와야 했다. 그는 매우 성실하게 일을 배웠고, 하루에 16시간씩을 일에 매달렸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였다. 훗날 선교사로서 극한 환경에 견디며 온갖 시험을 당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는 소년 시절부터 미리 그를 훈련시키신 것이다.

온종일 바쁘게 일하는 처지에서도 그는 중간의 식사 시간을 이용해서 공부에 힘썼고 끝내 라틴어와 헬라어의 기본을 성공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절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렸고, 십자가를 전하는 선교사나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유익하게 쓰임 받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가정 예배를 통해서 이러한 그의 결심은 날로 더 강렬해졌다. 그는 훗날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바라보곤 했고, 나도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주께서 아버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내가 복된 복음을 들고 이방 세계의 어느 곳에 나아가는 특권을 누리게 되고 또한 그럴만한 준비를 갖추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를 도와 양말을 짜는 일을 계속한 결과, 덤프리즈 아카데미에서 6주 동안 공부할 수 있는 돈이 생겼다. 6주간의 공부를 마치자 갖가지 일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열망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몇 해의 시간이 흐른 후 추수가 끝나가는 어느 날, 글라스고우(Glasgow)의 웨스트 캠벨 스트릿 개혁장로교회에서 그에게 편지가 왔다. 1년 동안 무료로 수업을 청강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 그는 부모님과 작별하고 70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서 글라스고우로 향하였다.

처음 10킬로미터 정도는 아버지가 함께 동행하며 멀리 떠나는 어린 아들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다. 드디어 서로 헤어질 곳이 가까이 왔다. 어쩌면 다시는 살아생전에 서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서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하나님, 내 아들에게 복을 주옵소서.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너를 번성케 하시고 악에서 너를 지키시기를 바라노라.”

글라스고우에서의 생활은 페이튼에게 매우 힘에 겨웠다.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결국 약속한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다시 글라스고우로 갔고, 결국 메리힐 자유교회 학교(Maryhill Free Church School)의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부당하게도 이곳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인간적으로 볼 때 페이튼에게는 모든 것이 암울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의 캄캄한 어둠같은 것이었다. 얼마 후 글라스고우 시티 미션(Glasgow City Mission)이라는 선교 단체에서 도시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심사받을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결국 도시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곳의 가장 열악한 지구에 배속되어 도시 빈민 선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존 페이튼은 훗날의 뉴 헤브리디즈 선교 사역을 위해 필요한 훈련을 이 사역을 통해서 충실하게 얻었다. 9년 동안의 글라스고우 사역을 통해 인간의 처절한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철저하게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는 도시 빈민 선교 사역에 전심을 다하여 매진하였다.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 있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가 기꺼이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다. 무식한 자들과 술주정뱅이, 습관적으로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그의 순전한 열정에 감복하여 하나씩 과거를 청산하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기 시작하였다.

때로 미움을 사기도 하고 박해를 받기도 했으나, 위대한 바울과 베드로처럼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아낌없이 바치고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복음을 들고 그들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성취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신학 공부와 의학 공부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남태평양의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그들에 대한 관심을 점점 키워가고 있었다. 그가 소속한 스코틀랜드 개혁 장로교회는 1852년부터 사역 중에 있는 존 잉글리스 선교사와 합류할 선교사를 모집하는 광고를 2년 동안 해오고 있었다.
 
▲ 1948년 철거되기 전까지 페이튼이 거주하던 주거지와 유사한 주택.    
 
뉴 헤브리디즈 선교사로 자원
 
그는 결심한 후 그 일에 자원하였다. 교단 선교부에서는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젊은 페이튼의 지원에 대해 걱정하며 반대하였다. 그 중 어떤 노인은 “식인종들일세! 자네가 가면 식인종들에게 잡아먹힌단 말일세!”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대답하였다.

“딕슨 선생님, 선생님은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셨으니 머지않아 무덤에 내려가게 될 것이고, 거기서 벌레들에게 먹히게 될 겁니다. 제가 주 예수님을 섬기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살다 죽는다면, 제 몸이 식인종들에게 먹히든 벌레들에게 먹히든 다를 게 없다고 믿습니다. 나중에 주의 날이 임하여 부활하게 되면 선생님의 몸이나 제 몸이나 다 똑같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처럼 온전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온갖 반대에 부딪치자 기도 가운데 그는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의견을 물었다. 부모님은 그 일에 적극 찬성이었다. 찬성할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겠다며 정말 기뻐하였다.

1858년 3월 23일 교회는 존 페이튼 부부를 뉴 헤브리디즈 선교사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16일 그는 아내 메리 페이튼과 함께 남태평양으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5일 드디어 뉴헤브리디즈의 타나 섬에 상륙하였고, 그 후 41년 동안 계속될 평생의 식인종 선교 사역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1858년 11월 15일 존 페이튼 부부는 타나 섬에 상륙하였다. 몇몇 원주민들이 열정적으로 돕기는 했으나, 젊은 선교사 부부의 미래는 적어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밝지 못했다. 타나 섬 원주민들의 족장들은 간교하고 교활하며 속임수에 능하고 잔인하며 무자비하며 피에 굶주린 자들이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의 상황은 정말 눈뜨고는 보지 못할 만큼 처참하였다. 부족들끼리 전쟁을 하면 승리를 거둔 부족이 패한 부족의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신을 삶고 구워 먹으며 승리를 자축하였다.

그리고 남자가 죽으면 그 아내를 목 졸라 죽였다. 그 아내의 영혼이 남편을 따라가 내세에서도 그를 섬기게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사냥과 싸움 외에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었고, 집안의 모든 힘든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무슨 이유든 아내가 남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때리고 싶은 만큼 아내를 때릴 수 있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굶겨 죽이거나 처참하게 죽여 버렸다. 또한 형형색색의 우상들과 부적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원주민들은 그것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항상 짓눌려 있었다. 패이튼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서 1장에 나타나는 그 사탄의 깊은 면면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적나라하게 우리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갖가지 색으로 온 몸을 장식하고 벌거벗은 채 비참하게 살고 있는 이 원주민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과 함께 공포가 마음에 가득했다.”

타나 섬에 상륙한 그 이듬해 2월 12일 이 젊은 선교사 부부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도저히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나 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페이튼 부부는 그만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해변 가까이 저지대에다 거주할 집을 지었는데, 그런 저지대가 열병과 오한의 온상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후에 이런 실수를 발견하고 고지대에 다시 집을 지으려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남태평양의 고도에서 홀로 아들을 낳으며 극심한 산통을 겪느라 지칠 대로 지친 메리에게 극심한 열병과 오한, 폐렴과 학질 등의 증상이 찾아왔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
 
메리는 두 주간 동안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고통을 겪다가 3월 3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갓난 아들도 병으로 한 주간 동안 고생하더니 3월 20일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캄캄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으로 복음을 위하여 머나먼 뉴헤브리디즈 군도까지 왔는데 여기서 사랑하는 아내와 핏덩어리같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으니, 그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삼키며 손수 무덤을 파고 두 사람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 이후 이 묘지는 그에게 너무도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되었고, 틈만 나면 그곳을 찾아 그때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페이튼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주께서 친히 그렇게 분명하게 나를 인도하셔서 이 사역의 현장에 들어왔는데 이처럼 끔찍하게 아내와 아들을 잃고 보니, 한동안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주께서 항상 나를 지켜주셨다... 먼 훗날 타나 섬이 주께로 돌아올 때까지도 이 장소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땅이 - 믿음과 소망으로 ‘나의 죽은 자들을 묻은’ 이 땅이 - 하나님의 것임을 이 장소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눈물로 아뢰었다. 그때 예수님이 내게 확신을 주시고 나를 지켜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미쳐버렸을 것이고 슬픔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무덤 옆에서 죽어버렸을 것이다...〠 <계속>
 
원광연|크리스찬리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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