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 속의 고독

강승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6/27 [15:38]
스타벅스나 맥도널드는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에 매장을 두고 있는 커피와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다. 바쁜 일상에 찌든 사람들이 목마름을 달래며 쉬어가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장소이다.  시끌벅적하고 볼륨 업된 음악이 사람들의 멍든 마음을 달래는 곳이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스타벅스와 맥도널드에 들렀을 때 깜짝 놀랬다.

호주와는 전혀 다른 조용한 분위기였다. 음악도 잔잔하였고 친절한 종업원 앞에서 좌우를 둘러 보았을 때 순간 섬뜩한 낯선 분위기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말없이 혼자 커피를 마시거나 햄버거를 먹으면서 벽이나 창문을 응시할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없이 혼자서 창문만 바라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없는 창문 응시가 무섭도록 섬찟함을 느꼈다. 일본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진한 ‘고독’을 직접 보는 것 같아 순간 충격을 받았다.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너무 조용하다. 교회는 생명이 태어나는 산부인과 병동이나, 부상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 같은 곳인데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교회는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연주되는 호화로운 유람선 같은 곳이다. 내가 섬기기보다는 누군가가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허용되는 곳이다.

예배 중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본당 밖으로 아기 엄마들을 쫓아 버려도 당연시된다. 예배 시간에는 정적이 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듣기 원하는 설교, 나에게 감동을 주는 메시지를 들어야 은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만 듣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뿐만 아니라 선지자적 외침도 듣고 수용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고독은 단순히 홀로 있음이 아니다. 홀로 생각함이요, 홀로 결정함이며, 홀로 느낌이다. 그러기에 고독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옳고, 언제나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며,  언제나 자기 판단을 따라 사는 습관이 형성된다.

즉, 고독을 즐기다 보면 내가 주인된 삶을 살도록 부추김을 당하게 된다.  소통 없이 고독을 즐기다가 결국 주인된 예수님을 마음에서 쫓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단순히 현대사회에 나타난 현상이나 특징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도 진솔한 대화가 없는 사람들은 실질적인 고독을 경험한다. 얼굴 보고 사는 부부 간에도 생각이나 감정을 나누는 대화가 없다면 고독한 사람이 된다.
 
함께 예배를 드려도 옆사람과 속마음을 나누는 교우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는 고독한 사람이 된다. 교회에서 리더가 되어 사람들에게 충고를 잘하거나 잘 가르쳐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자세라면,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실제로는 고독한 사람이다.
 
사람은 수용성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소통할 수 있다. 인간은 희노애락 느낌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과 소통할 줄 아는 존재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 생각을 고치고 내 습관을 고쳐서 누구나 섬길 수 있고 헌신할 수있는 사람이 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마이동풍(馬耳東風), 또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말과 소를 들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짐승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수용하며 소통하는  존재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으라는 로마서의 말씀은, 짐승이 아닌, 사람에게 하신 이야기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고독을 즐기기보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이웃과 소통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강승찬|시드니새생명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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