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영사로 부임한 호주 시드니

전 시드니총영사 이휘진의 해외 단상 1

이휘진/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9/26 [11:57]
▲ 최근 회고록을 출간한 이휘진 전 시드니총영사.     © 크리스찬리뷰

주시드니총영사를 지낸 이휘진 대사가 33년간의 외교관생활을 회고하는 ‘어느 외교관의 해외 단상’(좋은땅/176쪽/12,000원)이란 회고록을 최근 출간했다.
 
이 책자에는 ‘우리 외교의 발전과 위상’, ‘어떻게 외교의 길을 택하였나?’를 프롤로그로 ‘말레이시아’ ‘홍콩’ ‘ 카타르’ ‘영국’ ‘PNG’ ‘시드니’ 등 주요 해외 근무지에서의 단상과 함께 ‘활동자료와 언론 기고문’ 등이 실려 있다.
 
본지는 필자의 허락을 받아 ‘총영사로 부임한 호주 시드니’ 부분과 함께 지면이 허락되면 ‘대사로 부임한 PNG’ 부분을 발췌하여 연재한다. <편집자 주>   
 
▲ 시드니총영사 관저 앞뜰에서 열린 개천절 기념식 전경.     © 크리스찬리뷰

어떻게 외교의 길을 택하였나?
 
외교라는 직업이 흔히 묘사되듯 화려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러한 외교는 19세기 궁정 외교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나 현대 외교는 통신수단의 발달로 세세한 상황까지 본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수행되는 관계로 특명전권대사의 명칭과 어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한반도의 분단국으로서 분단 극복을 위한 비스마르크와 같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외교직을 선택한 것은 더구나 아니다. 외교직은 그저 하나의 직업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나의 학문 분야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직업군을 찾아서 들어간 결과이다.
 
외교는 현란한 언어의 기술을 구사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면 더욱이 나에게는 맞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지 않을까. 알량한 외국어 실력과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유리한 경쟁 분야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외교가 사교술의 발휘장소인 것은 맞지만 놀고먹는 사교술, 춤추고 술 마시고 밥을 같이 먹는 그런 사교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 행정업무의 일환일 따름이다. 다만 외국과 교섭을 하면서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고 상대국을 관찰하고 보고하며 거주하는 우리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업무의 영역이다.
 
그런 면에서 대상이 외국이지, 국내 행정이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점인데 반해 외교는 외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3년 내외의 주기로 외국으로 또는 본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본인이 택한 직업으로 인해 가족들은 원하든지, 또는 원치 않든지 간에 거대한 생활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나름의 애로와 심지어 고통을 수반하게 되는 데에 관해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친우관계를 싹 틔우고 돈독히 하는 단계에서 작별을 해야 하는 아픔이 있다. 새로운 환경에서 서먹서먹함을 없애고 적응해야 하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 것도 어린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쉽다고는 하지만 손톱을 물어뜯는 심적 고통이 따른다.
 
때로는 아이들이 오줌을 싸기도 하는데 이런 것이 스트레스의 발현인 것이다. 이삿짐을 싸고 새로이 풀어야 하는 것도 어려움이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마음의 설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긍정과 부정 중에서 한국의 생활환경이 나아지면서 외국에서의 생활이 동경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외국여행이 일종의 특권으로 인식되는 시절에는 외교관의 직업이 선망이 되었으나 자녀 교육환경의 어려움 등에 대한 동정을 받기도 한다.
 
가족의 고통과 어려움을 차치하고서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배우고 적응하면서 자신의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의 모습은 스스로가 관찰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외국에서 살면서 우리의 장단점을 보고 이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 남의 장단점과 비교하고 배우는 환경에 처할 수 있는 것이 특혜이기도 하다. 선후진국의 발전 정도를 도외시하더라고 적든 많든 우리와 상이한 점과 나은 점을 보게 된다.
 
현장에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유리하다. 아무리 통신이 발달해 이동치 않고 서로 대화할 수 있다한들 직접 대면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감정의 동물이기도 하다. 전화보다 대면하여 의견을 주고받으면 그 효과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통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19세기와 달리 외교공관을 설치할 필요성과 이유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굳이 필요하면 대표단을 일시 파견하여 상대국과 교섭해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상주 사절단을 주재시키는 이유가 그러한 데 있다고 본다.
 
이제 700만 명의 동포가 세계 도처에 살고 있는 환경에서 공관의 설치 요구가 커지고 있다. 동포의 권익보호가 나날이 커지는 수요에 맞추어 공관의 숫자가 어언 170여 개에 달하고 앞으로 더욱 늘어날 추세에 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공관의 자국민에 대한 자세도 서비스 수행으로 바뀌었고 국민의 정부에 대한 의존도를 불식할 필요도 있으나 최대의 서비스 제공이라는 정부의 기본 역할을 줄일 수는 없다.
 
외교관의 2세대들이 국제기구나 다국적회사에서 활동하면서 한인의 활동력을 부각시키는 면모는 자랑스럽다. 좁은 국토를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경쟁하고 기여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위상과 관련되어 있다. 현대사회에서 외교의 영역뿐 아니라 언론, 학계, 비즈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외국에서 활동하는 기회를 통해 대외적으로 국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외교도 결국 그 한 축으로서 몫을 할 수 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제96주년 3.1절 기념식 참석자 기념촬영(2005년).     © 크리스찬리뷰

최대 교민 거주, 시드니 총영사로 부임
 
약 2년 4개월간의 PNG(파푸아뉴기니) 근무를 마치고 2013년 8월 2일 시드니로 부임하였다. 사실 직전에 다음 발령지에 대한 귀띔을 받았을 때 내심 걱정이 앞섰다. 시드니 한인사회와 공관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난 십수 년간에 걸쳐 공관과 교민사회 간의 관계가 불편한 상태에 있었으며 여러 명의 총영사들이 교민사회의 진정과 불화를 이기지 못하고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임지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PNG에서는 교민사회의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어려운 여건에서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임 발령이 났을 때에는 이를 유보해 달라는 진정을 본국 정부에 연명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시드니에는 호주 최대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호주는 원래 1973년까지 백호주의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유색인종의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0년대 초 Gaugh Whitlam 노동당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백호주의를 철폐하게 된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에 파견된 우리의 기술자, 근로자, 제대군인 등이 호주로 유입하였다. 이들은 관광비자로 체류하면서 불법 신분으로 있다가 사면을 받았다.
 
물론 이전에도 1960년대 호주가 시행한 후진국 지원정책인 콜롬보 플랜에 따라 1960년대에 매년 30여 명의 공무원, 학자, 유학생 등이 연수를 받고 돌아갔다. 일부는 다시 호주로 입국·이주하였다. 이밖에도 태권도 사범, 헬기 조종사 등 특수 기술직의 전문가들이 입국하였다.
 
이후에 1987년에 들어 투자이민을 개방하면서 호주로 이주하는 한인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투자이민자는 상당량의 자본을 가지고 이주하였으며 1970년대 중반에 이주한 사람과는 경제형편이 달랐다. 
 
▲ 시드니총영사 부임 후 O'Farrell NSW 주총리를 면담한 필자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 한인회
 
한인사회 내에서도 여건의 상이를 반영해 구포, 신포라고 하여 서로 교류하지 않을 뿐더러 사이가 나쁘기조차 하였다. 한인들은 대체로 요식업, 청소업, 여행업, 건축업 등의 업종에 종사하고 사업의 규모가 영세하였다.
 
이제 한인 이주가 개시된 지 거의 반세기가 된다. 한인회는 1968년도에 설립되어 이제 1.5세대인 30대 한인회장이 재임하고 있다. 동포의 숫자도 시드니에만 거의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동포단체도 100여 개나 되고 종교기관도 개신교의 경우 가정 예배처를 포함해 거의 300개에 이른다. 교회도 규모가 큰 것은 출석 신자수가 3,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아주 영세한 규모의 교회가 대다수이다.
 
내가 부임한 시점에 한인회 회장단이 교체해 한인회의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어 마음이 다소 놓였다. 한인회는 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 Korean Day 축제 행사를 주최하고 다른 기관의 행사에 참석하는 일, 영사관의 협조 아래 민원업무를 대행하는 일 등을 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한인회장은 쉴 새 없이 바쁜 것 같았다.
 
한인회는 연간 회비를 20불씩 받고 있으나 자발적으로 회비를 내는 동포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주로 한인회장의 개인 지출로 운영되고 있다. 2년 임기를 마치게 되면 30-40만 불을 쓴다고 한다. 각종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 회장 명의로 화환을 보내어 축하를 하고 한인회 사무직원의 급여를 챙겨야 하니 재력이 있지 않으면 회장직을 맡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인회, 기타 교민단체에서 주최하는 송년회나 특별 행사의 개최를 위해 외부 기부를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단체장이 개인적으로 희사하여 치르고 있는 형편이다. 우선 이런 행사라는 것은 저녁에 뷔페 식사를 제공하면서 진행이 되니 식사비용이 있고 문화 공연을 부대행사로 가미하게 되니 공연비가 따른다.
 
호주에 한인사회가 형성된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이런 행사를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하지 못하는 것이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다. 다른 민족의 축제나 행사를 보면 회비를 거두어 운영하고 있고 식사는 참가자의 참가비를 받는 것이 통례이다.
 
호주 정부에서 초청하는 행사에서 공짜로 식사를 제공하는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주총리 주최로 총독 관저에서 매년 7월 말에는 6.25 참전용사를 위한 리셉션이 개최된다. 이런 리셉션에서는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간식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초청을 받는 오·만찬의 경우에도 100-150불의 밥값을 내야 갈 수 있으니 상당히 실제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주최하는 국제행사에서는 밥값은 고사하고 행사기간 중 대체로 공짜인 오·만찬 행사가 이어지는 것이 상례이다.
 
한인 차세대는 현지 사회의 영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자선기금 모금 리셉션을 개최해 1-2만 불의 기금을 전달하기도 한다. 1세대는 문화, 언어가 다른 어려운 여건에서 팔을 걷어 부치고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여 차세대의 교육에 주로 매진하였다. 이제 언론, 학계, 법조계, 의료계, 공직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거나 서서히 진출을 활발히 하고 있다. 마흔이 안 된 나이에 덴마크 대사를 지내고 주한 대사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차세대의 성장을 위해 헌신한 1세대의 노고에 기인한 것이다. 나는 차세대의 육성을 통한 한·호 간의 교류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아 차세대를 관저 만찬에 초청하거나 민주평통에 참여시켰다. 차세대를 대상으로 한국의 문화, 경제 발전, 통일 문제, 남북한 관계에 관한 강의도 하였다. 차세대는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보다 편히 하고 관습도 현지사회의 문화에 보다 익숙한 편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한국어를 기본적으로 구사하고 한국인의 뿌리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법적으로는 호주 국적이지만 정서적으로는 한국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므로 앞으로 양국 간의 관계 발전에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 차세대는 KAY(Korean-Australian Young) Leaders, 법조인, 의료인 등 분야별로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 달링하버 텀버롱 공원에서 열린 시드니한민족 축제 현장에서 줄광대 김대균 명인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한인회가 하는 행사 중에 가장 큰 규모는 10월 초 Korean Day 축제이다. 한인이 밀집한 스트라스필드, 이스트우드 지역 등의 공원에서 개최되며 한국의 음식, 특산물 등을 판매하거나 문화를 홍보하는 부스가 30-40개 설치된다. 이 행사에는 베트남, 중국, 태국 등 다른 민족이 초청을 받아 각 민족의 민속춤이나 문화를 선보이면서 협조를 한다.
 
우리는 K-pop, 전통 민속춤, 태권도 시연 등을 보여준다. 교민단체 대표뿐 아니라 현지의 한인지역구의 연방, 주, 시의원이 다수 참가하여 자리를 빛낸다. 또 한인사회가 하는 행사로 2월 구정에 즈음하여 시티 상우회가 주최하는 음력설 축제의 규모도 상당하다. 시내의 Korea Town으로 명명된 거리에서 지난 4년간 개최되다가 코리아 타운이 대중의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금년부터 텀버롱 공원에서 개최되어 한국의 줄타기 명인이 와서 보여준 외줄타기는 큰 인기를 끌었다. 전반적으로 전년도에 비해 많은 관중이 참여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개천절 경축 행사가 열린 시드니총영사관 관저.     © 크리스찬리뷰

다문화 사회인 호주는 연간 약 23만 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난민으로 책정된 숫자도 1만 3천 명이 된다. 집에서 모국어를 쓰는 가정이 전체의 약 30%에 달한다. 주말마다 민족별 행사가 있어 시장 등 정치인은 참석하느라 영일이 없다. 다민족이 조화롭게 사는 다문화정책을 1970년대부터 시행하고 있다.
 
호주를 지탱하는 힘은 자원봉사 정신, 대외평화와 정의에 대한 기여(ANZAC spirit), 원주민 배려라고 한다. 자연발화성이 있는 유칼립투스 나무로 인해 산불이 자주 나지만 2013년 말에는 시드니 인근 산의 200군데에서 산불이 나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 적이 있다. 국제뉴스로 보도되어 한국에서도 지인들이 괜찮은지 안부 전화를 하곤 하였다.
워낙 큰 재해라 동포사회에서도 기금을 모은다, 산불진화자원봉사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정부 당국은 이러한 재난 사태에 대비해 평소에 진화훈련에 등록, 참가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 어번 카운슬에 가졌던 태극기 게양식.     © 크리스찬리뷰

호주는 연방정부가 출범하기 전인 1880년대의 수단전쟁, 보어전쟁을 비롯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이라크, 아프간전쟁 등 각종 분쟁과 전쟁에는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는 이민사회에서의 결속력 강화라는 해석이 있기도 하다. 대외전쟁에 참여하여 모국에 대한 애국심을 기른다는 것이다. 호주의 입장에서는 국제평화와 정의에 기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계속> 〠

이휘진|전 시드니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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