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들의 사도 존 페이튼(하) (John Gibson Paton, 1824-1907)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3/24 [11:14]


“그 캄캄한 암흑의 땅에서 아내를 잃은 외로움과 허전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 슬픈 상황 속에서 혼자 남아 다시 임무를 계속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시므로 그가 행하시는 일에 실수가 있을 수 없다는 느낌이 움직일 수 없는 확신으로 다가왔고, 주를 바라보고 그의 도움을 구하게 되었고, 그의 역사하심에 의지하여 싸움을 싸울 수 있었다.”

 
▲ 존 깁슨 페이튼(John G. Paton)    


타나어 신약 성경 번역과 위기


쓰라린 마음의 고통과 사방이 막힌 듯한 절망의 상태에서도 페이튼은 그리스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마을마다 다니며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선포하였다. 그는 또한 그들의 언어를 문자화하여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하는 일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접하게 하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타나어로 신약 성경의 한 부분을 번역한 후 일일이 활자를 꼽아 조판을 완료한 후, 수동 인쇄기로 첫 판을 찍어냈다. 타나어로 된 성경이 최초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862년이 되자 새로운 위기가 닥쳐왔다. 수백 명의 분노한 원주민들이 지체없이 선교사를 살해할 것을 맹세하고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우호적인 추장인 노와르(Nowar)가 달려와서 속히 밤중에 수풀로 들어가 큰 밤나무 아래 덤불 속에 숨을 것을 강권하였다.
그가 숨어있는 주변으로 성난 원주민들이 몰려와 왁자지껄하면서 이리저리 뒤지는 동안 그는 덤불 속에 숨을 죽이며 숨어 있었다.

“원주민들이 이리저리 창들을 던져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 숨어 있었으나 예수님의 팔에 안겨 안전히 있었다. 온갖 슬픔과 괴로움을 당했으나 그때처럼 나의 주님이 내게 가까이 오셔서 내 영혼을 향하여 부드럽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나는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예수님을 몰랐다면, 그리고 기도에 문외한이었다면, 아마 그 상황에서 곧바로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주님의 약속에서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그렇게 한밤중에 덤불 속에 혼자 던져져서 코앞에서 죽음을 대면하는 처지에 있을 때 결코 여러분을 저버리지 않고 구원해 줄 친구가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존 페이튼에게는 과연 그런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이신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서 그런 절박한 순간에도 위로와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한번은 페이튼이 한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세 사람의 주술사들이 나서서, 선교사가 먹은 과일이나 음식 가운데 남은 것만 손에 넣으면 나하크(Nahak), 혹은 주술(呪術)로 그를 죽일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런 도전을 받은 페이튼은 주술사들의 그 악한 권세를 일격에 무너뜨려서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 보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자두 세 개를 가져다 한 입씩 먹고 남은 것들 각 주술사에게 하나씩 주었다. 원주민들은 이런 선교사의 행동에 깜짝 놀랐고, 모두들 숨을 죽이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주술사들은 자두를 잎사귀로 둘둘 말아서 불을 피운 곳에다 태우고, 온갖 방법으로 주술을 걸고 저주를 퍼부었다. 페이튼은 이들을 지켜보며, “너희 신들에게 열심히 도움을 구하거라.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멀쩡하다”라고 외쳤다.

온갖 주술에도 선교사가 멀쩡한 모습을 보이자, 그들은 다시 선언하기를 모든 주술사들이 다 모여서 한꺼번에 주술을 걸어 다음 주일이 되기 전에 그를 죽게 하겠다고 하였다. 타나 섬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모든 주민들이 매일 페이튼의 상태를 확인하고 고개들을 갸우뚱거렸다. 드디어 약속한 주일 아침이 되자, 페이튼은 건강한 모습으로 나서서 외쳤다:
“자 이제는 너희 신들이 내게 대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거라.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하고 계시며,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인류가 사악하지만, 그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보내셨으니,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그날부터 두 명의 주술사는 태도를 바꾸어 그에게 매우 우호적이 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더욱 격렬하게 그를 대적하였다.

 
▲ 페이튼이 사역하던 뉴헤브리디즈 원주민   


복음 받아들인 식인종과 피신


아네이티움 섬 출신으로 복음의 사역자들이 되어 타나 섬에서 페이튼을 돕던 여러 명의 원주민들 중에 아브라함(Abraham)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피에 굶주린 험악한 식인종이었으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 진정한 십자가의 군사가 된 인물이었다. 계속되는 악전고투 속에서 아네이티움 섬 출신의 다른 원주민들은 다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브라함은 끝까지 남아 페이튼의 조력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수백 명의 식인종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그들을 에워싸고 소리를 지를 때에도 아브라함은 페이튼을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결연한 자세로 엎드려 기도하였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 두 사람을 강하게 하옵소서. 저들이 우리를 죽이면 주의 선하신 역사 가운데 우리 둘이 함께 죽게 하소서.”

성난 원주민들은 서로서로 먼저 공격할 것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던진 돌이 아브라함의 뺨을 스치고 날아갔다. 나이 많은 이 복음의 용사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교사님, 이제 나는 거의 예수님께로 떠나게 된 것 같습니다.”

존 페이튼은 이렇게 쓰고 있다.
“바로 그 끔찍한 순간에 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마치 하늘의 구름에 불로 쓴 글씨처럼 박힌 것을 보았다. 곧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들이 아무리 화살을 날리고 창을 던져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확신이 마음속으로부터 강하게 밀려올라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들이 조용해지며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겠지만, 그 옛날 사자들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이 원주민들을 막아 나와 아브라함을 해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다른 섬에 있는 선교센터에서는 벌써 여러 차례 배를 보내어 페이튼 선교사를 철수시키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그는 타나 섬을 떠나기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이제 선교센터가 무너지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으므로 더 이상은 타나 섬에 남아 있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인종들에게 죽임을 당하여 먹히거나 아니면 서서히 굶어죽게 될 것이 너무도 분명하였다. 결국 그는 잠시 타나 섬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과 무수한 고비를 겪은 끝에 인근의 마티슨(Mathieson) 선교사의 선교센터로 몸을 피하였다.

페이튼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그의 애견 클루타(Clutha)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와 그를 깨우는 것이었다. 바깥을 둘러보니 식인종들이 온갖 무기들을 들고 횃불을 손에 든 채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는 바로 옆에 있는 선교사 숙소로 들이닥친 것이다. 이제 몇 분이 지나면 그 집도 불길에 휩싸일 것이었고, 밖에서는 성난 식인종들이 소리를 지르며 대기하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서 대나무 울타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바로 식인종들이 그를 둘러싸고 소리쳤다.

“죽여라! 죽여라!”

바로 이 순간, 갑자기 남쪽에서 우르릉하는 굉음이 들리면서 폭풍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식인종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면서 소리쳤다.

“이것은 여호와의 비다! 저들의 하나님이 저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저들을 도와주고 있다!”
하나님의 이적적인 구원의 역사가 또 한 차례 페이튼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날이 새자 식인종들이 다시 몰려왔으나, 때마침 페이튼을 구하기 위한 배가 도착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무사히 아네이티움 섬으로 피신하였다. 타나 섬에 상륙한지 4년 만인 1862년 2월의 일이었다.

 
▲ 멜본 큐지역 공원묘지에 잠들고 있는 페이튼 선교사 비석.    

식인종 선교 사역 후원 호소


1862년 2월 타나 섬에서 피신한 38세의 페이튼은 온 세계를 다니며 뉴헤브리디즈의 식인종 선교 사역의 중요성을 알리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가장 먼저 호주 각 지역의 장로교회들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의 현황을 알리고 선교사 충원과 선교 후원을 호소하였고, “데이스프링”(Dayspring)호라 명명한 뉴헤브리디즈 선교 사역을 위한 증기선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에 주력하였다.

페이튼은 호주 시드니(Sydney)에 도착하여 뉴헤브리디즈 선교를 위한 사역을 시작하였다. 도착하기 전에 한 목사를 소개받은 터여서 그의 도움을 받으면 시드니의 교회들과 접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 목사는 시드니의 경건한 목회자들과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페이튼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시드니에 도착한지 여러 날이 지났으나 전혀 길이 보이지 않아 마음에 걱정이 생겼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일을 맞게 되었다. 이날도 선교를 위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채 시내를 여기저기 다니던 중, 오후에 여러 어린아이들이 한 교회당(센트럴 역 근처의 Chalmers St.의 장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그는 앞으로 걸어가 사회자에게 10분만 말씀을 전할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였고, 사회자는 망설임 끝에 페이튼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는 저녁 예배에서도 말씀을 해주기를 청하였고, 이튿날에는 시드니의 대부분의 장로교회 목회자들에게 소개되었고, 결국 이를 통하여 뉴 사우스 웨일즈주(New South Wales)뿐 아니라 빅토리아주(Victoria)와 나머지 주의 교회들에게까지 나아가는 길이 더없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페이튼에게 함께 하였던 것이다.

1년여에 걸쳐서 호주 전역을 다니며 선교 후원을 위해 사역한 그는 무엇보다 절실한 선교사 충원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스코틀랜드로 가기로 결심하고 1863년 5월 16일 런던을 향하여 출발하여 그 해 8월 26일 글라스고우에 도착하였다. 부모와 형제들을 떠나 뉴헤브리디즈로 간 지 4년 만에 그리운 가족과 다시 상봉하였다.

페이튼의 모교회인 개혁장로교회는 그 해 총회에서 페이튼의 고귀한 사역을 높이 기리는 뜻에서 만장일치로 그를 총회장에 선임하였다. 처음에는 그런 결정에 당혹스러워 고사하였으나, 그 직분을 통해서 뉴헤브리디즈의 선교 사역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쓰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승낙하였고, 총회장 자격으로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여 선교의 중요성과 당위성과 절박성에 대해 교회들을 각성시켰다.

스코틀랜드 개혁장로교회는 페이튼의 사역을 위하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다. 뉴헤브리디즈 선교회 사무국과 또한 선교선인 데이스프링호를 유지하기로 하는 의안을 가결시킨 것이다. 그리고 뉴헤브리디즈를 위하여 4명의 선교사들이 새로이 자원하였다.

새 아내 마가렛


이 스코틀랜드 방문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였다. 왜냐하면 페이튼은 이 방문에서 평생을 함께 사역할 아내를 새로이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가렛 화이트크로스(Margareth Whitecross)는 선교사 가문에 속한 경건한 여성이었다. 오빠가 해외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가 선교지에서 소천하였고, 언니는 호주의 목사와 결혼하여 호주에 살면서 페이튼의 사역을 열정적으로 후원하던 분들이었던 것이다.

아내 마가렛은 그 후 노년에 이르기까지 존 페이튼의 선교 사역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반려자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한 신실한 종이 되었다. 새 신부와 함께 페이튼은 다시 사랑하는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 살아서는 다시 뵈올 수 없을 부모님과의 마지막 작별이 얼마나 아쉽고 서운했을까? 페이튼은 후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스코틀랜드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톨토워드의 옛 오두막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높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는 백발을 어깨에까지 휘날리며 우리를 위해 다시 한 번 기도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살피시고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셨다.

깊은 사랑의 정서가 가득 담긴 아버지의 이 기도하시는 음성을 이제 다시는 내 귀로 들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작별을 할 때에, 부활의 아침 찬란한 빛이 우리를 가득 비출 때까지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서로 헤어져야 하는 인간적인 아픔이 가득했으나,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며 이방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자유로운 마음으로 기꺼이 서로 작별을 고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령의 능력을 배나 더하시고 우리의 사역에 복을 주시기를 마음을 다하여 구하셨다. 우리가 집을 떠나온 후 어머니는 1865년에, 그리고 제사장 같으신 아버지는 1868년 주님 앞으로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품에 안겨서 언제나 그러셨듯이 평화롭고도 기쁨에 차서, 또한 그 복된 영혼의 불멸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고 구주께서 예비하신 집에서 그 아들과 딸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확고히 믿으시는 중에 소천하신 것이다.

뉴 헤브리디즈로 귀환


1865년 초 페이튼 부부는 호주 시드니로 돌아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동안 숙원 사업이었던 선교선 데이스프링호를 마련하는 일을 마무리하고, 1866년 11월 다시 뉴헤브리디즈로 귀환하였다. 타나 섬으로 다시 복귀할 뜻을 갖고서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 섬에서 동북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니와 섬(Aniwa)에서 사역을 재개하게 되었다.

페이튼 부부는 다시 열정적으로 원주민들을 위하여 사역을 시작하였다. 갖고 간 약품들로 그들의 질병들을 고쳐주고, 땅을 파고 우물을 만들어 깨끗한 물을 공급하여 마시게 해 주는 등의 일을 통해서 원주민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구원을 선포하는 영적인 일에까지 다양한 방향에서 사역을 감당하였다.

어느 날 페이튼은 집에서 물건을 가져와야 할 일이 생겨 나무 조각에 메시지를 적어서 평소 친분이 있는 추장 나마케이에게 주어 아내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추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선교사님이 원하는 게 뭔데요?”

나무 조각이 선교사의 뜻을 전달해 준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나무 조각이 제 아내에게 말해 줄 겁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나마케이는 그의 아내가 남편이 원한 것을 정확하게 보내주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페이튼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성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늙은 추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말에 크나큰 감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의 언어로 기록되는 것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서 성경 번역 작업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성경의 첫 부분이 완성되어 인쇄되어 나오자, 나마케이는 흥분하며 물었다.

“선교사님, 이게 정말 말을 할 수 있나요? 정말 우리말로 말할까요?”

“그렇고 말구요.”

“오오 선교사님, 내게도 말을 하게 해 주세요!”

페이튼이 몇 절을 읽어 내려가자 추장은 기쁨에 가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정말 말을 하다니! 우리말로 정말 말을 하는구나! 이걸 내게 주면 안 될까요?”

이어서 페이튼은 그에게 알파벳부터 시작하여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그는 열정적으로 이를 배워서 결국 성경을 읽게 되고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왔고, 아니와 섬의 첫 결신자가 되었다.

페이튼은 성경 번역과 찬송가 번역 사역을 진행하는 한편, 주일 학교를 세워 아이들과 부녀자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신앙과 문자를 가르치는 일에도 전력을 쏟았다.

놀라운 역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페이튼 부부의 사역에 은혜를 베푸셔서 1881년까지 15년 만에 거의 모든 아니와 원주민들이 온갖 야만적인 행위들과 우상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아니와가 구주의 발아래 엎드려 경배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원주민들이 삶이 바뀌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경건한 신자의 모습으로 바뀌어갔고, 원주민들 중에서 장로들과 교사들이 세워져 교인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아니와 섬 전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것이다.

1881년 아니와 섬을 떠난 후 1886년 다시 그 섬을 찾은 페이튼 부부는 주일 새벽 노래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한 장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선교사님이 떠나신 이후,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추장님과 교사들이 매 주일 새벽 동틀 무렵에 함께 모여 주일의 첫 시간에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로 하여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모두들 함께 모여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님의 설교에 힘을 주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열매를 맺어 오늘 예수님께 영광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타나 섬과 아니와 섬에서 사역하는 동안 페이튼은 매일 일지와 노트와 편지들을 꼼꼼히 기록해 두었고, 1887년과 1888년에 걸쳐서 이것을 정리하여 자서전(Autobiography)을 출간하였고, 이를 통하여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관심이 호주와 유럽과 미주 등지에서 크게 일어났다.

페이튼 부부는 이어서 영국을 시작으로 6년에 걸쳐서 호주 전역을 다니며 순회강연을 행하였다. 그리고 1892년 그는 다시 여행길에 올라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를 방문하였다. 거의 70에 가까운 나이에 매주 평균 15차례 이상 말씀을 전하는 등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열정적으로 감당하였고, “내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순전한 기쁨의 샘”이 언제나 그에게 열정을 갖게 해 준다고 고백하였다.

특히 영국 방문에서는 설교자의 황제라 일컬어지는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의 메트로폴리탄 테버나클을 방문하여 뜨거운 환대와 지원을 받았고,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뮐러(George Mueller)도 남태평양 선교 사역을 위하여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바쁜 여정 중에도 그는 늘 아니아어 신약성경의 원고 뭉치들을 지니고 다니며 계속 점검하고 수정하였고, 이런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결과로 드디어 1897년 그의 나이 73세에 아니아어 신약성경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1902년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아니아 섬을 방문했는데, 이번에는 150편의 찬송이 수록된 아니아어 찬송가와 또한 소요리문답을 배포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아니아 섬에 머물고자 했으나 아내 마가렛의 질병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호주로 귀환하였다.

1904년 그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아니아 섬을 방문하였다. 이듬해인 1905년 아내 마가렛 페이튼 여사가 영원한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일 후에도 그는 여전히 호주 각 지역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며 남태평양 선교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였고, 1907년 1월 다시 아니아 섬을 방문할 뜻을 갖고 있었으나, 그는 그해 1월 28일 83세로 아니와 섬이 아닌 영원한 복락의 나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내게는 그늘도 구름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한 평화요 믿음에서 나오는 기쁨이다”라는 말과 함께...〠

원광연|크리스찬리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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