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손양원 기념관

‘조선의 작은 예수’ 손양원

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5/30 [12:08]
▲ 경남 함안군에 세워진 손양원 목사 생가(왼쪽)와 애국지사 손양원 기념관(가운데). 오른쪽 칠원교회는 손 목사의 모교회이며 손양원 목사 기념교회로 세워졌다.     © 크리스찬리뷰


경남 함안군 칠원읍 생가터에 ‘생가’ 복원 및 ‘손양원 기념관’ 건립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를 기리는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기념관’이 손 목사가 태어난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 생가터에 초가로 복원된 생가와 함께 지난해 10월 건립됐다.
 
기념관과 생가 복원은 손양원 목사의 모(母)교회인 칠원교회가 2008년 생가터를 사들이면서 시작돼 2010년 산돌 손양원 기념 사업회가 설립되면서 본격화했고, 국ㆍ도비와 군비 등 55억 원을 들여 손 목사의 순교 65주기에 맞춰 개관되었다.
 
▲ 생가터에 복원된 손양원 목사 생가와 손 목사의 9가지 기도비문이 기념관 입구에 세워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손양원 기념관은 부지 3천656㎡ 위에 전시장, 기록보관실, 영상실, 사무실 등을 갖춘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지어졌다.
 
손 목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손종일 지사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해 일제 강점기와 좌우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근ㆍ현대사를 ‘용서와 사랑, 화해와 헌신’이라는 가치로 살다 간 인물이다. 아버지 손 지사는 1919년 3월 23일 칠원에서 일제에 맞서 궐기한 '칠원장날의거'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 장로였다.
 
손양원은 1929년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감만동 한센병 교회(상애원)에 전도사로 부임해 한센병 환자와 첫 인연을 맺었으며, 1939년 7월 14일 여수 한센병자 교회인 애양원교회에 제2대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한센병 환자와 식사와 잠자리를 함께하면서 치료와 기도를 해줘 '신앙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 관람객들     © 크리스찬리뷰

손 목사는 '성경에서 우상숭배는 금지하고 있으며 조선 사람이 일본의 개국신과 일왕에게 참배할 이유가 없다'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다 1940년 광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투옥 중 담당 검사가 신사참배를 하면 나갈 수 있다고 회유했지만 끝내 거부했다. 그는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고 1943년 10월 8일 청주보호교도소로 이송되었는데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야 출소했다.
 
▲ 강병도 창신 학원장(오른쪽)과 이인식 전 창신고 교장(왼쪽)이 본지 발행인을 안내했다.     © 크리스찬리뷰

출소 뒤 보금자리인 애양원교회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자 가족사에 참혹했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8년 10월 이승만 정부가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내리자 여수 주둔 군대가 거부하면서 봉기한 것이다. 
 
▲ 손양원 기념관 안내판     © 크리스찬리뷰

당시 손 목사에겐 두 아들 동인•동신이 있었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좌익학생들이 두 아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했고 두 아들은 1948년 10월 21일 총살당했다. 사형 당시 아들 동인•동신의 나이는 각각 24세, 19세였다. 그런데 반란이 진압된 뒤 아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한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이 계엄군에 체포돼 사형을 당할 처지에 놓이자 손 목사는 계엄사령관에게 석방을 요청했다.
 
손 목사는 자신의 노력으로 풀려난 좌익 청년을 양자로 삼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고려성경고등학교로 진학시켜 전도사로 길러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 애국지사 손양원 기념관 전경. 부지 3,656m2 위에 지상 2층 지하 1층의 규모이다.     © 크리스찬리뷰

손 목사는 이때부터  '20세기 사랑의 사도'로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1950년 6•25가 발발했으나 손 목사는 한센병 환자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교회를 지켰다. 손 목사는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9월 28일 여수의 한 과수원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48세였다.
 
▲ 손양원 목사 생가 앞에서 손 목사의 양손자 안경선 목사와 권순형 발행인(왼쪽)     © 크리스찬리뷰

호주 선교사들의 신앙을 이어받은 손양원 목사는 전도사 시절 ‘한센인의 친구’로 알려진 호주 선교사 매견시 목사(James Noble Mackenzie)를 상애원에서 만나 그의 헌신적인 사랑과 정성에 감동받고 한센환자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1926년~1934년).
 
▲ 손양원 목사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사람들의 사진과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또한 창신학교 3대 교장인 맥크레이(John MacRae) 선교사는 손 목사가 칠원보통학교 시절 동방유배 거부로 퇴학을 당하자 복교할 수 있도록 힘썼으며, 손 목사의 소년 시절에는 직접 세례를 맡기도 했다. 〠 <함안=권순형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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