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개혁주의운동

글|피터 번스, 번역|김석원 | 입력 : 2016/06/27 [15:49]
최근 들어 한국교회 내 이단의 공격과 성경적 원리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며 호주 한인 교계도 다르지 않지만, 이에 비해 호주를 포함한 전반적인 개혁주의신학 흐름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호주기독교역사학술지 ‘Church Heritage’ 2009년 9월에 실린 이 글은 특별히 우리가 사는 호주 내 개혁주의 신학의 흐름과 이슈를 정리한다. 
 
이 글의 저자인 피터 번즈(Peter Barnes)는 현재 리버스비 장로교회 담임이자, 한인사회에서도 자주 소개된 개혁주의적 교회사학자다. 이 글은 호주장로교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지만, 호주 내 보수적 개혁주의 운동의 전반적인 역사, 이슈, 앞으로 전망을 읽어내기에 충분한 도움이 된다. 저자의 양해를 얻어 편역과 함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  )으로 부연설명을 첨부했으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자주)

역사의 요약은 장단점이 있지만, 호주의 개혁주의 역사의 요약은 문제가 더 많다. 먼저 칼빈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구원론을 다룰 때만 적용하고, 어떤 이들은 칼빈주의 5대 교리(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의 영어 앞글자를 따 TULIP이라고도 부른다)를 다 따르는 신앙을 말한다. 시드니 복음주의자들의 많은 수가 이 중 ‘제한적 구속 교리’를 빼고 네 가지만 따른다.
 
▲ Abraham Kuyper     © 크리스찬리뷰
▲ B. B. Warfield     © 크리스찬리뷰


1898년 미국 프린스톤대학 스톤기념 강좌에서 (화란개혁주의를 대표하는)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좀 더 포괄적으로 정의해서, 삶의 틀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장로교에 영향을 많이 미쳤던 프린스톤신학의 대표자) 밴자민 워필드의 정의는 날카롭다. “칼빈주의는 순수한 형태의 기독교다. 기독교의 본질만 추려내면 칼빈주의가 나온다” 그도 조나단 에드워드의 표현처럼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느끼며 이뤄지는 지정의 전체가 관련된 삶의 방식이며, 이를 통해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관계 속에 이뤄지는 삶의 모든 지적, 윤리적, 영적 활동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호주의 교회사가 말콤 프랜티스도 논조도 이와 비슷하다. “칼빈주의는 스코트랜드에 흔히 알려진 대로 칼빈주의적 가치관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종교생활 및 일반 사회 전반에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윤리적 진지함, 경건성, 검소함, 교육에 대한 강조, 세상 속에서의 금욕주의,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책임과 강조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호주사회에 미친 칼빈주의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1960년 중반은 모든 교회에게 재앙의 시기라고 불릴만 했다. 물론 스터드 피긴스는 1959년 빌리그래함 전도집회가 ‘전반적인 영적 각성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고’, 이후에는 좀 더 단호하게 “확실히 영적 부흥, 위대한 부흥”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엔 설득력이 약하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당시의 전도운동은 신학 내용이나 조직교회의 부흥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60년대 주일학교 등록자 수는 확 줄어들었고, 교회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형식적으로만 믿는 현실과 씨름해야 했다. (성경연구자인) 월리엄 바클래이와 (긍정적 사고 신학의 아버지) 노만 빈센트 필의 시대에서 (전통기독교을 부정했던) 존 로빈슨과 (자유주의적 성공회지도자) 피터 카니의 시대로 변하고 있었다.
 
개혁주의 교단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개혁주의 신앙을 재발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많은 화란개혁교회 신자들이 호주로 이민을 왔다. 이 중 40% 이상이 카톨릭교도이긴 했지만, 1958년 10월에는 총 10만 명을 기록했다. 1950년 9월 화란개혁교단(GKN)에서 파송한 얀크래머 목사는 당시 호주장로교회의 자유주의 신학과 프리메이슨과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결국 1951년에는 따로 첫번째 호주개혁교회가 세워졌고, 이들의 정식교단명은 호주기독교개혁교회 CRCA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많은 개혁교회 소속과는 상관없이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학부모 참여 기독교 학교운동 설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부류의 학교로 처음 생긴 것이 1962년 1월 20일 타스마니아의 킹스톤에서 3명의 교사와 77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칼빈크리스찬스쿨이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는 특히 타스마니아의 많은 침례교인들도 (칼빈주의의) 은혜신학을 받아들였다. 론세스톤에 위치한 WEC 신학교 교장이었던 로리 린콜른 목사를 비롯 많은 침례교인들이 개혁주의를 받아들인 후 1961년 복음장로교단 EPC를 세웠다.
 
EPC는 한동안 내부갈등을 거쳐 1964년까지 입장을 정리해, 보편은혜론(구원은 하나님의 사전 선택에 달리지 않았다는 주장)과 보편구원론(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주장)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호주장로교회 안에서의 칼빈주의는 1977년에 연합교회가 만들어진 후부터 호주장로교안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합교회로 가지 않고 남은 교회로 구성된 새로운 호주장로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 WCC와 거리를 두고, 신앙적으로 프리매이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공식적으로 채택했고, 1991년에는 여성 안수 안도 철회했다.(연합교회 이전에 호주장로교회는 여성 안수를 허락했다)
 
1992년 호주장로교 NSW주 총회는 앤드류 칼리지(교단 소속의 시드니대 기숙사 칼리지인)  학장인 피터 카메론이 여성 안수문제에 대한 설교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가진 권위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교회재판에 회부했다.
 
이전에 호주장로교회 안에 있었던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분열했던 군소 장로교단사이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예를 들어 동호주장로교단 PCEA (시편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유명하며 Free Kirk로 불렸다)와 장로교개혁교회 PRC (1967년 호주장로교회의 자매교단이 뉴질랜드장로교단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희망의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로이드 기링 교수에 대하여 이단으로 취급하기를 거부함에 반발하여 분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호주장로교단의 칼빈주의자들 존 녹스가 칼빈의 제네바교회를 가르켜 ‘사도시대 이후 이 땅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말한 비전을 호주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쉽지 않았다.
 
1994년 장로교회목사인 스티븐스는 ‘이른바 칼빈주의 오대교리에 대한 평가’란 책을 냈는데, 여기서 그는 ‘오대교리는 잘못되었으며, 분열을 조장하는 교리’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슷한 맥락에서 스탬프 목사는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책을 통해 성경은 영감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무오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멜본 장로교신학교의 더글라스 밀런 교수는 설득력있는 반박문을 냈지만, 이들에 대한 교단차원의 치리는 없었다.〠 <다음호 계속>

피터 번즈|리버스비장로교회 담임목사
김석원|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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