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 일기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6/06/27 [15:53]
▲ Blue Mountains     © 크리스찬리뷰


ㅇ월 ㅇ일
새벽에 눈을 뜨면 창문을 활짝 열고 밭을 바라보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밭에 가득한 희망의 채소 가족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은 나의 큰 기쁨이다.
 
하얀 나비떼가 날고, 때로는 새들과 꿩 일가족이 모이를 찾으려고 나들이 오기도 하는 우리 밭에선 계절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필요한 양식을 제공한다.
 
우리밭에서 키워낸 오이, 홍당무, 상추, 고추, 아욱 등을 먹을 때는 간절한 감사기도가 몇 번이고 절로 새어나왔다. 밭과 함께 살면서부터 나는 하늘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비가 안와도 걱정, 너무 와도 걱정인 농부의 안타까운 마음을 좀 더 깊이 헤아릴 줄도 알게 되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밭의 겸허함과 참을성, 인간의 노력에 정직하게 응답해주는 그의 성실성과 개방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가운데 나의 삶도 구체적으로 퐁요로워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늘 열려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누워 있는 밭. 그러나 누군가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 있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밭. 매일 다시 시작하는 나의 삶도 어쩌면 새로운 밭과 같은 것이 아닐까.


▲ 필자 뒷마당     © 크리스찬리뷰


ㅇ월 ㅇ일
 
오늘 산책길에서 마주친 한 마리 고운 새의 이름을 찾아야겠다. 인기척에 놀라 금방 도망갈지 모르니 좀더 우리 숲길에서 놀다갈 수 있도록 되돌아가자며 내 팔을 잡아 끌던 아내의 그 마음씨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늘고 여린 그의 음성이 내 안에 고운 새의 발자국처럼 찍혀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꽃이나 나무 이름에 비해 새 이름은 조금밖에 몰라 새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새들과 더 친해지려면 그 이름을 알아 불러주고 각각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알아서 아껴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우리가 가까이 가려면 이내 저만치 달아나 버리고 마는 새는 그 겉모습보다 그냥 소리로 친해지고,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     © 크리스찬리뷰


ㅇ월 ㅇ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사람도 그렇다
   (들꽃)
 
이름 없는 풀, 이름 없는 새, 이름 없는 순교자, 이름이 없음으로 하여 왠지 더욱 가깝고 순결하게 느껴지는 것들.
 
사람들 사이, 사물들 사이 뽐내는 이름들이 하도 많아, 더욱 돋보이는 하얀 무명성. 세상이라는 이 큰 산에서 이름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담담할 순 없는 것일까. 바위틈에 숨어 핀 이름 없는 들꽃처럼 그렇게 조용히 비켜 살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     © 크리스찬리뷰


ㅇ월 ㅇ일

숲길을 거닐다 보면 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솔방울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나는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어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중의 한두 개는 꼭 방으로 들고 오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 서재에는 지금도 수십 개나 되는 솔방울들이 책상 위에, 서가 위에 수북히 쌓여있다. 모양도 어떤 것은 둥그스름하고 어떤 것은 약간 갸름한 편이다.
 
새로운 솔방울을 하나씩 방 안에 들여놓을 때마다 나는 마치 우리 소나무 숲을 그대로 옮겨라도 오는 듯 기쁘고 풍요로운 마음이 된다. ’솔방울’ ‘솔방울’ 하고 마음속으로 거듭 뇌어 보면 그 어감 또한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솔방울들이 때로는 금빛, 은빛으로 옷 입혀져 성탄 장식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나에겐 아무래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훨씬 더 정겹고 아름답게 보인다.


▲ 카슬부룩 공원묘지     © 크리스찬리뷰


ㅇ월 ㅇ일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이의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구순이신 어머니를 방문했을 때 그분은 문득 “얘, 내가 죽으면 갑자기 당황할까봐 우선 수의와 영정사진을 준비했다. 묘지도 준비했는데 시간이 나면 한 번 다녀와라”하시며 쓸쓸히 웃으시는데 가슴이 찡했다.
 
성경을 잠시도 놓지 않으시며 텔레비젼 뉴스며 시집을 읽으시는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할 때면 틈틈이 내게 보내주신 사진첩, 수예품, 꽃씨, 과일나무들이 더욱 정겹고 소중하다. 그분의 모습에선 늘 청빈의 나무향기가 난다. 시집갈 때 만들었다는 낡은 바느질 바구니와 가위, 골무 그리고 작은 자개장 외엔 지닌 것이 없는 어머니는 자신을 ‘바보’라고 표현하신다.
 
하루의 일과는 꼭 한 잔의 커피로 시작하시고, 노인회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하시는 신식 할머니지만 또한 꽃과 채소밭을 가꾸시고, 양말이며 옷가지들을 깁는 조용한 맛도 잃지 않으신다. 스물여섯에 혼자되시어 우리 삼 남매 뒷바라지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늘 기쁨으로 충성을 다했고, 살아오면서 불평이나 험담을 안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다 보니 침묵과 절친한 사이가 됐노라고 스스로 고백하시는 그분에게서 신실한 성도의 모습을 본다.
 
늘 빠듯한 살림이지만 절약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기도의 보물창고가 되어주시는 어머니, 손녀뻘이나 되는 사람에게도 먼저 인사하시며 깍듯이 존칭어를 쓰시는 그분의 겸손은 변함이 없으시다. 비교적 부유했으나 완고한 집안에 태어나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못하셨지만 거의 틀리지않는 맞춤법에 달필로 쓴 어머니만의 비밀노트에는 지인들의 생일과 결혼일이 빼곡히 적혀있다.
 
당신의 거친 손을 꼭 나무껍질 같다고 하시는 어머니도 이제 얼마 안남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성도답게, 권사답게, 그러나 아프고 고독하게 정리하고 계실 것이다. 나는 오늘 어머니께 드리려고 빨간 단풍나무 한 가지를 잘랐다. 그분이 걸어오신 삶의 빛깔과 모양이 왠지 조용히 불타는 단풍 한 그루 나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처럼 나도 늘 단순하고 겸허한 자세로 오늘을 살고 또 마지막 날을 예비해야겠다.


▲ 필자의 어머니     © 김명동


ㅇ월 ㅇ일
 
매우 어쭙잖은 글이긴 하지만 나는 어느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어 원고 청탁도 자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더러는 거절을 한다 해도 늘 글빚을 많이 지고사는 셈이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아니든간에 시나 산문 등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기까지는 참으로 남모르는 아픔과 인내, 정성과 노력이 요구된다.
 
나 역시 글을 쓸 때에는 마음에 드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수없이 종이를 버리며 잠을 설칠 때도 많고, 옆 사람이 눈치를 챌 만큼 끙끙 몸살을 앓곤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이렇듯 힘든 과정을 거칠 때마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언어생활을 한번씩 뒤돌아보게 된다.
 
내가 말을 할 때에도 글을 쓸 때만큼 심사숙고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는 부드럽고 친절한 말을 하도록 애쓰고 있는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쉽게 뱉어버린 말들 때문에 오해나 불신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