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를 개척한 사람들과 개척자 마을

역사의 도시 위버포스에 있는 '호주 개척자 마을'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6/04/25 [12:15]
▲ 호주 개척자 마을 중심거리에서 노예 상인이 수갑찬 꼬마 죄수들의 죄명을 묻고 구경꾼들에게 경매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지난 4월 12일, 윈저 인근 위버포스(Wilberforce) 지역에 있는 '호주 개척자 마을'(Australiana Pioneer Village)을 찾았다. 초기 호주인들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날씨는 오락가락하며 가랑비가 내렸다. 입구 앞 큰 길가에는 '맥콰리 타운의 역사적 윌버포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Historic Wilberforce a Macquarie Town)라고 쓴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주위를 돌아보니 입구에는 이곳의 개척자인 맥라클란(McLachlan) 가족 소유의 Heritage Hotel이 있고, 마을 안에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집인 'Rose Cottage'가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호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5대 호주 총독 맥라클란 맥콰리     © 크리스찬리뷰


호주 5대 총독 맥콰리(McLachlan Macquarie)

호주는 1월 26일을 ‘Australia Day’로 지킨다. 일반적으로 필립 제독이 11척의 배를 이끌고 호주에 도착한 날이라고 알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도착한 날은 1788년 1월 18일 보타니 베이(Botany Bay)이다.
 
필립 제독은 여러 곳을 탐사하다 1월 26일 영국령 식민지로 선포하고 지금의 록스(Rocks)지역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그는 당시 '영국 내무부장관'(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고 호주 제1대 총독이 되었다. 필립 제독이 호주를 개척한 사람이라면, 제5대 총독인 맥라클란 맥콰리(McLachlan Macquarie)는 근대 호주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그는 재임기간(1810-1821) 동안 호주를 불모의 유형지에서 기회의 땅으로 변모시켰다. 호주에서는 '맥콰리'라는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맥콰리 대학, 맥콰리 은행, 맥콰리 스트리트 등 다양한 곳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맥콰리 포인트'이다.
 
맥콰리 총독이 영국에 다녀올 때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부인을 위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의 묘비에는 근대 호주의 초석을 놓았다는 의미에서 ‘The Father of Australia’(호주의 아버지)라고 새겨져 있다.
 

▲ 토마스 로즈가 1811년에 건축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집인 Rose Cottage 전경.     © 크리스찬리뷰


영국의 링컨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미국에 링컨이 있다면 영국에는 윌버포스가 있다. 아브라함 링컨은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세계 최대의 노예매매국가였다. 성공회 교인이며 정치인이었던 윌버포스의 20년간 피나는 노력으로, 드디어 1807년 노예제도폐지 법안이 영국 하원에서 283대 16으로 통과되어 노예거래가 금지되었다.
 
법안 통과 2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영화가 출시되었다. 영화에서 윌버포스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맨토의 역할을 한 '존 뉴턴'(John Newton)이 등장한다.
 

▲ 호주 개척자 마을 커뮤니티 정원입구.     © 크리스찬리뷰


존 뉴턴은 영화 제목인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작시한 주인공이다. 노예선 선장이었던 그가 회개한 후,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며 지은 찬양이다. 성공회 교회사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주일학교 창설자), '존 벤 신부'(Rev. John Venn)등과 더불어 18세기 성공회 복음주의자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국회에서 기독교 정치운동의 모델을 보여 주었다. 윌버포스는 한번도 호주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맥콰리 총독은 그를 기리며, 이곳의 이름을 '윌버포스'라고 명명하였다.
 

▲ 개척자 마을을 세운 빌과 매리 맥라클란 부부 비석이 마을 안 교회 당앞에 나란히 누워 있다.     © 크리스찬리뷰


최초의 자유 정착민 토마스 로스(Thomas Rose)

초기 호주는 죄수들의 유형지로 영국의 관심 밖에 있었다. 초대 총독인 필립은 개발의 필요성을 깨닫고, 본국에 지식인들과 경험 있는 농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드디어 1793년 1월 16일 호주 최초의 자유 정착민 다섯 가정이 호주 땅을 밟았다.
 
이 중 Thomas and Jane Rose 가정이 있었다. 1793년 둘 사이에서 호주 최초의 자유민 백인 아이인 John Rose가 태어났다. 이들은 지금의 스트라스필드와 홈부시 지역의 땅을 분양 받아 농사를 지었다. 이 지역의 척박한 땅과 날씨에 대한 전이해가 없어 농사에 실패했다.
 
1802년 로스 가정은 기름진 혹스베리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으나, 홍수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1809년 지금의 이곳으로 이주하여, 1811년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집인 Rose Cottage를 지었다. 당시 토마스 로스는 지식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개척자 마을의 주소는 번지수도 없이 Rose. St. Wilberforce이다. 부인은 1827년, 그는 1833년 11월 15일 죽어 윌버포스의 성 요한 공동묘지에 잠들었다.
 

▲ 1890년대 경에 건축한 성 마태교회 전경.     © 크리스찬리뷰


호주 개척자 마을 (Australiana Pioneer Village)

호주 개척자 마을의 역사는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세계수상스키 대회의 심판으로 참석했던 빌과 매리 맥라클란(Bill and Marie McLachlan)은 Knotts Berry 농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농장을 돌아 보며 호주에도 이와 같은 농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호주로 돌아와 자신들의 꿈을 단계적으로 실현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개척자 마을의 대지를 매입하고, 이곳으로 호주의 오래된 건물들을 트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을 상세히 찍은 DVD를 보았다. 허허 벌판이었던 이곳에 컨테이너 트럭으로 하나씩 집을 옮기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안타깝게도 빌은 개장 후 다음 해인 1971년, 부인은 2003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지금 마을 안의 성 마태 교회 앞에 나란히 누워 있다.
 
빌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호주 개척자 마을의 창시자, 자동차 스포츠맨, 워터스키의 개척자, 진정한 호주인"
 

▲ 성 마태교회 오르간(풍금)     © 크리스찬리뷰


우리는 '월트 디즈니'를 알고 있다. 그의 '디즈니랜드' 발상은 어느 일요일 딸들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를 계획하게 된 것이다. 월트 디즈니는 1955년에 '디즈니랜드'를 만들었고, 1971년에 '디즈니월드'를 완성했다.
 
플로리다주의 올랜도 시에 위치한 세계적인 테마파크로, 총 면적이 100 제곱킬로미터(약 3천만 평)로 그 규모가 세계 최대이다.
 
디즈니 월드를 개관하는 날 ‘월트 디즈니'는 이 세상에 없었다. 사회자가 인사말에서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 월드를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디즈니의 부인이 인사를 대신하며 말했다.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월드를 보았습니다. 만들기 전에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 성 마태교회 장식품     © 크리스찬리뷰


호주 개척자 마을의 자원봉사자들

이곳의 홍보를 담당하는 Janice Hart와 회장인 Kevin Weeks를 만났다.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호주 개척자 마을은 4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로 운영이 되고 있다. 그곳에 이런 글귀가 있다. 
 
"자원봉사자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가치해서(worthless)가 아니라 그들의 가치를 측량할 수가(priceless) 없어서입니다."
 
나는 Janice과 함께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학이라서 여러 곳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하였다.
 
"이곳은 1970년에 문을 열었지만 그 후에 주인이 몇 번 바뀌면서 관리할 사람이 없어 2001년에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2011년부터 '호주 개척자 마을의 친구들'이라는 자원봉사 단체가 결성되면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처음에는 많은 봉사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부부 중 한 사람만 일을 했는데, 이제는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서 마음은 있지만 시간을 내기가 힘듭니다."
 
이곳에 오면 초기 호주 마을을 재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특별히 내 관심을 끈 것은 '성 마태 교회'이다. 교회는 1890년대 경에 건축한 것으로 원래는 Macoonald 계곡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교회는 예배하는 장소이자 만남의 장소이고, 식민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마을 후면에 1889년에 세운 Marsden Park 초등학교가 있었다. 다른 건물들은 컨테이너 트럭으로 이동 가능한 사이즈지만, 이렇게 큰 학교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궁금했다.
 
"학교도 컨테이너 트럭으로 옮겼습니다."
 

▲ 성 마태교회 내부 전경     © 크리스찬리뷰
 
Janice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Janice는 십자가가 서있는 Memorial Park으로 기자를 인도했다.
 
"지금까지 호주가 참전한 전투를 기념하여 만든 곳입니다. ANZAC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이곳에서 행사를 합니다."
 
- 그렇다면 한국전 참전 팻말도 이곳 어디에 있겠군요?
 
Janice는 이차대전 옆에 있는 한국전 팻말로 안내했다. 'Korean War 1950-1953' 한국어로는 한국전쟁, 6.25 전쟁인데 영어로는 '한국인 전쟁'이다.
 

▲ 호주 개척자 마을 자원봉사자인 제이니(왼쪽)와 케빈이 본지 영문편집인 김환기 사관과 인터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Kevin과 Janie과의 인터뷰

회장인 Kevin은 검은 옷에 하얀 목도리를 하고 제독과 같은 모자를 섰다.
 
 - 항상 그런 옷을 입습니까?
 
"아닙니다. 이 옷 말고도 안에 몇 벌이 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옷은 내가 제일 즐겨 입는 옷입니다. "
 
그는 넉넉한 풍채에 아름다운 미소와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 이곳의 역사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호주 개척자 마을 시설들     © 크리스찬리뷰


"이곳은 1970년 개장했습니다. 카운슬의 자산이지만 자원봉사자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 건물들이 대부분 Heritage인데 카운슬에서 유지비나 운영비를 주지 않나요?
 
"카운슬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가끔 특별 지원금을 받을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이곳은 자선단체와 학교의 중간 형태의 조직입니다. 자선단체 지원금은 자선단체로, 학교 지원금은 학교로 가게 되니 우리는 샌드위치 같은 형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입장료도 정말 저렴합니다. 입장료만 가지고 운영하기가 쉽지가 않죠."
 
이곳의 입장료는 어른이 $5, 아이들은 $3, 가족은 $15이고 5살 미만의 아이는 무료이다.
 

▲ 1879년에 세워진 꿀 파는 가게. 현재는 기념품을 팔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한 번 온 사람들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Teddy Bear의 날도 있고, 말의 생일날도 있습니다."
 
옆에 서 있던 Janice가 1년의 행사표를 건네주었다. "현재는 주일과 학교 방학 때만 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원봉사자가 많아지면 다른 날도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외에 아래와 같은 특별한 날에 개장합니다."
 
△24th April our Anzac Day service △1st May May Day, 8th May Mothers Day △13th June Mad Market Monday △26th June William Wilberforce Day △5th, 6th, 12th, 13th July school holidays △24th July Teddy Bears Picnic△7th August Horses Birthday △4th September Fathers Day, 27th and 28th September △4th and 5th October school holidays, 3rd October Mad market Monday, 30th October all soles day  △6th November remembrance Day, 27th November 45th birthday of the village △All of the above dates are 10-4, 2nd December Twilight markets 5pm-10pm
 

▲ 호주 개척자 마을에서 운행 중인 마차.     © 크리스찬리뷰


Kevin은 나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만약 교회에서 단체로 방문하면 성 마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르간이 있으니 반주자도 오면 됩니다."
 
- 좋은 제안에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교인들과 함께 의논하여 보겠습니다.
 

▲ 양털깎기 쇼에서 어린이들에게 설명하는 케빈 씨.     © 크리스찬리뷰


Kevin은 오후 1시에 있을 '양털깎기 쇼'를 준비하기 위해 안으로 갔다. 잠시 시간이 있어서 마차를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마차가 좌우로 흔들려 포장된 도로에서도 타기가 힘든데, 수만 킬로의 배를 타고, 수백 킬로의 비포장 도로를 달려와서, 이곳에 마을을 세운 사람들의 개척 정신에 탄복할 뿐이다.
 
개척자 마을의 풍경

호주 개척자 마을의 중심 거리에는 대장간, 여관, 이발관, 은행, 주점, 은행, 경찰서 등의 건물로 즐비하였다. 마을이 크면 대장간이 두 곳이다.  동물을 위한 대장간과 사람들의 생필품을 만드는 대장간이 구분되어 있다.
 
1856년 건물인 이발소에는 하얀색 바탕에 빨강색이 줄이 있는 원통이 걸려 있다. 원래 이발소의 상징은 하얀색, 빨강색 그리고 푸른색이다. 하얀색은 붕대, 빨강색은 동맥 그리고 푸른색은 정맥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이발사가 머리를 깎을 뿐 아니라 외과 의사도 겸했다고 한다.  1969년 처음으로 이곳에 옮긴 건물이다.
 
오후 1시에 Kevin을 '양털깎기 쇼'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능숙한 언어로 양에 대해 설명하고, 어떻게 털을 깎는지 모형양으로 시범을 보였다. 그곳은 Penrith City Council의 방학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위해서 Kevin은 친절하고 능숙하게, 유머를 사용하면서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오후 2시에는 중심 거리에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상황극이 펼쳐졌다. 비가 와서 조금 우려했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시작되었다. '뚱뚱한 노예 상인이 수갑을 찬 4명의 꼬마 죄수들을 끌고 나왔다. 상인은 그들에게 죄명을 묻고, 경매를 시작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죄수에게 채찍질을 하기도 한다. 구경꾼이 돈을 주고 죄수를 산다. 죄수로 나온 아이들의 연기가 너무 천연덕스러웠다.'
 
200년 전 영국을 떠나 윌버포스에 삶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기자는 시드니로 핸들을 돌렸다. 이제 호주 개척자 마을 팸플릿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  호주 개척자 마을    © 크리스찬리뷰
 
"추억의 길을 함께 걷지 않겠습니까! 다음 세대가 볼 수 있도록, 자랑스럽게 과거를 보존한 곳입니다." (Take a nostalgic walk with us where we are "proud to preserve the past" for future generations to see.) 〠
 
*홈페이지: http://theapv.org.au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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