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ㆍ서양 의술ㆍ그리고 문화재 밀수꾼들

호주 선교사들의 사랑방에서 마지막 파티

글|한길수,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05/26 [11:54]
                                             ▲ 6월호 표지    © 크리스찬리뷰

호주의 선교사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명예와 안락한 삶을 초개처럼 버리고 극동 은둔의 나라 한반도로 향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한국 땅을 찾은 20세기 전후는 현대 문명의 이기가 그곳에 정착하기 이전이고, 우리의 조상들은 미개하다고 평가를 받던 시절이었다.

한국에서 30여 년 이상을 선교사로 지낸 찰스 맥라렌(Dr. Charles I. McLaren, 진주 1911-1923, 1939 -1941, 서울 1923-1938, 한국명 마라연)과 그의 부인 제씨(Mrs. Jessie McLaren, 진주 1911-1923, 서울 1923-1938)가 귀국 후에 지냈던 멜번의 생가가 매각되어 지난 5월 11일 오후 그들의 후손들과 지인들,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들 70여 명이 ‘4 Barry Street, Kew’에 위치한 그 집에 모여서 생가에 얽힌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호주 선교사들과 한국 선교에 나름대로 유서 깊은 그집(Traditional Korea fellowship meeting place)이 매각되어 7월 1일이면 한국 선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게 양도되기 때문이다.

찰스 맥라렌 선교사는 의과대학 졸업 후 수년의 임상경험을 쌓은 후 진주의 배돈병원(Mrs. Paton Memorial Hospital)에서 의료 감독을 지냈고, 세브란스병원/의과대학에서 신경정신과 교수를 역임하였다(1922-1939).

그는 한국 최초의 정신과 의사인데, 한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훌륭한 의학 연구업적뿐만 아니라 호주에서의 기독교운동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호주의 백호주의에 저항하는 기독교적 인류애를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일본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결국 호주로 강제 추방되었다. 
 
▲ 찰스 맥라렌 선교사(왼쪽 2번째)와 배돈병원 한ㆍ호 의료진     © 크리스찬리뷰

또한, 제씨는 이화여대에서 역사와 성경을 가르쳤는데,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몇몇 중국의 서적과 한국의 시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귀국하면서 소장했던 책 일부만을 가져왔는데 그 책들은 호주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 중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김만중의 역사소설 '구운몽', 한국 문학선집 '동문선', 이광수, 최남선 등의 업적들이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1766년에 함경도에서 출간된 '불설 대보 부모은중경 언해', 1729년에 출간된 '삼강행실도'가 포함되어 있다.(
www.nla. gov.au/selected-library-collections/mclaren-human-collection).

이들의 삶과 선교사로서의 업적을 생각하니, 동유럽 및 구소련 공산권에 목숨을 걸고 성경을 전달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 (생명의 말씀사 역간)라는 책이 떠오른다.

우선은 한국의 문화재를 약탈해간 여타의 많은  외국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우선 찰스 맥라렌은 서구의 의술을 임상적으로, 또한 학술적으로 한국에 ‘반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치료와 더불어 차세대 의사를 키워내는 일에 매진한 것은 오늘의 한국 의학 발전에 작은 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그의 의술에는 기독교에 근거한 사랑이 깊이 묻어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제씨 맥라렌은 한국 문화, 문학,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대한민국의 세계화에 나름대로 일찍부터 공헌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에 어찌 찬사를 아낄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의 문화 업적을 호주에 ‘반입’하여 적절하고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여 필요한 이들에게 열람이 가능하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 호주 선교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맥라렌 선교사의 생가가 최근 매각되어 지난 5월 그 집에서 마지막 가든 파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선교사는 완전히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선교를 꿈꾸는 사람들은 이 질문을 자문해보게 될 것이다. 아마도 타인 중심적으로 사는 것에 큰 비중을 두기 때문에 선교를 희망하는 것엔 틀림이 없겠다.


맥라렌 의사는 30세 이전에 한국에 선교의 길을 떠났는데 그의 선교사로서의 삶은 타인 중심적이면서 동시에 대단한 의료학자로서 기량을 발휘한 것을 볼 때,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달란트를 끊임없이 계발하는 삶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30여 년의 삶을 살면서 보람이 있고 의미 있는 선교가 가능하기나 하였을까? 

이 원리는 선교의 삶을 산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필자는 선교사들과의 담소를 통해 확인했다. 아마도 선교사의 삶은 나이 여하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삶이어야만 베푸는 삶도 가능하리라고 짐작해본다.

▲ 호주선교부에 의해 선교의 전진기지로 1913년 11월 4일 진주에 최초로 설립된 진주 배돈병원     © 크리스찬리뷰

선교사들의 후손들은?


생가에 진열된 책자들을 둘러보는데 '할머니'라는 프로젝트 리포트를 발견하였다. 맥라렌 부부는 슬하에 무남독녀 레이첼(Rachel)을 두었고, 레이첼은 피터 휴먼(Peter Human)과 혼인하여 존(John Humann)과 더글라스(Douglas Humann)를 낳았다. 더글라스는 질 (Jill)과 혼인하여 로버트(Robert)와 에마 (Emma) 그리고 테스(Tess)를 낳았다.(*아버지 이름(성)과 철자가 약간 다르다: 편집자)


레이첼은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2차 세계대전이 격렬해지던 1941년, 그녀가 18세 때 호주로 귀국하였다. 그러니까 그녀의 정체성 형성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이루어졌다고 간주된다.

백호주의가 판을 치던 그 당시 은둔의 나라에서 태어나 18년의 세월을 보내고 호주에 돌아온 여인의 세계관은 분명히 남다르게 부각되었을 듯 싶다. 레이첼의 손녀인 에마는 고등학교 시절 할머니의 삶과 세계관에 대한 프로젝트 리포트를 작성했던 것이다. 
 
▲ 1910년경 진주 전경. 호주 선교사 사택과 배돈병원(오른쪽), 시원여학교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 크리스찬리뷰

레이첼은 지금도 그녀의 손주들, 로버트와 에마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할머니'로 기억되는 측면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제씨/레이첼의 생가는 로버트와 에마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끊임없이 선사하는 ‘이상한 나라’인 것으로 기억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몇몇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엮어진 따뜻한 인간애는 더없이 많은 추억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우리의 삶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이리라.

에마의 오빠인 로버트도 진열된 물품을 둘러보기에 그와 담소를 나누었다. 에마와 로버트는 조부모님과 증조부님의 신앙과 그들의 선교업적에 대단한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런데 본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중요한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고 있는 것으로 일단은 ‘충분’하다고 여기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 그들의 신앙에 대한 질문과 관심은 계속될 것이다. 훌륭한 선조를 두었지만 신앙은 개인적인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조들 못지않은 업적을 낼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으리라.

▲ 캔버라국립도서관에 기증한 ‘삼강행실도.’ 1729년에 출간된 이 책은 116쪽에 달한다.     © 캔버라국립도서관

평범한 삶의 모습들


제씨가 처음 구입한 레이첼/피터 휴먼의 생가는 1942년에 구입한 주택으로 부엌을 제외하면 거의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서재에는 책들이 빼곡한데 여타의 호주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의 책들이었다. 이광수의 '흙', 20세기 초 한국 개신교의 '찬미가', 가족들의 역사적 기록물, 맥라렌 부부의 사진 모두가 부착된 부부 여권이 눈길을 끈다.


해가 질 무렵 단체 사진 촬영에 이어 더글라스는 기억이 될 만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더글라스의 형제인 존이 어머니 레이첼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프랑스와 주변 나라들을 여행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초라고 했다. 그 당시 존의 어머니 레이첼이 프랑스의 친척들에게 쓴 편지를 읽어 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지난번 존이 방문했을 때 특별히 환영하고 친절을 베풀어 줘서 고마워요. ... 그런데 존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좀 알려 줄 수 있나요?”

그때만 해도 통신시설이 취약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인지,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린 아들의 짓궂음인지, 아니면 자식을 늘 그리며 사는 어머니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 맥라렌 선교사 부부와 무남독녀 레이첼(가운데). 한국에서 태어난 레이첼은 1941년 18세 때 호주로 귀국했다.         © 크리스찬리뷰

레이첼은 2007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녀의 남편 피터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피터는 화학박사로서 호주의 주요 연구기관(CSIRO)에 근무하였다. 오랜 기간 환경 보존에 공헌한 그는, 자신의 지식을 생활에 응용할 줄 아는 실용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가령 꼭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을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가 없다면, 먼저 그 도구를 만들어서 물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대단한 체력가였던 것 같다. 50대의 나이에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수도 없이 할 뿐더러 철봉을 잡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회전을 할 수 있는, 말하자면 기계체조에 능한 모습을 보았다고 더글라스의 친구가 증언하기도 했다.

▲ 레이첼과 결혼한 피터 휴먼(왼쪽 두 번째)과 장남 존 부부와 차남 더글라스 가족(2012). 피터는 2012년그의 부인 레이첼은 2007년 세상을 떠났다.     © 크리스찬리뷰

한인사회에의 공헌과 관계


레이첼 휴먼은 멜번에 돌아와서 한국에 대한 정서를 그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녀가 한국의 추억을 그리는 한 가지 방법은 자연스레 멜번에 사는 한인 교포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 멜번에 최초로 한인교회가 설립된 시기는 멜번에 교민사회가 시작된, 그리고 호주의 백호주의의 막을 내리고 다문화 주의가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당시 한국을 알고 문화를 아는 호주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이 꽤 힘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배리 스트리트에 위치한 ‘제씨의  생가’에는 레이첼 그리고 노블 맥켄지 (McKenzie) 선교사의 딸인 루씨 (Lucy)등 선교사들의 후손들, 그리고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진 호주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기도 하였다. 한국 교민으로는 남기영 목사가 그들과 교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크리스찬리뷰

박물관으로 가꾸고 싶은 희망


이미 언급했듯이 맥라렌 가계의 후손들, 그들의 친구들과 이웃들 70여 명은 지난 추억들을 나누며 즐거움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간직한 추억들이 이렇게 중요함을 새삼 느끼어 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기억 속의 집이나 장소는, 서서히 그리고 결국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역사의 기록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 정도로 남게 되는 것이다. 호주 선교사들의 따뜻한 업적들은 길이 기억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알려져야 마땅하다.

 
▲     © 크리스찬리뷰

호주의 역사학자 피터 리드(Peter Read)의 Returning to Nothing: The Meaning of Lost Places가 생각난다. 집이나 고향을 떠난 사람들 또한 내가 살던 고향이 댐의 건설 등으로 매몰되거나 상실되었다면 이는 마치 사랑하는 친구나 식구를 잃은 것과 유사한 슬픔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추억의 그 장소나 그 집에 반복해서 돌아가 보지만 나의 추억은 온데간데없고, 내 마음속에 무너지고 흩어져가는 추억의 부스러기를 더듬어 꿰어 맞추려 하지만, 어느새 내 마음은 ‘고향’을 잃은 아쉬움에 깊이 압도되어 마음의 상처는 추스릴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음을 발견한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 본지 최초 공개! 맥라렌 선교사 가족 여권(가운데). 처음 발급된 32페이지의 이 여권에는 부인과 딸 등 3명이 함께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이후에 부인 제씨(왼쪽)와 딸 레이첼(오른쪽) 의 여권이 발급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발행인은 제씨 생가를 한국 교계가 구입하여 의미있는 박물관으로 꾸며지길 바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물량주의와 교세 확장에 눈먼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질 리 없다. 가든 파티가 열린 그 집에는 한국에서 가져왔던 은행나무와 감나무가 한국의 정서를 되새겨 주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그 나무들이 그곳에 건재하더라도 그 나무들은 새 집주인에게 무슨 의미를 부여할까?

하지만 제씨의 생가 보존은 힘들더라도 우리가 받은 복음, 독자들 개개인이 부여받은 재능을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까운 이웃들, 그리고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먼 곳의 이웃과 효율적으로 나눌까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까?

하나님의 복음과 우리의 재능을 만국에 전력으로 밀수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출현하는 꿈을 꾸어본다.〠


글/한길수|모나쉬 대학교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과 교수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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