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3대 사역을 진주에서 이루다

[인터뷰] 휴 커를 외손자, 기드온 루더포드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6/06/27 [12:04]
호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 휴 커를(Dr. Hugh Currell)

 2016년 7월호 표지  © 크리스찬리뷰

최초의 한국 선교사는 목사가 아니라 의사이다.  1884년 9월 20일 알렌 선교사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딤으로써 한국 기독교 선교가 시작됐다. 의사였던 알렌은 갑신정변으로 다친 민영익을 고침으로 신임을 얻어 최초의 근대병원인 광혜원을 세울 수 있었고, 의학교육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1885년 4월 5일에는 목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로 입항하게 된다. 
 
▲ 최초의 한국 선교사 알렌 의사(가운데)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왼쪽)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호주 최초의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호주 첫 한국 선교사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1856-1890)이다. 그는 누이 메리(Mary Davies)와 함께 1889년 10월 2일 부산을 거쳐 이틀 후에 10월 4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8월 21일 멜본을 떠나 시드니, 홍콩, 일본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긴 여정 후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언어 공부 후 서울을 떠나 도보로 경기도 수원, 충청도 공주 그리고 경상도 지방을 거쳐서 목적지인 부산에 4월 4일 도착했다. 하지만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이 겹쳐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4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온지 6개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83일째 되는 날이다.
 
▲ 진주 배돈병원 한•호 의료진. 왼쪽 2번째 남자는 한국명 마라연으로 알려진 맥크라렌 선교사로서 그는 한국에 온 첫번째 신경정신과 의사였다.     © 크리스찬리뷰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선교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빅토리아 주 청년연합회(YFU, 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와 '여선교연합회'(PWMU, 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그리고 빅토리아 장로교회 해외 선교부가 연합하여 한국에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특별히 여선교연합회(PWMU)는 1890년 8월 25일에 조직되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여성들이 헨리 데이비스의 한국선교에 큰 감동을 받고 한국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여선교연합회(PWMU)는 미혼 여성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 ‘여성을 위한 여성의 선교’(Mission work of women for women) 정책을 세웠다. 1900년 대를 경과하면서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호주장로교회 총선교비의 70% 정도를 한국 선교에 사용하였다. 1902년 5월 19일, 호주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는 최초의 의료 선교사인 휴 커를(Dr. Hugh Currell)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 호주인 최초로 한국땅을 밟은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누이 메리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호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
커를(Dr. Hugh Currell, 한국명: 거열휴)


커를은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의 부모는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권유하였고 본인 또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커를은 목회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의료 선교사가 될 것인가, 고민하는 끝에 그는 의료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아일랜드 로얄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일 년 반 동안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방에서 의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원래 만주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1899년 호주 빅토리아주로 이민을 갔다.
 
호주에서 의사로 활동하는 중에 한국 선교사인 아담슨(Adamson)을 만남으로 한국 선교의 비전을 품게 되었다. 커를은 부인과 함께 1902년 멜본을 출발하여 시드니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 배돈병원 초창기 한국인 간호사들     © 크리스찬리뷰

부산에 도착한 커를은 부산진의 일신여학교의 작은 교실 하나를 빌려 시약소(Dispensary)로 시작하였다. 그의 사역의 지경이 점점 넓혀지면서, 1903년에는 엥겔(왕길지)목사와 함께 순회진료를 다니며 치료와 시약을 베풀었다. 당시 부산지방에는 미국인 의사와 일본인 의사도 있었다.
 
커를은 시약소도 없는 경남지방의 다른 곳에서 봉사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1905년, 커를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허락을 받고 부산을 떠나 진주로 갔다. 진주에는 병원은 물론 시약소나 어떤 형태의 서양 의술도 소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커를은 진주 땅을 밟은 첫 서양인이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진주 선교지부를 개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 호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 휴 커를 의사와 부인 에델 커를 선교사.(1929)     © 크리스찬리뷰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 ‘진주’
 
진주는 1925년 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다. 남도 제일의 양반고을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강했던 곳으로 보수적인 곳이었다. 당시 사회 신분상의 계급 의식이 강했고 외래적인 것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이었다.
 
백정해방운동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한 진주는 배일사상이 강한 곳이다. 한성과 평양은 물론이고 경상남도 지방에도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유독 진주만은 일본인이 발을 붙이지 못했던 곳이다. 아마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하여 본다.
 
▲ 배돈병원 초창기 한•호 의료진     © 크리스찬리뷰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때 최초로 수성에 성공한 전투이다. 이는 군과 민이 합심하여 전장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일본의 1차 공격을 막아낸 전투이다. 김시민이 이끈 진주대첩은 권율의 행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진주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논개이다. 일본의 2차 공격으로 진주성이 함락되고 왜장들은 촉석루에서 축하 연회를 열었다. 이때 관기였던 논개는 왜장을 남강으로 유인하여 그를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 훗날 그녀의 애국충절을 기리며 떨어져 죽은 바위를 '의암'(義巖)이라고 불렀다.
 
선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제임스 맥켄지(Rev. James N. Mackenzie) 선교사는 1913년 10월 첫 딸 헬렌(Helen Pearl Macqenzie)을 '진주'에서 나서 중간 이름에 'Pearl'을 넣었다. 

▲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부산 최초의 근대식 건물 일신여학교가 지난 2003년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원형을 복구, 2010년 4월 일신여학교 기념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휴 커를 선교사는 이곳에서 교실을 하나 빌려 시약소를 시작했다.     © 크리스찬리뷰

진주 선교부 설치
 
호주장로교회는 1892년 한국 선교부를 부산에 설치한 이래 1905년 진주에 선교지부를 세워 선교지역을 넓혀갔다. 커를이 부산을 떠나 진주에 도착한 날은 1905년 10월 20일이다.  이날 커를과 동행한 조선인이 있었는데 박성애와 그의 부인 순복이었다.
 
박성애는 커를 의사의 조수로서 부산에서 함께 일했는데 후일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진주 지방의 첫 한국인 목사가 되었다.
 
커를 가족과 박성애 부부는 진주에 도착하여 진주 성내면에 있는 정경철 씨 소유 초가집을 임시 거주지로 얻었는데 이곳은 당시 진주의 중심가에 위치한 곳이었다. 이곳 한옥에서 일정 기간 박성애 부부와 함께 지낸 커를 의사는 도로변의 방 한 칸을 시약소로 사용하였다. 커를과 박성애 부부가 전도를 하여 얼마간의 교인을 얻고 진주읍 북문내에 있는 초가삼간에서 임시로 집회를 갖다가 다음해에 옥봉 2동에 예배당을 신축하여 이루어진 1905년 진주교회를 세웠다.
 
▲ 봉래동 진주교회 전경     © 크리스찬리뷰

커를 의사 부인은 진주지방에서의 서구식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기집 정원에서 작은 여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906년이었다. 남자를 위한 초등학교 교육도 시작하여 후일 시원 여학교와 광림 남학교로 발전하였다.
 
커를은 예수의 지상 3대 사역인 교육(teaching), 치유(healing), 복음(preaching) 사역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3가지 사역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아마 커를은 교육, 치유, 복음 사역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선교사일 것이다.

▲ 1910년 경 호주선교부 진주지부가 있던 비봉산과 봉래동 일대 전경. 오른쪽에 호주 선교사 사택과 배돈병원, 시원여학교가 보인다.     ©크리스찬리뷰
 
교육 (Teaching Ministry) - 학교
 
개신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1885년 선교사가 세운 최초의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스크랜튼 부인에 의하여 1886년 5월 31일에는 최초의 여성학교인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다. 진주에는 1906년 커를 부인이 시작한 ‘시원학교’(The Nellie R. Scholes Memorial School)는 1921년 당시 재학생이 2백50여 명에 이를 만큼 크게 성장하였고, 이 지역 유일한 여학교로 명망을 얻었다.
 
1907년에는 교육학을 전공한 스콜스(Miss Nellie R. Scholes)양이 진주에 파견되었는데, 그녀는 진주 지역 교육책임자로서 1919년 4월 사망시까지 값진 봉사를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학교 이름을 스콜스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시원여학교’(The Nellie R. Scholes Memorial School)라 명명하였다.
 
시원여학교와 더불어 남학생을 위한 광림학교가 호주 선교부에 의해 운영되었다. 호주 선교부는 남학교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한국인 교회에 운영을 위임한다는 정책을 견지하였지만, 광림학교만은 호주선교부 예산으로 유지되었다. 당시 진주의 한국교회가 광림학교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선교부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광림학교 운영에 필요한 선교비 충당에 어려움이 있어 1929년 광림학교는 폐교되었다.
 
▲ 진주교회는 지난 2011년 5월 23일 휴 커를 선교사 기념관(오른쪽)을 세우고 세계에 복음을 전할 것을 기념비에 새겼다. 기념관에는 1905년부터 시작된 호주장로교의 진주 선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호주 선교 역사관도 설치했다.     © 크리스찬리뷰

불행하게도 오늘날 '시원여학교'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일본은 호주장로교 선교부에 신사참배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문제는 학교 폐쇄를 포함한 중대한 문제여서,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로 이관되었다. 해외 선교부에서는 특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가능하면 중도적 방안을 찾을 것을 제안하였다.
 
호주장로교 선교부 ‘참배’ 대신 ‘묵도’하기로 동의하면서 해결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1938년부터 강력하게 압박을 시작하였다. 이미 1938년 9월 9일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장로교 제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참배를 가결한 상태이다.
 
호주 선교부는 1939년 6월, '호주 선교부는 당국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바로 학교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 그 결과 부산진, 마산, 진주에 있는 세 개의 여학교가 일제 치하에 들어갔다. 
▲ 진주에서 태어난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의 큰딸 헬렌. 그녀는 일신병원을 세우고 초대 원장을 지냈다.     © 크리스찬리뷰

치유 (Healing Ministry) - 병원
 
1885년 4월 10일 알렌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광혜원은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병원이다.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1904년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로 한국 최초의 종합병원으로 발전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 커를은 경남지방 최초의 ‘배돈병원’(Paton Memorial Hospital)을 세웠다. 이 병원은 호주장로교회의 탁월한 선교사였던 페이튼(Paton)여사를 기념하기 위한 뜻으로 설립된 병원이다. 페이튼은 호주뿐 아니라 앵글로 섹슨계에서 영향력 있는 선교사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개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 1858년부터 1862년까지 '뉴헤브리디스'(바누아트)에서 사역을 했다. 그 후 선교지를 '아니와'(Aniwa)로 옮겨 1866년부터 1881년까지 선교를 하였다. 후일 한국 나환자의 친구가 된 맥켄지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 진주교회는 진주에서 최초로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함께 예배를 본 교회이다. 진주교회는 2013년 4월, 형평운동 90주년을 맞아 교회당 앞에 표지판을 세웠다.     © 크리스찬리뷰

배돈병원은 진료만이 아니라 간호사 양성에도 힘을 썼다. 배돈병원은 경남 유일의 선교병원으로써 이 지방 의료 선교의 중심병원의 역할을 감당했다. 초기에 간호는 젊은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져 남성이 했다. 첫 번째 여성 수습은 미망인과 문맹자들이었다.
 
1930년에 여자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 가운데 교육받은 여성 후보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뽑게 되었다.
 
이 병원 원장으로는 커를(1913-1915), 맥라렌(1915-1923), 테일러(1923-1938), 데이비스(1938-1941)가 봉사했다. 데이비스 의사의 1939년 보고서에 의하면 외래 환자수가 1929년 9천802명에서, 1937년에는 2만 7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입원환자도 298명에서 865명으로 늘어났다. 병원은 1938년 진주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폐쇄 당했을 때 주일학교 사역을 맡기도 했다.
 
1940년부터 일본의 압박과 방해로 선교사들은 사역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이차 세계대전 중에 병원은 경상남도 일본군 철도 본부가 되었고 폭격 당했다. 그나마 남았던 것은 1950년 육이오 전쟁 때 파괴되었다. 배돈병원이 있던 터는 지금은 통합 측 진주노회회관과 진주성서신학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 (한국명: 매혜란)은 일신병원을 세우고 초대 원장을 지냈다.     © 크리스찬리뷰

복음(Preaching Ministry) - 교회
 
한국 최초의 교회는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초가집 예배당으로서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이다.
 
이후 아펜젤러에 의해 1885년 정동제일교회, 언더우드에 의해 1887년 새문안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진주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5년 10월 22일이다. 커를 부부와 박성애 부부가 전도하여 얻은 첫 신자들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커를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첫 주일 아침 1905년 10월 22일, 단 2명의 구경꾼들이 호기심에 이끌리어 교회에 왔다. 곧 바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올해의 마지막 달에는 우리의 모임 장소가 너무 좁아서, 예배실 문을 열어 놓고 밖에도 교인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46명의 남자 어른들과 남자 아이들이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했다. 한국 형제들은 지금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 건물을 스스로 세우고 있다.
 
그리고 매주 화요일 밤에는 자매들끼리 모여서 별도의 집회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평균 62명의 여자 어른들과 여자 아이들이 모이고 있다."
 
▲ 진주교회(담임목사 송영의) 호주 선교 역사관에는 진주지방에서 사역한 호주 선교사와 진주교회 파송 선교사, 진주교회 100주년 행사 기념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첫 세례식은 1907년 6월 23일이었다. 이날 10명의 성인과 3명의 어린이가 세례를 받으므로 진주 지방에서 첫 세례자가 되었다. 진주교회는 1908년 말 당시 3백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은혜롭게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진주교회에 커다란 파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09년 5월 둘째 주일이었다. 커를이 안식년으로 진주를 떠난 지 7개월 후이었다. 1909년 4월에 리알 선교사(Rev. D.H. Lyall)부부가 진주로 배속되어 커를의 뒤를 이어 진주지역을 관장하게 되었다.
 
진주에 도착한 리알 선교사는 신분차별로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임 후 즉시 백정들과 일반 교인들이 함께 예배드릴 것을 제안하였다. 교인들 간에는 찬반양론이 있었으나 리알 선교사는 1909년 5월 둘째 주일부터 함께 드릴 것을 강행하였다.
 
이 사건은 진주교회의 첫 시련으로 5월 셋째 주일부터 동석을 반대하는 교인들이 진주교회를 떠나 별도의 집회를 시작하였다. 진주교회의 첫 번째 분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근대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중요한 일이었다. 한국역사 속에서 백정계급 인권해방의 기초가 되었다. 

▲ 휴 커를 선교사와 진주지부를 세운 박성애 부부. 박성애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지방 첫 한국인 목사(1918.11.11~1920.7.17)가 되었다.            © 크리스찬리뷰

진주 교회의 분열
 
진주교회는 장로교가 분열할 때마다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해방 후 한국 장로교는 세 번 분열의 역사가 있었다. 첫 번째 분열은 1952년 신사참배의 문제로 고신과 총회, 두 번째 분열은 1953년 신학 문제로 예장과 기장, 세 번째 분열은 1959년 WCC 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분리되었다. 교단이 분열할 때마다 진주교회도 나누어지게 되었다.
 
진주에는 진주교회가 두 개가 있다. 봉래동에 있는 합동 측 진주교회와 평안동에 있는 통합 측 진주교회이다. 두 교회는 창립일이 1905년 10월 22일로 같고 자신들이 커를 선교사가 세운 교회의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안동 진주교회는 1차 분열이 일어나는 시기인 1951년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뜻을 같이한 30여 명이 갈라져서 나와 YMCA 회관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시 봉래동 진주교회는 고신에 속해 있었다.
 
▲ 진주교회 신축예배당을 스케치한 그림     © 크리스찬리뷰

이후 구세군 진주영문을 60만 환에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나, 2차 분열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내분으로 다시 진통을 겪으며 예배당을 기장에게 넘겨주고 심경섭 장로 등 10여 가정이 분리해서 나와 통합 측 진주교회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1957년 4월 25일 현재의 평안동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1981년 연건평 300평의 예배당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이 분리된 후, 1960년 고신이 합동과 잠시 연합하였다가 1963년 다시 분리하지만, 봉래동 교회는 그대로  합동에 남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일제시대(1920년대 경) 시원여학교 운동회 장면. 운동장 가운데 일장기가 세워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커를 선교사 외손자 내외, 진주교회 방문
 
2015년 9월 12일 커를의 외손자인 ‘기드온 루더로포드’(Gideon Rutherford)씨는 봉래동 진주교회에 Email을 보냈다. 메일은 이렇게 시작한다.
 
"저의 어머니와 큰 어머니, 외삼촌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인 '휴 커를'(Hugh Currell)과 아내였던 '루시'(Lucy)는 진주 선교병원을 설립했고, 선교사역도 했습니다. 그분들은 1902년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진주를 몇 번 방문 한 후에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1915년에 떠났습니다."
 
기드온은 커를 선교사의 유일한 손자이다. 기드온의 어머니는 몇 번 한국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8년에 소천했다.
 
"유일한 손자인 저는 가족들의 소원대로 진주를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조사하면서, 진주교회가 저의 할아버지의 유산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기 위해 커를 기념건물도 헌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10월 22일 진주교회 설립 110주년 기념일이어서, 10월 저는 아내인 아드리안(Adrienne)과 함께 방문하는 것이 안성맞춤인 것 같습니다." 

▲ 신축한 진주교회당     © 크리스찬리뷰

메일을 받고, 진주교회는 창립 110주년 기념예배에 기드온 부부를 초청하였다. 그들은 중국항공을 타고 상해에서 내려 부산을 거쳐 진주로 갔다. 일 주일 일정으로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진주의 자랑인 의암을 방문하여 논개의 이야기도 들었다.
  
할아버지가 세웠던 교회들을 돌아보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분에 넘치는 환대로 조금은 당황도 했고, 식당에서 산낙지를 먹는 것을 보며 놀라기도 했다. 하동 전통 마을을 방문해서 감투 쓰고 긴 수염이 있는 훈장과의 만남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시골의 가을풍경을 보고 감탄도 했다. 전통 시장에서 낯선 물건들을 만지며 신기했다. 기드온은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시드니로 돌아왔다. 
 
▲ 1930년대 진주 시내 모습.(진주시 봉수동 ‘역사 유적 안내표지판’촬영)     © 크리스찬리뷰

기드온 루더포드(Gideon Rutherford)와 인터뷰
 
취재팀은 2016년 5월 25일 오전, 글리브(Glebe)에 있는 기드온 씨의 집을 찾았다. 그를 만나면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커를은 진주지부에 8개 교회를 세웠다. 신학교를 다닌 기록이 없는데 한국 자료에는 그를 '목사'라고 소개한 문헌이 있다. 그러나 영문 자료에는 ‘목사’라는 표현이 없었다.
 
기드온 씨 부부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기드온은 74세로 4년 전 일하던 의류업계에서 은퇴했다. 기드온은 서울을 두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마지막 방문은 올림픽이 열린 1988년인데 사업으로 갔기 때문에 다른 곳은 가보지 못했다.
 
오래 전 영국에서 근무할 때 친구가 아들레이드에 살고 있는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지금의 부인인 '아드리안'이다. 결혼 후 시드니에 집을 구입하여 40여 년간 한 곳에서 살고 있다. 아드리안은 지난해 한국에서 가지고 온 전통차로 우리를 대접했다. 

▲ 1906년 건립한 옥봉리 교회당(현 봉래동).     © 크리스찬리뷰

- 혹시 의사인 할아버지가 목사이기도 했나요?
 
차를 마시며 던진 첫 번째 질문이다.
 
"제가 알기에는 그런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기드온은 자료 하나를 건네주었다. 몇 년 전 변조은 목사(Rev. John Brown)가 기드온에게 보낸 할아버지에 관한 글이다. 자료를 살펴보니 이런 표현이 있었다.
 
"He was to sail from Sydney on 3 April. (Messenger, 7 March, p.93) In accordance with current practice for male missionaries, whether or not they had theological training, Dr. Currell was ordained on 18 March by a Victorian Presbytery."
 
보통 'ordain'이란 목사를 안수할 때 쓰는 용어인데, 선교사 파송할 때도 같이 사용했다. 아마 선교사도 '목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 휴 커를 선교사의 여권 전체     © 진주교회

- 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Ethel Anstey, 감리교 교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첫 부인과 사별한 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혼자 가는 것보다 결혼해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02년 결혼 후 곧 바로 같이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커를은 멜본에서 시드니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자료에는 부산을 'Fusan'이라고 표기했다.
 
- 한국 방문 때 하이라이트는 무엇이었습니까?
 
"진주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110년이란 오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는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할아버지를 소개했습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커를은 진주에 1905년 10월 20일에 도착하고, 10월 22일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렸다. 바로 진주교회의 창립일이다. 
 
▲ 휴 커를 선교사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는 여권. 부인과 자녀들의 이름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 진주교회

- 진주 교회에 많은 할아버지의 유품을 기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엇을 했습니까?
 
"네, 갈 때 할아버지 여권과 사진 등 소장하고 있던 유품들을 진주교회에 기증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 할아버지가 사역한 곳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쓰던 총도 가지고 가려고 했으나, 이민국에서 걸릴 것 같아서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한다.
 
- 어느 곳에 방문하셨습니까?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개척한 교회를 방문했고, 한국의 전통마을도 방문했습니다. 하동전통마을을 방문해서 할아버지가 활동했던 시대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시장도 들렸는데 신기한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커를 선교사는 진주교회(1905)를 비롯한 횡천교회(여의리교회, 하동, 1906), 진주 송백교회(1908), 하동읍교회(1908), 삼천포교회(동금리교회, 1908), 악양교회(하동 입석리교회, 1908), 반성교회(진주 창촌교회, 1908), 창선교회(남해, 상신교회, 1909년) 등 8개 교회를 세웠다. 
 
▲ 휴 커를 선교사의 아들 다니엘 군. 그는 1911년 9월 20일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1926년 1월 25일 멜본에서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진주교회

진주교회는 기드온 루더포드(Gideon Rutherford)씨에게 특별한 선물을 전했다. 기념패이다.
 
"진주를 비롯하여 삼천포, 남해, 하동, 찬선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설립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또 선교사님 부부는 진주에 남녀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시고 배돈 부인기념병원을 세워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호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인 휴 커를(Dr. Hugh Currell)의 업적을 한마디로 요약한 글이다.
 
"우리 진주교회와 교인들은 너무나 고귀하신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감당하신 커를 선교사님 가족을 언제나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커를 선교사님 후손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심에 그 감사하는 마음을 이 패에 새겨 드립니다.”
 
▲ 기드온 루더포드 씨 부부(왼쪽부터 4,5번째)가 한국 방문 중 진주교회 조헌국 장로(오른쪽) 등 교회 관계자들과 마산에 있는 경남 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찾았다.     © 크리스찬리뷰
▲ 기드온 루더포드 씨 부부.     © 기드온 루더포드
▲ 휴 커를 선교사 가족 사진. 장녀 사라 에델, 부인 에델(앤스티)선교사, 아들 휴 대니얼, 차녀 프랜시스(오른쪽부터).     © 진주교회

이 패에 새겨진 마음은 진주교회가 커를 선교사에게 드리는 마음인 동시에,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에 복음을 들고 생명 바치며 땀과 피를 흘려 헌신한 모든 선교사들에게 드리는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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