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선교 인도 챈나이 선교 일기

하늘이 뚫린 인도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구원의 비전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12/28 [15:19]
▲ 집중호우로 인해 물에 잠긴 챈나이 시내.     © 김석원
 
 
인도 챈나이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비를 호주에서도 맞아본 적은 있었지만, 척척한 옷을 말릴 틈도, 자리도 없어서 인지 사방은 온통 목욕통 같았다.
 
호주의 한 장로교회 후원으로 인도인 목회자들을 위한 ‘기독교교육’ 집중강의를 위해 방문한 챈나이 공항은, 비를 피하려는 방문자, 길이 엇갈린 환영객들, 뭘 하러 왔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이 더해져 더 축축했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여전히 옛날식인 공항, 리노베이션 중이라고 하지만 IT 강국의 이미지 같은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솔직히 인도인들에게 별로 호감이 없었다. 애들 학교나 동네에서도 주로 말도 많고, 이기적이고 정직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던 이들. 아마도 그들의 그 괴상한 영어발음에 호주인들이 더 잘 반응하는 모습이 눈이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떠나기 전까지 다섯 방이나 맞아야 했던 예방주사나, 불친절할 뿐 아니라 비싸기까지 한 인도 출입 비자 때문에도 더 그랬던 것 같다. 하나님은 좀 잔인하신 면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다를 때, 나를 구석으로 몰아 결국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드신다. 물론 나를 위해서..
 
도착하자마자 펼쳐진 아수라장은 그런 인상을 잊게 하기 충분했다. 마중나온 선교사의 미소는 이곳 박물관에서 본 석가의 그것과 비슷했는데, 아마도 이곳의 혼란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메카니즘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앞으로 갈수록 심해지는 혼란 속에서 내 짐작은 확인되지만... 



▲ 물에 잠긴 숙소에서 탈출(?)하는 문광식 목사     © 김석원
 
 
하루 늦게 도착하는 다른 강사를 기다리면서 묵은 곳은 성 토마스 힐 카톨릭교회가 운영하는 호스텔. 엉성하지만 깔끔하다. 물론 엄청난 수의 모기가, 밑이 다 들리는 모기망과 쉴새 없이 뿌려대는 스프레이를 비웃으며 내 하얀 살을 사정없이 뜯어먹고 있었다.
 
성 토마스는 의심 많은 사도 도마를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었다는 그 도마. 그래서 이 곳에 있는 교회 한복판에는 도마의 손가락 뼈를 유물로 전시해 놓았다. 그러나 막상 내 눈길을 끈 것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교회의 기둥들이었다. 친절한 관리원이 돌 십자가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며, 매년 수만 명이 참배한다고 설명한다. 과거와 현재, 미신과 전통이 공존하는 카톨릭의 현실이 그대로 나타난다.
 
다음 날 다시 이어진 비 속에 문광식 목사가 도착했다. 이 프로그램을 후원하는 아들레이드장로교회 담임이기도 한 문 목사와 나는 잘못하면 일 주일 이상 못 볼 뻔했다. 곧 홍수로 공항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컨퍼런스를 연기해야 할까 고민하다, 이미 모여 기다린다는 인도 목회자들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리지널 카레에 대한 기대도 못 채우고 인도에서의 첫 점심도 거른 채 가는 길은 소와 사람과 차들이 물 위에서 허우적대는 강 같았다.
 
택시 운전사는 엔진이 꺼지지 않기 위해 이미 바닥까지 채운 물길 위로 공회전을 수도 없이 하는 덕에 엔진오일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 중간에 몇 번을 멈춰서 위험하다고 손사래치는 운전수를 설득했다.
 
비를 맞으며 차를 밀고, 걷고, 그러면서 간신히 도착한 훈련장도 카톨릭 호스텔이라고 했다. 특히 15세기 이후 무역 때문에 이곳에 온 포르투칼의 영향과, 80-90년대 요한바오로 2세의 집중적인 관심 덕분에 챈나이는 카톨릭으로 도배된 느낌이다. 

 

▲ 기독교 교육 집중강의에 참석한 인도 목회자들.     © 김석원
 

인도 전체에 비하면 비교적 기독교인들이 많은 편이지만, 여전히 개신교인들은 소수이고, 강력한 카톨릭과 더 거칠어져 가는 힌두교인들 사이에서 차별과 학대로 허덕거리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30여 명에 가까운 인도인 목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2시간씩 기독교의 생활영성과 교회를 위한 기독교교육 특강이 이어졌다. 목회자들은 열정적인 통역자 덕에 한국어  엑센트가 강한 내 영어에도 강의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내가 한 강의 자체보다 통역 내용이 훌륭한 것 같은 눈치다. 한마디로 하면 세마디가 나오니까...
 
처음에는 서먹한 눈으로 보던 현지 목회자들은 시간이 가면서 목회 현장에 대한 각자의 고민과 씨름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환경이 다르고 말도 다르고 인종이 달라도 목회 현장의 도전은 다르지 않았다.
 
설교를 해도 변하지 않는 성도, 계속되는 사회의 동화압력 속에서 희석되어가는 복음, 말씀 말씀하면서도 중심도 주제도 분명하지 않은 성경 교육까지. 우리는 호주와 한국, 인도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확인하며, 다시 한번 복음의 핵심을 집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나누고, 이를 확장하고 설명하는 내용으로써 성경신학적으로 성경읽기 하는 방법을 차분하게 나누었다.
 
문광식 목사가 진행한 성령의 열매 특강은 부흥회처럼 진행되는 바람에 강의는 냉온탕을 오가며 감성과 이성, 마음과 머리가 같이 달궈지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우리를 더 하나로 만든 것은 지금 우리 밖에서 벌어지는 홍수 때문이었다. 두고 온 가족들의 피해상황을 전화기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머니를 털어 한 끼 덜어주고 손잡고 기도해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고난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고, 같이 나누는 찬양의 가슴 벅찬 감격은 그 깊이가 전과 같지 않았다.

 
▲ 도마의 손가락 뼈가 유물로 보존된 교회     © 김석원
 

이번 강의 시리즈는 10여 년전부터 인도 챈나이에서 사역을 해온 정용일, 이지현 선교사 부부의 노력의 결과다. 순장로교단 출신인 정 선교사는 오래 전부터 인도 선교의 꿈을 품어온 사역자다. 한국에서의 목회 후 2009년에 인도로 온 정 선교사의 말이다.
 
“사실 항상 이곳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남들보다 잘 준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살아보니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특히 단기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었어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길게 보고 접근하고 있지요.”
 
그의 미소가 어디서 왔는지 감이 오는 대목이다.
 
그는 이곳에서 주로 독립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지원을 해 왔고, 5년 전부터는 목회자 재교육을 위한 세미나를 준비해 호주에서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 신학자, 교육자들을 데리고 프로그램을 이어왔다.
 
 “이미 기존의 신학교도 있고, 다들 안수 받은 분들이지만 신학교육의 질은 현장의 필요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신학교를 세우기보다는, 목회자 컨퍼런스 같은 비공식적인 지원 틀을 활용해 도우려고 했습니다.
 
교회운영의 가장 기본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이해가 없어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좀 더 본질적으로 성경자체를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구요.”
 
지금은 덜 복음화된 파키스탄 접경의 북부 자이푸르 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겼지만, 여전히 매년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한 사역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챈나이에서는 적응이 힘겨워 하던 두 아들들이 그곳에서 쉽게 정착해서 다행이라고 한다.
 
강의를 마치는 날, 우리는 서로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계속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자리를 떠났다.
 
남인도는 영국에서 해방되는 즈음, 다양한 개신교단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CSI'(남인도교회)라는 연합교단을 탄생시켰다. 지금도 이들이 만든 연합예배 예식서는 다양한 신학전통을 아우르는 에큐메니컬운동의 교과서처럼 쓰인다.
 
선교사들이 남긴 상당히 많은 재산과 함께 시작한 이 교단은 안타깝게도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나 선교에는 관심이 줄어갔고 여기에 반발한 일부 목회자들이 독립교회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교회가 처한 열악성, 특히 난립한 신학교 속에 부실한 교육과 혼란스런 안수문화 덕분에 이들 교회는 매우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성경을 다루고, 복음적으로 설교하는 부분이 많이 약합니다. 기존 학교나 조직으로는 그 필요를 채우기가 쉽지 않구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역현장에서 개선을 소망합니다”
 
그래도 매년 이들 교회가 인도 다른 지역과 다른 세계 곳곳으로 파송하는 선교사들은 엄청나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이들 덕분에 인도는 곧 세계 최고의 선교사 파송국이 될 상황이다.
 
“아직은 풀어야 할 숙제는 있다. 남인도가 중동으로 노동자로 많이 가는데, 이중에는 크리스찬이 많이 섞여있고 이들을 위한 사역을 위해 나가는 선교사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넓게 북인도와 중동에 대한 적극적인 선교 비전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도인들은 음악, 음식 같은 문화나 경제수준 등으로 중동인, 아프리카 인들과 더 많이 교감할 수 있는 입장이다. 이들의 영어능력도 또다른 장점이다. 이점에서 인도인들을 통해 세계선교의 비전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공항으로 나오니 예상대로 문은 굳게 닫겨있었다. 오는 길에 주유소마다 장사진을 치고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얻어가려는 주민들의 아우성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사방에 넘치는 물과 그 위에 떠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유물들, 익사한 듯한 개 시체들을 보면서, 전화도 전기도 다 끊어진 대도시는 혼란과 공포로 다가왔다. 너무 ‘세계종말’에 대한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 걸까? 이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대안을 찾는 문 목사를 보니, 아마도 내 믿음이 적은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되었고, 우리가 잠시 피해 돌아간 성 토마스힐 교회 호스텔 주변도 강둑이 무너졌다는 소문에 두려워 짐을 싸들고 몰려온 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방에서 우는 아이들, 허둥지둥대는 사람들, 현지에 익숙한 선교사와 같이 했지만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많은 수의 수녀들을 보며 평안은 환경의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의 상태임을 확인한다. 홍수로 취소된 행사탓에 이곳에 임시로 다 와있다는 설명과 함께, 이들 덕분에 더 잘 준비된 것 같은 저녁식사를 나누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다.
 
수녀들의 표정을 보니 인도거리에서 본 가난과 두려움은 보기 힘들었다. 이들이 보이는 자신감은 카톨릭 교회의 힘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들의 깊은 영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어지는 일정을 조금이라도 맞추기 위해 일단 버스를 타고 챈나이를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가까운 국제비행장이 있는 뱅갈로로 가는 버스표를 구해, 버스 대합장에서 기다렸다. 사방에 널려진 난민들, 일부는 끊어진 버스 노선덕에 기다리는 승객들이라고 하지만, 일부는 항상 밤마다 그 자리를 찾아오는 노숙자들이라고 했다.
 
이들을 내려보다는 하얀 피부의 북부 인도인 배우들의 광고만큼이나, 이 지역 여자 주수상의 기름진 얼굴이 좀 거슬린다. 왕년에 유명한 배우라서 그런지 더 ‘작위적’이다. 사방에 정치인들의 사진과 광고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인도. 정치 과잉 사회에 하수도시설 하나, 구호시설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신문을 보니 인도군의 구호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정부의 무능으로 수해 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래도 이들은 다시 선거 때가 되면, 민족주의와 전통을 들먹거리고,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을 적으로 삼아, 자기 지지기반을 강화해 정권을 다시 잡을 것이다.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비교적 관용적인 문화를 지켜온 좌파계 간디가 문이 쇠퇴하면서, 민족주의적 힌두우파 세력이 득세했고 덕분에 외국기업들은 사업하기가 훤씬 쉬워졌다고 했다.
 
그러나 심해지는 빈부의 차는 2불을 가지고 30분을 달리는 삼륜차 택시기사와 5불짜리 스타벅스 커피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확인된다. 세계 어디서나 익숙해져 가는 장면이지만, 적어도 우리 동네는 하수도라도 제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온다. 밤새 달려 갈 것이라고 했다. 가기 전에 축축해진 마음을 위로한다고 한국식당을 어렵게 찾아갔다. 거기도 재료를 구할 수 없어서 달걀 후라이  반찬에 간단한 짬뽕이 나왔다.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 물었더니 한국 식당에서 오래 일했던 티벳계 인도인주방장의 작품이란다. 인도의 엄청난 현지화 능력이 보여주는 증거 같았다. 이들에게 우리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버스정류장에서 정 선교사를 보내기로 했다. 아직도 홍수가 진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스러웠지만, 전에 도왔던 교회들을 돌아보고 가야한다고 했다. 비상식량으로 챙겨둔 남은 사발면을 넘겨주고, 아쉬운 마음으로 뉴질랜드산 카우보이 모자를 건네주었다. 비라도 막아주길 바라면서.

 
▲ 집중 호우 난리통에 불티나게 팔리는 생수 판매대 위에도 주 수상을 홍보하는 사진이 붙어 다닌다.     © 김석원
 

인도 선교가 어떤 면에서 힘드냐고 물었다.
 
“실제로 이들은 우리보다 더 일찍 복음화되었다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외부인에 대한 불신도 강해 이를 모르고 온 선교사들이 많이 실패를 했습니다. 이제는 약 3백50 가정으로 이뤄진 전인도 선교사협회에서는 새로온 선교사들에게 이 현실을 교육하는 일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곳 선교사들은 다른 해외지역에 비해 한인교회사역보다는 현지인과 바로 씨름하는 편이지만, 안정된 비자를 얻기가 힘들어 장기선교가 불가능하고, 뱅갈로 등 일부 지역 에 모여 있는 것도 극복해야 할 숙제라고 했다.
 
복음을 듣고도 평생 동안 신분차별을 강요하는 카스트제도에 부딪혀 복음이 생활화된 것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았다.
 
 “카스트제도가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현재 인도를 지배하는 층이 이를 사용해 사회를 유지해 온 면이 많이 있습니다 카스트가 법적으로는 폐지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현실로 존재합니다. 이 때문에 복음이 제대로 삶 속에 스며드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직까지는 카스트제도 자체가 가진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입장까지는 못된다고 했다.
 
“다원주의도 문제입니다. 혼합주의적인 힌두교의 영향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지 않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예배형태도 그렇고, 신자들의 생활태도나 가치도 그런 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떨어뜨렸을 때 보면 힌두교 예식반응을 그대로 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 복음과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더 간절합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수십 차례 삼륜차 택시 앞에서 흥정을 하면서 인도인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았다. 약속을 지키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 너무 가난해 타성적인 구호 의존이나 자립성도 부족한 사회, 그러나 동시에 접근하기 힘든 만큼 자부심도 강하고, 선교 대상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도구로 활용 가능성도 높은 이 나라. 그래서 한국교회가 원하는 단기적인 성과나 결과를 내기 힘든 곳이 바로 이 인디아였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그런 단기적 성과는 무의미합니다. 도리어 이들과 삶을 나누고 같이 인내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역하는 교회들도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도를 제대로 준비만 시킬 수 있다면 이들을 통한 세계 선교는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이를 위해 교민 교회들의 기도와 헌신을 부탁드립니다.”〠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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