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 같은 수술실이 내겐 특별한 예배처소

오칼라 심장센터 심장외과의 정수영 박사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6/10/24 [11:50]
▲ 의료 선교계에서 Peter Chung으로 알려진 정수영 박사     © 크리스찬리뷰


중국, 북한, 차세대... 의료선교사역의 지경을 넓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심장수술을 한다. 하나님이 나를 향한, 환자와 가족을 향한 대화요, 부르심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수술실은 아주 특별한 예배 장소다”
 
심장봉합기술이 탁월해 ‘인간 재봉틀’(Human Sewing Machine)로 불리는 세계적 심장전문의 정수영(67) 박사가 ‘2016 세계 의료선교대회’ 주강사로 시드니에 왔다. 미국 플로리다의 오칼라 심장센터에서 시니어 심장외과의로 활동하고 있는 정 박사는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들의 치료에 앞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들려주며 모든 수술과정을 하나님께 맡겨드린다고 고백한다.
 
의료진 역시 시간을 내 성경공부를 하며 투철하게 연구하고 하나님께 의뢰하며 믿음으로 치료한다. 이런 정신으로 운영되는 오칼라 심장센터는 미국에서 발간되는 권위 있는 잡지 ‘소비자 보고서’(Consumer Reports)가 선정하는 최고의 심장수술 전문병원 50곳에 선정됐다.
 
미국 최우수 심장수술병원 12곳에 지정되는가 하면, 매년 발표되는 100개 우수 심장병원에 대학병원이 아닌 개인병원으로서는 유일하게 10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정 박사는 심장전문의로서 병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년 휴가를 이용 중국, 북한 등을 방문해 심장수술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
 
청년들에게도 특별한 열정을 지닌 그는 30여 년 동안 청년들과 함께 호흡하며 제자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대학교회를 섬기고 있다. 미주한인의료협회 회장을 맡아 교회를 떠난 세대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도 힘쓰고 있는 그는 ‘심장이 뛴다’라는 책도 냈다.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됐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의사면허증 하나 들고 시작된 미국생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회고한다.
 
세계누가선교회 회장, 컴패션 얼라언스 이사장을 지냈고, 연세대학교의과대학 에비슨 인터내셔널 스칼라십 이사, 한국 심장재단 북한위원회 이사로 섬기고 있다. 자마와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정수영 박사는 의료 선교계에서 피터 정(Peter Chung)으로 알려져 있다.
 

▲ 미국 플로리다 자택에서 ‘심장이 뛴다’ 출간 자축회를 열고 부인 이명숙 씨와 딸 진아 씨(왼쪽)와 함께 기뻐하는 정수영 박사.     © 정수영


하늘에서 온 전화
 
정 박사의 인터뷰는 생각보다 싶지 않았다. 그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인터뷰는 지난 10월 9일 오전 7시 세계 의료선교대회 ‘멘토와의 만남’이 열리고 있는 블루마운틴 페어몬트리조트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진행되었다.
 
정 박사는 인터뷰 도중에도 당일 일정에 대해 관계자들과 상의하느라 분주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피곤하시겠다”고 말문을 열자 그는 웃음을 띠며 “미국과의 시차가 있어서 좀 피곤하다”며 “그래도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쉴 수는 없다”고 말했다.
 
- 오칼라 심장센터가 미국 소비자연합이 발행하는 ‘Consumer Reports'에
매년 선정될 만큼 미국 전역에서 손꼽히는 심장병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소개 좀 부탁합니다.
 
“오칼라는 미국 플로리다 주 매리언 카운티에 있는 아름다운 전원도시입니다. 그곳에 어떤 분이 실버타운을 만들었어요. 현재 7만 5천여 명이 들어가 있는데 55세 이후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노인들이 많다보니까 심장병원이 많이 있어요.
 
오칼라 심장센터는 1991년 함께 훈련을 받은 3명의 의사로 시작을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기도하며 수술했더니 좋은 성적을 내게 됐습니다. 심장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성적을 내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심장수술을 받으려면 어디에서 받겠느냐?’ 소비자들이 전국에서 50군데를 선정했는데 거기에 들어간 거죠”
 
-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다는 증거네요. 평가를 좋게 받으면 휴가를 오래 갈 수 있다면서요?
 
“예, 1년에 13주입니다”
 
- 석 달이네요. 그러니까 좋은 성적 덕에 짧지 않은 휴가기간을 선교지에서 보낼 수 있게 된 거군요. 긴 휴가로 불편해하는 환자는 없습니까?
 
“저희는 시스템을 같은 생각과 같은 능력을 가진 의사들을 하나님께서 모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없더라도 환자를 돌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고요. 그리고 제가 수술한 환자가 퇴원하기 전에 휴가를 갈 것 같으면 환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죠.”
 
- 그래도 휴가는 가족들하고 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족들의 반대는 없습니까?
 
“저의 집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어요. 그런 후 선교적인 일을 하는 데는 일체 얘기를 안 합니다. 오히려 동역자로 잘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30년을 다니면서 의사들을 집으로 초청해 먹이고 재우고 하는데 아내가 너무나 잘해줘요. 그런 면에서 제 아내가 저보다 더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있어요.”
 
정 박사는 해마다 8-9주를 중국, 북한 등의 선교지에서 보낸다. 또 선교지의 의사들을 초청해 2-3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낮에는 병원에서 의술을 전수하고 저녁에는 성경공부로 양육하는데, 이들이 돌아갈 때는 대부분 세례를 받는다.
 

▲ 심장수술 들어가기 전 직원들과 손을 잡고 기도하는 정수영 박사(왼쪽).     © 정수영


- 선교지로 나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아내가 아파트 주변에 사는 부녀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작했는데 말씀은 주로 목사님 사모님이 인도하셨어요. 성경공부를 시작한지 1년이 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편들을 초대해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 자리에서 목사님이 지금 중국에 급히 갈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 말씀을 듣는 순간에 ‘하나님이 날 부르시네?’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사실 당시 저는 일반외과 수련이 끝나가고 있어서 다음 갈 곳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중국에 갈 만한 처지가 아니었죠. 직장을 결정하고 이사를 준비해야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앞으로 갈 길을 고민하는데 먼저 나의 일을 해볼래?’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가게 된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게 30년째네요.”
 
정 박사는 아내와 같이 중국 난징, 내몽골 바우터우 등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도하며 달려갔다. 1985년 6월 중순이었다. ‘심장은=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이 숭고한 일에 부름을 받은 그는 즉시 순종했고 장차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궁금해졌다.
 
미국의 첨단 의료기술을 배우고 싶은 현지의 요청에 힘입어 생사의 기로에 있는 환자들을 만나 수술을 시작했다. 난징의 의료 환경은 그야말로 척박했다. 수술실에조차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을 열어놓고 수술해야 했는데 파리가 들락거리고 마취할 때 쓰는 기관지 튜브가 없어 아침에 수술한 환자의 것을 빼내 소독한 후 오후 수술에 사용했다. 물자를 가져가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수술이 제대로 될까 걱정도 되었지만 첫 환자 수술을 무사히 마치자 자신감이 붙었다. 두 번째 환자는 50대 중반으로 관상동맥수술을 했는데 결과가 아주 좋았다. 저녁식사 후 10시쯤 병실에 들렸더니 인공호흡기도 떼고 마취에서 깨어나서 말도 잘했다.
 
“수술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와 밤 12시쯤 잠이 들려는데 전화가 왔어요. 환자가 위험하니 빨리 오라는 겁니다. 병원에 도착해 중환자실로 뛰어 갔습니다. 환자의 심장은 정상이었는데 중증중풍 증상이 나타난 거죠. 전신이 마비 된데다 불빛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눈이 안 보인다고 했어요.
 
심장수술을 많이 하면 간혹 중풍이 합병증으로 오는 수가 있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났다가 중풍이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든요. 중국인 의사와 간호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어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정 박사는 비웃던 중국인 주임의사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일찍 중환자실에 가봤다. 차도가 없었다. 수년 동안 훈련을 통해 얻은 자신감은 사라지고 다음 환자 수술할 일이 겁이 났다.
 
“그때 우리와 같이 간 간호사 한 분이 내게 제안을 했어요. 오칼라에서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했는데 이 환자에게도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요. 중풍이 온지 3일이 지났고 이제 의학적 견해로는 이 환자가 회복할 가망은 전혀 없었어요. 머뭇거렸죠.
 
그런데 간호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겁니다. 미안해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하고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가족들을 보고 중국인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따라 들어왔어요. 저는 그냥 우리끼리 기도할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이 몰려오자 난처하고 당황스러웠죠.”
 
그 순간 정 박사는 여기서 더 이상 하나님을 창피하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환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그런 후 이튿날 병원에 도착하니 간호사가 반갑게 맞으며 그의 손을 이끌고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아, 환자가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사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중환자실은 초상집에서 잔칫집으로 바뀌었다.
 
‘아, 하나님이시구나!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어. 내 기도를 들으셨어!’
 
정 박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겨자씨 한 알만도 못한 믿음을 회개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기적의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정 박사가 중국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한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경제는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변화의 시기에 중국 현지병원이 기독교정신을 기반으로 성장해 중국 5대 심장병원으로 발전했다. 중국정부 관계자들도 크리스찬들이 일하는 병원이라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할 정도다.
 
그리고 가슴 떨리게 만드는 또 하나는 북한에서도 의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주재 북한대표부를 통해 아·태 평화위원회의 초청으로 시작된 인연은 이제까지 16년간 지속되고 있고, 연2회 정도 평양을 방문해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 간호사들과 성경공부하고 있는 정수영 박사.     © 정수영


하나님이 보여주신 확실한 증거 ‘인간재봉틀’
 
“1999년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 북한대표부를 통해 평양 적십자병원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일로 가지 못하다가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던 중 하나님께서 평양에 가는 것을 원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2001년 4월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죠.”
 
평양공항에 도착하니 적십자병원의 의사들과 아·태 평화위원회에서 마중 나와 있었다. 공항에서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돌아간 듯했다. 오후에 첫 수술을 하기로 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30대 초반의 승모판막 협착증이 심한 환자인데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중증환자였다. 내일 있을 수술에 대해 설명한 후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수술을 위해,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하려는 순간 갑자기 목이 메었습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일을 준비한 것이 결국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환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구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제 가슴을 감동케 했습니다.”
 
다음 날 수술실에 환자를 옮긴 후 마취를 했다. 그런데 마취기계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 다른 기계를 가져왔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2시간이 흘렀다. 환자의 상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죠. 첫 환자잖아요. 그때 같이 간 마취과 의사가 내가 약물로 최선을 다할 테니 가능한 빨리 수술을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온 정신을 쏟아 수술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끝내고 보니 참관하고 있던 의사들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수술하는데 45분 걸렸대요. 지금껏 소련에서 배운 방식대로 하면 적어도 4-5시간 걸리는 수술을 1시간 내로 했다는 거죠. 이 일로 그들은 심장수술을 배우고 싶으니 앞으로 꼭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하마터면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환자를 통하여 우리를 높이셨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유엔주재 북한대표부를 통해 수술환자들이 잘 회복되어 퇴원했다면서 진심어린 감사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1년에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하여 많은 환자들을 수술하기 시작한 거죠.”
 
그 후 정 박사는 북한 의사들도 중국 의사들처럼 오칼리로 초청하기 시작했다. 첫해에는 병원간부 3명과 장기적으로 훈련받을 의사 3명을 초청했다. 당시 부시대통령이 집권하던 때라 미국과 북한 간의 왕래가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북한과의 교류는 정 박사팀이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미국 국무성은 이들에게 비자를 한 달 만에 내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간부 3명은 일주일 견학하고 돌아갔지만 나머지 3명은 3개월 동안 제집에서 같이 지냈습니다. 북한의사가 미국가정에서 지낸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역시 우리 동포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이 들었어요. 저녁식사 후에는 성경공부를 했죠.
 
평양에 가서 수술하는 일은 때로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 환자는 대개 중증환자이고 그러다 보니 많은 시간을 중환자실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물자는 부족하고 시설도 열악해서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늘 안타깝습니다.
 
한 예로 심장수술 후 흉부 엑스레이를 촬영할 수가 없습니다. 이동용 엑스레이 기계가 없어서 다른 빌딩으로 가야하기 때문이죠. 육체적으로 참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 스스로 심장수술을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매우 보람된 일입니다.”
 
- 수술을 하기 전 환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면 거부를 안 합니까?
 
“환자들은 ‘심장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누구나 ‘죽을지도 몰라’하며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저는 그래서 더 수술절차와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는데 그러면 환자들이 안심하고 ‘나는 당신의 손을 믿어요’(I trust your hand)하거나 ‘당신 손에 나를 맡겨요’(I am in your hand)라고 답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믿을 수 있는 더 좋은 손이 있습니다’ (You have a better hand to trust). 그런 다음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렇게 하라면서 눈을 감아요. 기도하고 나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제가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인데 자기 심장을 여는 사람이 기도하자 그러면 안 한다는 사람 아마 없을 겁니다. 어찌됐든 기도하자 그러면 굉장히들 좋아합니다.”
 
- 완전히 무장해제네요?
 
“그렇죠. 완전 무장해제가 되는 거죠. 서슴없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죠.”
 
- 별명이 인간재봉틀입니다. 바느질을 잘하셔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건데 인간재봉틀이라는 별명을 듣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사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를 때 인간재봉틀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래서 저에게는 익숙한 별명인데 하나님이 저를 이 길로 인도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심장외과는 내과와 달리 학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수술을 잘 하려면 손에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인간재봉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장수술은 심장을 멈추고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시간과 싸워야합니다. 심장을 짧게 멈출수록 경과가 좋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심장수술을 1시간 반에서 2시간이면 해치웠습니다. 아직 수련의에 불과해서 수술실에 들어가면 주치의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했는데 저한테는 가르칠 것이 없다며 알아서 하라고 했죠.
 
뿐만 아니라 제가 온 뒤로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졌는데 이는 제가 수술을 잘한 덕분이라는 소리도 들었죠. 환자가 수술을 받아 퇴원할 때까지는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어찌 나 혼자만의 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황송하게도 이런 칭송을 들었어요.”
 
아칸소 주립 대학병원에서의 일이었다. 하루는 흉부외과 과장과 식도암수술을 하게 됐다. 과장이 집도를 하고 정 박사는 조수로 들어갔다. 목젖아래 4cm 정도와 명치 아래 4cm 정도를 열어서 식도를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그런데 과장이 목 아래 연 부분으로 손가락을 넣어 식도와 기관지를 분리하다가 기관지가 파열되는 사고가 났다.
 
갑자기 환자의 산소 농도가 떨어지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과장은 당황하여 환자를 옆으로 눕히고 흉부를 열자고 했고 삽시간에 수술실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정 박사는 침착하게 과장의 허락을 받고 목 아래 좁은 개찰구를 살펴봤다. 손가락 끝이 닿을 깊이에 기관지가 파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간호사에게 실을 받아 두 바늘 꿰맸더니 감쪽같이 봉합이 되었다. 과장은 기관지가 봉합된 것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정 박사를 한참동안 쳐다보면서 ‘네가 이 구멍으로 저 깊은 곳을 꿰맸다는 거야?’ 하며 무슨 신기를 부렸다는 듯이 두고두고 이 얘기를 했다.
 
“그때 무슨 용기로 과장님께 ‘제가 한번 환자의 상태를 봐도 될까요?’ 그렇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일로 저는 이 대학 캠퍼스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요. 한번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청소하는 분이 저한테 다가오더니 ‘피터 정 선생님이시지요?’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하는 놀라운 얘기를 들었어요.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그러잖아요. 저는 이런 일들을 겪으며 하나님이 저를 이 길로 인도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 손재주하면 한국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래요. 지금도 대학에 있는 연구소에서 생쥐 꼬리에 주사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사람 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마 저희들이 젓가락을 써서 그게 도움이 많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저희 병원에서 외과 의사들이 산 닭으로 꿰매기 대회를 했는데 거기서 제가 1등을 했어요. 허허허.”
 

▲ 2016 세계의료선교대회가 열린 시드니새순장로교회 새순홀에서 강의하는 정수영 박사.     © 크리스찬리뷰


거듭남-그날은 천지가 개벽하였다
 
- 결국 하나님이 심장전문의 쪽으로 길을 인도하신 거군요. 그런데요, 대학생 시절 유명한 술꾼이었다면서요. 어느 정도 방탕하게 지냈습니까?
 
“말도 못해요. 신촌에서 유명했죠.”
 
정 박사는 대구 출생으로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메소디스트 병원 일반외과 전문의 과정을 거쳐, 텍사스 심장연구소, 베일러대학교 메디컬센터, 아칸소대학교 메디컬센터에서 심혈관외과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을 경험했다. 하늘 같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는 큰 형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와 아들을 생각하며 통곡을 했다.
 
그는 뒷산에 올라가 대구 수성 들판을 내려다보며 수심에 젖어들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진로문제를 고민하던 어느 날, 한 겨울이었다. 아침 등굣길에 타고 가던 버스가 신호등에 서 있는 동안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리어카에 솜이불을 덮어쓴 환자와 보호자가 병원 문이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의료혜택도 못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형이 생각나서였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때였다.
 
그는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기독교를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빠져들었다. 신촌거리를 방황했다. 카뮈, 사르트르, 니체의 철학을 탐구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문학을 한답시고 문우들과 술통을 끼고 살았다.
 
3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1978년 10월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 5년간 수련과정을 마친 뒤 모교로 돌아가서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생활에서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문득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무렵 아내는 옆집에 사는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얼마 후 아내가 같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의대에 다닐 때 ‘기독교는 집단 정신질환의 한 현상인가?’라는 제목으로 열띤 토론을 하지 않았던가. 대신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전을 해서 아내를 교회까지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려오곤 했다. 어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오기가 번거롭기도 해 마지못해 교회에 들어가 앉아있기도 했다.
 
그러나 예배당에 앉아있으면 이방인의 나라 미국보다 더 낯설고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두 손을 들고 “주여, 주여” 부르짖는 모습은 정말이지 집단 정신병자들 같았다. 그러다 문득 신이 있다면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순간 내 모습에 깜짝 놀라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예배당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이 성경공부 모임에 초대했는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단호히 거절했지만 이미 손에는 자동차 키가 들려있었다. 아내를 그 집에 데려다 주었다. 도착해보니 30여 명이 모였는데 식사를 하는지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내에게 끝나면 데리러 오겠다 하고 집을 나왔지만 갔다가 돌아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구멍가게가 보여서 캔 맥주와 담배를 사서 그 집 마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아내를 기다렸다.  밤 10시쯤 모임이 끝났다. 주인은 잠깐 들어와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며 그를 이끌었고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서 들어갔다.
 
아내의 친구는 달변이었다. 성경의 이런저런 내용들을 설명하더니 다니엘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새벽 4시가 넘어가자 요한복음 5장 25절을 같이 읽자고 했다. 그런 후 기도를 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 출근하려고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공원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나무들이 살아서 춤을 추는 것 같았고 하늘도 무척 아름다웠다. 갑자기 딴 세상에 온 듯 어리둥절했다. 그 순간 어젯밤 그 집에서 읽은 성경구절이 떠오르면서 눈이 촉촉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성령의 임재였다.
 
그러나 30여 년을 살아온 가치관, 역사관, 세계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렸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내용들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요예배에 참석했다. 설교를 마친 전도사는 다 같이 기도하자고 하면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까짓것 , 해보자. 그도 손을 들고 큰소리로 ‘주여’를 외쳤다. 그런데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눈을 뜨고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팔을 올리고 크게 소리를 질러서 어깨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나 하며 다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이번에는 누군가 그의 올린 팔을 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는 ‘하나님이시구나!’ 직감했다 그러자 몸이 솜처럼 가벼워져 하늘을 오르는 황홀경에 젖어들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놀랍게도 그토록 믿어지지 않던 성경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릇된 생각, 논리들이 우글거렸다. 30여 년을 같이한 그것은 여리고성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과 골수를 쪼개며’ 담을 헐기 시작했다. 말씀을 더욱 붙잡았다.
 
순간 ‘회개’라는 말이 청천벽력처럼 그의 마음을 내리쳤고 지난 시절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렸다는 예수님의 삶이 떠올랐다. 아내에게 자랑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의 표정은 ‘천지개벽’ 그 자체였다. 그 시간 이후 그의 삶은 하늘과 땅처럼 변했다. 선교사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 2016 세계의료선교대회에서 강의하는 정 박사.     © 크리스찬리뷰


희망 준 말씀읽기와 묵상
 
정 박사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교수가 되고자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유학 생활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한데다가 금전적인 어려움까지 닥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
 
“보통 3-4년 내지 7년이면 수련이 끝나는데 저는 11년 동안 수련을 받고 심장외과의가 됐습니다. 길이 안 열린 거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저의 광야생활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다 가지세요’하고 내려놓는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린 거죠. 기적이죠. 그 훈련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훈련기간이 길어지면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심장외과 레지던트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일반외과 공부를 하던 저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죠. 게다가 심장외과 레지던트는 지원자가 몰리는 인기 있는 자리였으니 더더욱 그랬죠. 심장의 의사가 되고 나니까 이 분야가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젊은 친구들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하는 얘기가 있어요. 가는 길을 모를 때, 길이 안 보일 때 자기가 결정하지 말라. 하나님께 맡겨라. 가장 잘 할 수 있는 길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말을 합니다.”
 
낙심될 때도 있을까. 사람이니까.
 
“저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게 하나님이 ‘어디 좀 다녀오라’ ‘이일을 하라’그러면 ‘예, 알았습니다’하고 순종을 합니다. 제 개인적인 야망이라든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저한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다가 중간에 그만둬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중국선교가 30년째인데 너무 피곤하니까 ‘하나님 올해는 한번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랬더니 세 번이나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돈을 모아가지고 물자도 사야 되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제가 도왔다고 확신이 드는 게 제 주위에 함께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는 거예요. 자기 돈 내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아요. 저는 혼자서는 못 가잖아요. 심장수술을 하는 데는 팀이 있어야 되니까요. 지금도 연락이 계속 와요. 언제 가겠느냐고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개념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교회 가면 좋을 거야’ ‘헌금하면 도와주실 거야’ ‘구하면 주실 거야’ 이런 개념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개념에 문제가 생기면 믿음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확실히 내 삶을 완전히 180도 바꿔놓았거든요. 제가 체험을 했습니다.”
 
-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신앙생활 하면 보통 떨어져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계속 만나고 있습니까? 술친구들 아니었습니까?
 
“미국에서 대학 동기들이 8명이 있었는데요, 제가 하나님을 만난 후 모여가지고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믿게 됐다. 이제는 술 안 먹는다’고 그랬더니 이렇게 얘기했어요. ‘수영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변했으면 하나님이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다. 우리도 교회 가자’고요.”
   
- 예? 그 즉시 말입니까?
 
“예, 그래서 교회에서 전도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을 믿고 더 많은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많은 친구들이 생겼어요. 내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내 곁을 떠난 친구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중에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한 사람 있어요.
 
지금도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데 지금은 예수 믿는 것이 굉장히 비판적이지만 그래도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아요. 아마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술친구 밖에 없었을 텐데 하나님을 만나고 더 많은 친구가 생겼죠. 정말 삶의 가치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겁니다.”
 
- 선교사 지망생들에게 당부 말씀 해주시지요.
 
“저는 자기 삶을 다 바쳐 선교현장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선교사님들이 참 존경스러워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삶은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선교사적인 삶이 뭐냐. 어느 나라에 가서 뭘 한다, 이런 것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속에 있어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삶을 살면 그게 후방에 있던지 전방에 있던지, 관계없이 선교사적인 삶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소명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님을 만나 보면 그 부르심이 없어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삶을 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갈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무슨 일이던지 이유를 달지 않고 할 수가 있죠. 이 문제가 확실히 먼저 정리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건강을 위하여 하는 운동이나 취미가 있는지요?
 
“골프를 한동안 했어요. 유일한 취미가 골프였죠. 그런데 접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귀하더라고요. 영적인 우리가 공을 가지고 즐거워하며 돌아다니고 있을 동안에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없이 죽어가잖아요. 정말 내가 하루 종일 골프장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야 하나,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접었죠.”
 
-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야죠. 사실 하나님이 저한테 보여 주신 것이 네 꿈, 네 이상을 버리라는 거예요 꿈꾼다, 이상을 갖는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네 삶의 전부가 되고 나면 너의 지식과 꿈과 이상은 필요 없어. 따라오기만 하면 돼. 의사가 된 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제 꿈과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삶이 되고 싶은 것, 그리고 심장수술이 잘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방황과 혼돈 가운데 있는 2세들이 부르심 가운데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 수영 박사는 외모나 말씨 모든 것이 차분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오랜 말씀 읽기와 묵상이 준 또 다른 결과로 이해됐다. 그는 큐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통해 그는 모든 일의 중심에 ‘말씀’이 놓여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말씀 읽기와 묵상을 통해 자신이 여기까지 왔듯이 자신의 사역도 큐티를 통해 계속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함을 그는 믿고 있었다.
 
정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여운 있는 한 마디를 보탰다.
 
“제가 한 일은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속에서 가르쳐 주신 대로 움직인 것 뿐입니다. 큐티만으로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주셨으면 합니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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