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로 펄펄 뛰는 은혜의 정원

멜본호산나교회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6/12/26 [10:07]
▲  크리스찬리뷰 1월호/2017   © 크리스찬리뷰

인사를 잘하는 교회

아스팔트가 펄펄 끓는 멜번의 날씨에 자동차 매연도 함께 녹아 흐느적거린다. 빼앗긴 사막에서도 선인장은 빨간 꽃을 피우듯, 사방이 악천후로 둘러쌌지만, 하늘로 향한 은혜의 정원을 일구어가고 있는 교회를 만난 것은 우리시대에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부흥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가장 독특한 형태의 모델적인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교회가 바로 멜본호산나교회(담임목사 김종욱)이다.
 
맞은편에 기싸움이라도 하듯 중국 절간(관우신묘)이 버티고 있지만 조금도 ‘꿀리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주변에는 무슬림들과 캄보디아 큰 뱀을 섬기는 절이 있고, 옆에는 주변국에서 온 사람들이 세운 엄청나게 큰 절들이 있다. 무슬림도 교회 주변에 있고, 블록 라인 끝에는 여호와의 증인에서 회관을 7천 스퀘어로 짓고 있다. 무슬림센터 기도하는 집은 이들이 일 년 동안 기도했더니 나갔다고 한다. 금요일 기도하다 나오면 무슬림들을 만났는데 겁이 나서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건물을 구해놓고 보니 멜번순복음교회가 가까이 있었다. 김 목사는 당시 순복음교회 박종환 목사가 “영적전쟁을 같이 하라고 보내주신 동역자”라고 격려하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부딪혀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내며 멈춰선 기차에서 젊은 중국인 부부들이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라도 되듯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그들의 행선지는 놀랍게도 중국 절간이 아닌 한인 교회였다. 계속하여 홍콩사람, 베트남 사람, 심지어 히잡을 뒤집어 쓴 아랍계 여인들까지도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교회로 몰려갔다.
 
11월 셋째 주일 아침 풍경이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달려간 곳이 바로 멜번호산나교회로 빨려들어가듯 쑥쑥 입장하고 있었다. 널찍한 로비 한쪽에는 한국말로 안내하고, 영어와 중국어 등을 쓰는 외국인들이 ‘난곳 방언으로’ 친절하게 안내를 한다.

▲ 멜본호산나교회 추수감사 축제에서 변화된 삶을 보여준 드라마 ‘아버지의 사랑’ 공연 장면.     © 크리스찬리뷰
 
“교인들이 한동대 학생들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잘하네요.”
 
10여년 전, 한동대 취재를 갔을 때의 경험을 권순형 발행이 회상했다. ‘좋은 교회, 좋은 학교의 특징은 인사를 잘 한다’는 가설을 세워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이날은 추수감사예배 겸 새신자 초청의 날이다. 800여석이 넘는 식당은 호텔 레스토랑 수준으로 데크레이션을 해두었고, 색상을 달리하여, 초청한 가족, 교구별, 셀별로 찾아가기 쉽게 해두었다. 손님맞이 준비하는 부엌에서의 손놀림도 설 명절을 준비하는 며느리 손길처럼 빨리 움직인다. 이곳 또한 국적을 불문하고 함께 어우러져 카레, 부침개, 샐러드, 빵으로 퓨전식의 환상적인 음식조합을 만들어냈다. 
 
중보기도실에서는 70여 명이 모여 이날의 순서 하나하나를 두고, 바깥의 기온보다 뜨겁게 기도한다. 불현듯 “교회는 무더운 여름보다 더 뜨거운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면서 ‘바로 이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시간 30여분 전에 이미 1천여 석의 좌석은 채워져 가고 있었다.  
 
다국적 찬양팀이었다.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그들의 땀방울 위에 천장 위의 빛이 떨어지면서 광채가 났다. 스크린에는 영어자막, 한자자막, 한글자막이 떴다. 타민족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한글 자막을 맨 밑에 넣었다고 한다. 이어 천지창조부터 재림까지 구속사의 일대를 다룬 워십댄스(Eight Blessings)가 펼쳐졌다.
 
그리고 판토마임으로(Father's Love) 변화된 인생을 보여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주인공 아버지는 이전에 노숙자였는데, 호산나교회를 통해 복음을 전해 듣고 변화를 받아 건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삶으로 보여는 판토마임이었기에 가슴을 찔러 쪼개었다.
 
김종욱 목사의 설교는 복음에 초점을 맞춘 단순명쾌했다. 김 목사의 둘째 딸이 영어로 통역하고, 다시 8개 언어로 통역이 나가는 형식이었다. 간혹 설교를 듣고 반응하는 웃음소리가 국적이 다른 사람들마다 시간 차이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멜본호산나교회 주변은 사찰, 무슬림 사원, 여호와의증인 등 각종 종교 시설들로 둘러싸여 있다.     © 크리스찬리뷰
 
핏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
 
김 목사의 설교는 도입예화로 피부 아토피로 극한 고통당하는 한 아동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 아이가 프랑스의 한 병원에서 천연 온천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난 다음 너무너무 큰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들어갔다. 각종 불치의 병, 중독, 불안, 허무감 이 세상의 예기치 못한 가슴 아픈 사건에 직면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진단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에 반역한 인간의 죄 문제를 다루면서 복음의 4가지 사실을 군더더기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증거하고 초청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했다.
 
소위 자기계발의 훈계식 설교가 아니었다. 내용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내용인 사영리의 내용을 확장(창조-죄-예수그리스도 구원-영접, 초청)한 것으로 실감나는 비주얼을 곁들어 하였다. 잔치같은 인생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면서 특히 마지막 초청 시간이 강렬했다. 그의 설교는 분명 ‘교회는 예수의 핏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임을 증언했다.
 
그 다음 또 한 편의 워십댄스(Worthy is the Lamb)와 셀모임의 하이라이트를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1부 예배를 마쳤다. 계속하여 식탁교제와 컨넥트타임(Connect Time)으로 주일 하루의 교회 생활이 이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짜임새 있는 한 행사를 스케치하기 위해 멜번까지 간 것이 아니다. 호주의 한인교회 중에 가장 독특하지만, 또 어느 교회나 누구나(어느 목회자나) 시도해볼 수 있는 모델과 같은 교회이기에 그 내밀한 부분을 추적하기 위해서이다.

▲ 1천여 명의 성도들을 대접할 주방의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 크리스찬리뷰
 
교회의 존재가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멜번호산나교회(이하 멜번호산나) 하면 일반적으로 꼽을 수 있는 특징이 젊은이로 넘쳐나는 교회, 한국 사람보다 외국 사람이 더 많은 다민족교회(전체 교인 600여 명 중에 한국인은 200여 명이다), 짧은 시간에 급성장한 교회, 넓은 부지의 큰 교회당 등 외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교회를 직접 둘러보고, 공기를 마셔보면서 첫인상부터 여느 교회와 달랐다. 앞서 언급한 대로 먼저 교인들이 사람을 대하는 것(인사하는 것)부터 달랐다. 박제된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웃음과 따뜻한 인사가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팬터마임의 ‘주인공 아버지’처럼 교회에서 변화된 경험과 간증이 넘쳐났다. 
 
글렌 와그너가 “교회는 사역활동을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현명한 사역을 통해 큰 만족을 얻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교회를 통해 삶의 목적과 의미와 만족을 발견해야 한다”라고 한 교회론에 바로 멜번호산나가 잘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흔히 우리는 교회의 존재 가치를 선교에 두면서, ‘나가는 선교, 보내는 선교’를 강조한다. 그러나 멜번호산나는 우리가 (선교지에) 나가지 않아도, 보내지 않아도, ‘우리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선교지이며, 누구나 선교사가 될 수 있으며,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선교는 가능하다는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을 이민교회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예배 시작 전 기도실에서 중보기도하는 성도들.     © 크리스찬리뷰
 
여기서 우리는 멜번호산나를 개척하여 일구고 가꾸어온 김종욱 목사의 육성을 들을 필요를 느낀다. 가장 특색 있는 교회로 일궈오는 데는 그의 리더십과 목회철학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첫출발은 여느 이민교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부흥-교회 구입 등 ‘성장의 압축’같은 그림이 보인다.
 
“멜번호산나교회는 여러 이민 교회들처럼 한 교회 건물을 빌려서 시작했습니다. 가정예배로 시작하여 2003년 7월, 소수가 모여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우리가족 포함 12명). 올해로 벌써 창립 14주년째가 됩니다. 호주 교회를 빌려쓰는 동안 감사한 일도 많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자 건물 사용. 화장실 사용 문제 등이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성전 건축하려 애쓰기보다, 건축을 안하면 안 될 때까지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자는 혹 실수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후자는 하나님께서 더 급하셔서 등 떠미시면, 밀려서 가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2년 전에 새 건물을 구입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현재는 새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사하고 제일 기쁜 것은, 11년 동안 교회 사무실. 개인 사무실이 없었는데, 개인 사무실이 생긴 것입니다.”

▲ 멜본호산나교회는 26개국 민족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다민족교회이다.     © 크리스찬리뷰
 
사업에서 사역으로
 
그는 처음부터 ‘태생영웅’으로 큰 교회를 일굴 목회자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역시 평범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사업하며 해나가며 중산층 시민으로 살아갈 기회가 더 많았다.    
 
“1980년, 25세 때 예수전도단(YWAM) 여름 전도학교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 저의 삶은 극적으로 변하였습니다. 신앙 연륜이 짧은 저에게, 하나님은 선교에 대한 소원을 주셨습니다. 1983년, 예수전도단 6기 DTS (부산 금강식물원) 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 (CCC 훈련) 와 처음부터 선교를 전제로 결혼하였으나 잠시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한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로 확장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때 그는 사업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40일 철야기도를 했다. ‘40일째 새벽설교를 통해 음성을 들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사업을 일으켜 달라는 그의 기도는 사역으로 인생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40일째의  본문은 창세기 12: 1-3 절이었고, 제목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라’였습니다. 사업의 번영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사로 부르시는 강력한 주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사업을 정리하고 예수 전도단에 우리의 삶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때가 마침 88올림픽 때라, 해외 각지에서 들어오는 수백 명의 YM 가족들에게 숙소 배정을 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 후 Mobile DTS에서 간사로 섬겼습니다. 사역을 마친 후 우리 가족은 평신도 선교사로 필리핀에서 2년, 태국에서 2년 머물렀습니다.” 
 
그가 선교지로 갈 때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기도할 장소를 찾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가서 새벽기도 또는 철야기도를 허락받는 것이 여간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하나님의 응답으로 교회 문을 열어주는 곳이 있었습니다. 25년 후, 그 교회들과 연결이 되어 필리핀과 태국에서 우리 호산나교회가 큰 전도 집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25년 뒤의 일을 위해 미리 준비하시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장로교개혁총회 파송으로, 막상 선교지에 나간  그는 평신도로서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향했다. 오클랜드에서 신학교(Bible College of New Zealand, 현 Laidlaw College)를 졸업하고, 침례교 유니온에서 96년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 말씀 전하는 김종욱 목사와 통역하는 둘째 딸 다은 씨.     © 크리스찬리뷰

어둠의 밤, 절망의 시절
 
물론 여기까지도 여느 목회자가 소명 받아 걸어오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특별한 어둠의 계절이 있었다. 한 마디로 ‘상처 입은 치유자’였다. 그 어둠의 터널을 어떻게 통과해 왔는가?
 
“뉴질랜드 교단에선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불러야 안수를 줍니다. 저를 부르는 몸이 없으니 교회 개척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스트레스가 도를 넘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바르게 목회하면 성도들이 몰려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년 반 동안 성도의 숫자는 20-30명을 맴돌았습니다. 매주일마다 입구 문 쪽을 바라보노라면 암에 걸릴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야 숫자와 내 열심은 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의 바른 동기와 성령의 역사가 더 중요했습니다.”
 
특히 교회에 잘 다니다가 이유도 없이 사라지는 교인들, 또 마음 아프게 하는 교인들이 많아질수록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고 한다. 결국 개척 3년 만에 심장마비가 왔다. 두 번이나 심장 스텐트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쉬어야 산다고 여러 번 경고했다. 머리에는 원형 탈모증까지 왔다. 머리카락이 여기저기서 빠지더니 다섯 군데가 동그랗게 비었다. 한마디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쯤 되니 의사의 강력한 권고도 있었지만 제 스스로도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결국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쉬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가족들과 시드니로 옮겨 갔습니다. 패배자가 된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괴로웠습니다. 그동안 교회서 사례비로 500불도 받고, 1,000불도 받고, 때론 못 받기도 하며 열심히 사역했는데, 심장병과 원형 탈모증이나 얻고… 말이 안식년이지… 처음으로 한국에서 부교역자로 섬기는 분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묵상 중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 다국적 찬양팀의 열정적인 찬양.     © 크리스찬리뷰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 : 7-10).
 
이 말씀에서 그는 ‘맞다! 종은 이미 주인의 집에 들어와 주인과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 자체가 은혜이지 않는가? 명령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지 않아도 그것은 주인의 공의이다. 나도 고백해야 한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음성을 듣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힘이 났다고 했다.
 
사역지 없는 목회자의 마음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드니 체류 동안 가족 모두가 시드니순복음교회에 나가서 새벽기도를 했다. 순복음교회는 저녁에도 문을 열어 놓아, 저녁 8시에 아무도 없을 때도 나가 마음 편히 저녁기도를 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1년 동안 너무도 막막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미국 가서 공부를 더하느냐, 가난한 제3국으로 선교하러 가느냐였습니다. 또 하나 기도제목은 안식년 동안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1년 작정기도 하고 나니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나라로 가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소원을 거절하시고, 멜번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멜번에서 뉴질랜드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집사님이 멜번으로 올 수 있느냐는 연락이 왔어요. 설교할 교회도, 훈련시킬 교회는 없었던 저희에게 기도하는 중에 ‘우리의 마게도니아’로 부르시는 사인으로 생각하고 멜번으로 왔습니다.
 
우리를 멜번으로 초청했던 부부는 미국 동부, 서부를 거쳐 다시 뉴질랜드로 떠나셨는데, 한 번은 그 아내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작은 땅을 사두었는데 그것이 팔려서 5억 원의 이익을 보았습니다. 십일조 5천만 원을 어디에 할까요? 하고 기도하니 김종욱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통장 계좌번호를 좀 알려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아직 정착할 교회를 정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누가복음 17:9-10절처럼, 우리가 명령대로 행하였다고 하나님은 곧 사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일에 다른 방법으로 은혜를 넘치도록 베푸시는 것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 멜번호산나교회 김종욱 담임목사     © 크리스찬리뷰
 
비단길이 아닌 가시밭길
 
그러나 그들의 마게도니아 역시 비단길이 깔린 것이 아니었다. 가시밭길이었고, 사막이었다. 본격적인 역경이 시작되었다.
 
“먼저 두 딸이 시드니로 옮겨 와서 9학년 11학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물리·화학·생물 과목이 뉴질랜드와 전혀 틀려서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또 멜번으로 옮기게 되니 어려움이 더 가중되었습니다. 멜번 집 근처의 몇몇 공립학교에 찾아 갔더니 이민자들이 늘어나서 이미 학생 수가 다 찼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10학년 12학년 과학쪽 과목은 신청이 다 끝나 여유 자리가 없다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주님만 바라보며 묵상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말씀 응답이 왔습니다. (사 45 : 2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지혜는 그 뒤에 따라 왔습니다 ( 요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교단 기독교 학교가 생각나서  찾아가 우리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80% 할인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과학 과목들이 시드니와 다르니 큰 아이를 11학년으로 낮추면 과목 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계산기 사용법조차 뉴질랜드, 시드니, 멜번이 다 달랐습니다. 늦게 가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아이들의 진로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 그렇게 내려간 멜번에서 사역 역시 처음부터 잘 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예배당을 빌리는 것부터 한계에 부딪혔다. 처음엔 자신의 집에서 시작하여 전도해서 양육하여 12명쯤 되었을 때, 교회를 빌릴 수 있었다.
 
“예배당을 빌리러 다닐 때부터 설움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제 소개서를 드렸는데도 ‘이력서를 써 와라, 한 달 뒤에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또 당회에 안건으로 올려보지도 않고 그 자리서 거절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제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는 여성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제가 하나님께 항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포도원 안에 들어와 있는 자체가 은혜인 줄 모르고 품삯 때문에 불평한 일꾼과 같았습니다.
 
교회를 빌리려 애썼는데 100군데도 더 알아봤습니다. 거절도 많이 당했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끝나고 더 이상 우리는 못한다고 했을 때 정말 좋은 곳을 하나님께서 쓰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시작했습니다. 특히 멜번에서 목회를 다시 시작할 때 제 속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눅 17장 말씀을 통해  ‘뉴질랜드에서의 목회는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하시는대로 행하였다’는 위로를 받았으나,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멜번에서의 교회 상황도 뉴질랜드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새벽과 저녁에 컴컴한 본당에서 아내와 함께 기도하는데 어떤 날은 폭풍이 몰아치고 비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었습니다. 기도하기에 너무 추운 밤, 너무 더운 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30명씩 30년을 간다고 해도 저는 이 길을 계속 갈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10명을 보내시건, 20명을 보내시건 그들을 제자 삼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들을 제자 삼아서 승법 번식으로 세계 선교 하겠습니다’하고는 세 가지 기도를 드렸습니다.”

▲ 800명을 수용하는 멜번호산교회 식당 전경.     © 크리스찬리뷰
 
이때 드린 3가지 기도제목이 지금까지 그의 목회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저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으니 한인 목회만 하지 말고 멜번의 157개국 이민자들에게 선교하게 해주소서!
2) 교회 부흥이 아니라 영혼구원의 목적을 이루게 해 주소서!
3) 불신자를 전도하여 일꾼으로 제자로 만들게 해 주소서!
 
뉴질랜드의 목회경험이 또 하나의 거울이 되었다. 멜번 목회는 패러다임을 바꿔 새롭게 시작했다.
 
“뉴질랜드에서 주일 날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성도들이 쭈욱 앉아서 교제만 할 뿐이었습니다. 심방도 다녀보고 김치도 담아주고 찾아가서 기도와 위로도 해주었지만 제자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멜번에선 시스템을 바꾸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 셀모임(주일 설교 나눔)을 하고 곧 말씀반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처음 온 사람은 복음 제시반으로 데려갑니다. 화요일, 목요일에도 단계별로 말씀반을 진행합니다. 12개의 말씀반의 내용은, 주로 CCC 교재, 예수전도단 교재, 그 외 목사님들(김성곤. 홍성건. 유기성 등) 이 쓴 책들을 간추려서 만들었습니다. 중점적으로 하는 일은, 주로 기초반을 반복 훈련시켜서, 선교 현장에 내 보내는 것입니다.
 
아웃리치 팀을 만들어 해외, 국내, 멜번의 각 지역으로  보냅니다. 경제 사정상 해외로 갈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해 국내 팀, 멜번 팀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멜번 팀이 더 효과적입니다.
 
또 교구별로 각 기관에 들어가서 프리칭도 하고 집회도 하고 8주 양육도 하게 했습니다 (각 양로원, 롯지, 초등학교, 대학교, 노숙자 급식소, 감옥, 디텐션센터 등).
 
기도하고 작은 선교부터 시작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큰 문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평생 3가지 잘하며 살자고 강조합니다. ‘평생 새벽기도, 평생 큐티, 평생 세계 선교… 하나님의 소원을 품고 살자!’는 것입니다.”

▲ 멜번호산나교회 채영미 사모     © 크리스찬리뷰
 
송두리째 흔들리다
 
그러자 성도들이 성숙하고 교회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목회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또 하게 되었다. 
 
“전도하고 복음 전하다 보니 집회할 때 평소보다 2배 정도 와요. 그러면 화장실이 없고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래서 가만히 기도만 하고 있는데,  한 번은 저희가 빌려 쓰던 교회가 교회 터를 팔고 아파트를 짓겠다며 설계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본교회는 지하에 150명 들어가는 작은 예배당을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알아서 방책을 간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비상기도를 선포하고 몇 달 동안 멜번 전역의 교회를 뒤졌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교인수 300-350명 정도 되는데, 본당은 있는데 식당이 없는 경우가 있어요. 또 예배 후 셀모임, 식당에서 밥 먹을 자리가 없었는데 빌릴 수가 없지요. 학교는 예배는 드릴 수 있었지만 음식을 못하니 도시락 싸와야 한다고 해요. 그때 저희 사정을 알던 교단에서 20% 디포짓 할 재정이 있으면 80%를 대출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저희는 당시 40만 불을 종자돈으로 모아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비빔밥을 먹었는데, 성도들이 식재료를 다 ­­가져 왔어요, 식비 대신 건축비로 적립했습니다. 그 40만 불로 추진했습니다.”
 
교단의 제안도 파격적이고 고맙긴 한데, 아무리 예산을 맞춰 봐도 30만 불 정도가 모자랐다. 고민 끝에 김 목사는 자신의 집을 팔아서 융자금을 갚고 나면 30만 불 남을 것 같았다. 그걸로 건축헌금 하겠다고 교회 재정부에 알리고, 80% 대출을 진행했다.
 
“그런데 갑자기 저의 눈의 시력에 이상이 왔습니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고 사물이 흔들리며 복수로 보였습니다. 급히 응급실로 가니 뇌졸증이라고 했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겨져 2주 동안 병상에서 지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의사는 일부 시력이 회복되는 사람도 있고, 빠르면 두 달만에 회복되기도 하지만, 회복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단에서는 ‘대출해 줄 수 없음. 경과 지켜보겠음’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교회는 쫓겨 나가게 생겼고, 저는 뇌졸증 환자가 되었고, 교단은 모든 제안을 철수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목사 보고 빌려주려는데, 목사가 아프니 안 빌려준다고 하니 사방이 막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같이 하시다가 막히니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 내리락 하니 초조하고 애타는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교회에 장로 한 명 없고, 장년 성도도 얼마 없고, 운영위원회는 고작 30대 중반들 뿐이었습니다. 그들 중엔 집이 없고 영주권이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 시력이 언제 회복될지 몰라, 매 주일 강단에 세울 강사를 찾는 것도 고역이었습니다. 8주 째가 되어가는데 한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평탄하게 목회도 잘하시던데 난 왜 이렇게 굴곡이 많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새벽과 밤에 저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눈의 초점이 맞질 않으니 두통도 심하고 구토증까지 생겼습니다. 누워서 주님께 신음으로 기도하는데 그야말로 뼈가 녹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니 큐티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찬양 듣고 성경을 듣기만 하는데.. 한 번은 책망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과연 나를 믿느냐? 네가 알지 못한 일을 내가 행할 것을 믿느냐? ‘저의 믿음 없음을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성도의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다시 고백하고 믿음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9주 째가 되었는데 어느 날 시력이 돌아왔습니다. 저의 가족과 성도들이 일제히 환호했고 교단도 기뻐해 주었습니다.”
 
교단에서 다시 멜본호산나 대출건을 위해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멜본호산나에 37만 5천 불을 무상 지원하고 80% 대출도 내주기로 결정이 났다. 누군가 교단의 무상지원은 역대 처음이라고 알려주었다. 모든 것을 비울 때 기막힌 방법으로 더 넘치게 채워주시는 분을 경험했다. 그 채움의 방법이 극한 한계까지 내몰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긴 하지만.
 
이 외에도, 2003년 호산나교회를 개척한 이후 안과 밖으로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고 했다. 제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전도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교회에 대한 거짓 소문들과 그 소문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토록 힘든 시간들을 오래 통과해야 할 때마다 멜번교역자협의회의 동료 목회자들이 격려를 해주어서 퍽 위로가 되었다고, 지나고 보니, 고난으로 인해 더 기도하게 되었다고 했다.
 
“더 낮아질 수 있어 저희에게는 좋은 양약이 되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 히잡을 둘러 쓴 이슬람교도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멜번호산나교회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한다.     © 크리스찬리뷰
 
준비된 손길들
 
그러나 교회 구입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융자건은 교단에서 은행을 만족시키는 보증인 문서작업이 보통이 아니었다. 마침 수학을 잘하는 집사가 교회 성장곡선 장기 계획 등을 잘 작성했다.  

“정말 순청년들이 대부분 교인이고, 일반 가정은 얼마 되지 않을 때입니다. 변호사도 회계사도 설계사도 재정설계사도 없었는데, 융자를 기적같이 받아 이 건물을 샀습니다. 그 와중에 교단에서 나서주니 15만 불 깎아주어 350만 불에 샀습니다. 이 건물을 사기 위해 인터넷을 많이 검색했는데, 초라하게 나와 있던 정말 우리를 위해 숨어있던 건물같았습니다.
 
방이 20개가 넘고, 화장실도 많은 의류회사 건물이었습니다. 튼튼한 건물이에요. 4년 전에 구입하여 2년 동안 허락받고, 수리하는데 일 년 걸렸습니다.”
 
의류회사 건물을 교회로 바꾸는 작업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건물 구입과 허락받는 일로 지쳐있었고, 비용도 고갈된 상태였다. 그러자 기적같은 손길들이 나타났다.
 
“먼저 김창현 집사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인데, 해외 큰 건설회사에서 오랜 경험을 쌓으신 분입니다. 현장소장을 하셨으니, 뭐든지 수치가 다 나오는 분이에요, 이분이 참으로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교회의 전기, 에어컨, 주방 등은 전문업체가 와서 했습니다. 인건비가 비싸니 청년들이 자원해서 봉사했어요, 벽과 천장 페인트를 담당하고, 카펫을 깔았습니다.
 
특히 죽다가 살아 넘긴 고비 세 번째를 넘기니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려고 그랬는지 교회 허가도 안났는데 중국에서 많은 분량의 카펫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래 층만 4천 스퀘어 면적입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건축 헌금이나 작정헌금도 안하고, 우리가 하던 대로 기도훈련 말씀, 전도와 세계 선교만 강조했습니다.
 
좌우간 짓다 보니 건축비가 들어왔습니다. 비품 물품 채우는 것도 100만 불이 넘습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비품을 사진 찍어 부동산처럼 사진을 붙여 교회 카페에 올렸습니다. 마이크, 선까지 세세하게 리서치해서 올리면 그것을 도네이션하거나 헌금하는 형식으로 다 채워졌습니다. 그러면 ‘더 안가져 오셔도 됩니다’하고 올려요, 그렇게 은혜로 일 년 만에 100만 불 다 갚았습니다.”

▲     © 멜번호산나교회
 
여기서 교회건축과 얽힌 숨은 일꾼들의 간증을 들어보자 
 
이금정 전도사: “저는 불교신자였고, 무신론자였습니다. 방황하다가 워킹 홀리데이로 멜번에 와서 2007년도에 길에서 전도받고 처음 교회 왔습니다. 제 발로 걸어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교회 안빠졌습니다. 교회가 이곳이 처음이라 모든 교회는 불신자가 다니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70%가 새신자입니다. 신학교는 새벽기도하면서 목사님께서 기도하시니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건축 팀에 합류하고, 훈련받고 전도훈련 다니고 보니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영혼구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장 젊었을 때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 깨닫고,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교회에서는 한국 청년부를 담당합니다. 우리 교회서 만난 아내도 불신자였는데, 말씀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수희 전도사: “2009년도에 처음 멜번 와서 새가족반을 듣고 나서 훈련받았습니다. 인천에서 큰 교회 다녔지만, 여기서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싶어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다시 왔습니다.
 
교회건축에 풀타임 무보수로 합류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장로, 권사 하시다가 신학을 하고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저도 가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하여 하나님 일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건축 마치고 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소영 집사(교회 내부 디자인 담당): “2006년도에 멜번에 왔습니다. 친척들이 크리스찬이었지만 우리 가정만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25살 때 인테리어 디자인을 했는데, 기회가 되어 혼자서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데 허무감이 들어 지식을 더 쌓으면 좋겠다 하여 대학원 시험을 쳤다가 떨어져 호주에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친척들이 모이면 예배 드렸는데, ‘호주에 오면 교회나 가볼까’했는데 마침 쉐어 메이트가 우리 교회 주방 캡틴이라 바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4번만 들어보면 되겠다고 하여 새가족반 들으려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새가족반에서 주일예배 드리고, 복음반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동안 기도는 저의 야망이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예수님 위해 살아가는가를 생각하며, 훈련받으면서 평생 주님 위해 헌신하겠다고 하여 신학교에 갔습니다. 이전에 했던 인테리어 일이 아까워 교회를 짓게 된다면 한번이라도 쓰임 받겠다고 작심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에서 그런 일을 몰랐습니다. 이전엔 예쁜 것, 예쁜 명품을 좋아했는데, 이젠 그것이 흥미가 없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날 신학하겠다 하니 다들 너무 깜짝 놀라요. 이 길은 좁은 길, 가난한 길을 자원하는 길인데 하면서요. 교회 건축하던 중 남편도 만나 결혼했습니다.”

▲ 다민족교회를 지향하는 멜번호산나교회의 추수감사 축제 현장의 다양한 모습들.     © 크리스찬리뷰
 
백근영 집사: “호주에 공부하러 온 친척 동생이 멜본호산나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주일마다 없어져서 물어보니 교회 다녀 온다고 했어요. 교회 다니면 김치를 준다고 해서 처음 몇 달 동안 인사도 안하고 인상을 딱 쓰고 다녔습니다. 속으로 어떤 목사님인지 모르지만 세상과 똑같은 이야기하면 나는 다시 안나간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때 신기한 것은 세상 정치가 아니라 예수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말씀이 저를 잡았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마음을 조금 열어 영접하면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결심하여  26세 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오래 못 다닌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안빠지고 나왔습니다. 말씀만을 들으면서, 멜번의 400만, 빅토리아주 600만, 156개 소수민족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전해서 그들이 각 나라마다 살릴 수 있다는 비전을 주셨는데, 그게 확 박혔습니다. 그 비전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도, 주변의 사람들도, 제일 인상 썼던 사람이었는데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건축할 때 몸으로 풀타임 무보수로 일했습니다. 건축할 때도 돈이나 방법을 이야기하셨다면 다른 길로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향, 자신과의 싸움, 영적인 싸움, 그때마다 마음 고생하신 것은 목사님이지만, 그때마다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것들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나아갈 방향을 적극 후원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저희 세대만 보고 이 사역하시는 게 아니라 다음세대까지 복음이 전달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호주를 살리고 유럽에도 들어가 복음 전해 다시 유럽 사람들이 세계복음화로 헌신하는 것이 목사님의 비전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새로운 영혼들이 오도록 기도하지만, 호주 백인교회, 앵글리칸교회에도 들어가 그분들도 저희처럼 전도, 말씀, 기도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아웃리치에서 만난 사람들을 가까이 돕고 있습니다. 훈련을 받지 않았으니 힘들어 하는 분들 중 호주 목사님들도 계신데, 우리가 하는 훈련을 그들에게 전하여 세계 선교를 하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처음엔 외국으로 많이 보냈는데 경제적인 지출도 많아로컬로 보내보기 시작했는데 현재 로컬에 25팀을 보냅니다. 건축하면서 체험한 것은 너무 많은 호주교회들이 술집으로, 이단으로, 아파트 부지로 팔리는 것을 보면서 호주 교회를 살리겠다는 마음이 뜨겁게 들었습니다.”
 
불과 멜번호산나에 출석한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사역자가 나오고, 이토록 헌신된 고백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비결은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윈 멕마너스가 “교회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심장 박동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바로 멜번 호산나라고 할 수 있다.

▲ 창립 6주년에 러브 멜번 행사를 마친 후 전 교인이 기념촬영을 했다.     © 멜번호산나교회
 
변화된 사람들
 
멜본호산나는 한국교회인데, 외국인들이 찾아오는 신통한 교회이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 김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목회하고 있지만 부르심과 하는 일은 선교사, 전도자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언어의 한계로 선교에 지레 겁을 먹습니다. 저 역시 언어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방법을 찾다가 결론은 아이들 훈련시켜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두 딸 아이부터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외국인들이 왔습니다. 사람을 준비시켜 놓으면 하나님께서 영혼을 보내신다는 경험을 했습니다.
 
몇 사람들이 통역할 준비가 되어 있고, 말씀 훈련이 되어 있으니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통역을 굉장히 정확히 할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합니다. 센텐스를 짧게 합니다. 설교가 중요해요.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한인들처럼  똑같이 복음을 제시하고 복음을 가르치면 안될 것 같지만 고비만 넘기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이면 듣습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복음을 명확히, 짧게 제시하면 하나님이 영생 주시기로 하신 분은 영접합니다. 처음 전도 나가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이야기하니 그분이 영접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선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서 영혼을 살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여 처음에 오면 교인이 많다 보니, 셀에 들어와야 셀에서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혼자 자진해서 왔는데, 너무 반겨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 공통적인 고백이다. 다른 데서는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는데, 셀에서 깊이 만날 수 있도록 하고, 교회 프로그램에 연결될 수 있도록 돕고, 처음 교회 왔을 때 정착하도록 심방도 하고, 개인양육도 한다. 앞서 말한 ‘인사 잘하는 친절’은 셀에서 경험한 진심어린 사랑의 흔적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교회부흥이랑 상관없는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교회부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시티나 지역마다 술집이나 타락한 업종들이 얼마나 있는가 조사해서 리스트를 만들어 기도했습니다. 영적으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금요일 예배 마치고 노숙자들 만나고, 디텐션 센터 가서 4-8주 동안 양육하고, 양로원 같은 데도 갑니다.”
 
현재 멜본호산나에 속한 교인은 모두 26개국에서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인 200명, 한국인 200명, 영어(호주인) 100명이 주종을 이룬다.
 
“처음에는 외국인들이 다 합쳐서 100명이 안될 때 비중이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 모든 시스템 사역도 국적불문하고 훈련시켰습니다.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세워지게 했습니다. 물론 훈련시키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머리만의 신앙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신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대만, 스리랑카, 필리핀, 말레이지아, 홍콩, 호주 등의 국적을 가진 몇몇 외국인들의 간증을 들어보자.

▲ 의류공장 건물을 교회당으로 바꾸는 작업은 청년들의 자원봉사와 헌신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 멜번호산나교회
 
에드워드(홍콩) :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명예를 쫓아 살았고, 자기계발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평판하는가에 신경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다 보니 우울증이 왔습니다. 이 교회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피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니 저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존귀하기 때문에 저 자신도 존귀하고, 저 자신의 존귀함을 아는데 무엇을 더하기도 자의식이나 우울함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에론(베트남) : “예수님 알기 전의 삶은 방황하는 삶이었습니다.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매일 돈을 좇아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5명이었는데 가정에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항상 가정 안에서 시작되었고, 사업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의 가정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태국에서 온 바스 자매를 보내주셔서 이곳 교회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게 시작이었습니다. 교회에서 훈련받고, 아웃리치 전도도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시고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큰 딸이 17세인데 이곳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부모님께 권유도 안했는데, 자발적으로 나오셔서 침례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시바(스리랑카 난민) :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노숙생활을 했습니다. 일하러 먼 길을 가야할 때는 교통비가 없어 차를 타지도 못했습니다. 구직 인터뷰를 하면 사람들이 모욕을 주어 슬퍼하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밥 한끼 먹는 것도 전쟁 같았습니다. 어느 날 밤 11시, 교회에서 하고 있는 커피 전도를 받아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난 후, 저 자신의 죄가 깨달아져 예수님과 하나님께 죄송하여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차마 의자에 앉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처음 교회 올 때, 좋은 옷을 입고 와야 하는데 냄새 나는 옷뿐이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나서 인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기도응답으로 난민비자로 영주권을 받았고, 좋은 직업도 찾았습니다. 직장에서 크리스찬 매니저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리에 문제가 있었는데 새벽기도를 통해 응답받았습니다. 주방과 워십댄스로 봉사하고, 커피전도를 나갑니다.”
 
루드라(인도 힌두교 배경) :  “2011년 전도축제 때 처음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전의 삶은 가정에서 가출하여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고 방황했습니다. 마음의 평안과 사랑을 계속 찾으려 했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 했는데 소용없었습니다. 전도집회 때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 전에 몰랐던 사탄의 존재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너무 좋아 행복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후로 계속 참여하여 말씀 훈련도 받고,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하게 되어 호주인 친구들과 부모님도 교회로 모시고 나왔습니다. 전도집회에 온가족이 다 참석했습니다.”
 
닉(호주): “자라면서 받아야 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마약과 마리화나로 풀려고 했습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에도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계속해서 마약을 했고, 더 자극이 심한 마약을 했습니다. 저 자신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도 했습니다. 그것을 함으로써 영적인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약은 영적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함을 깨닫고 명상을 매일 했습니다.
 
명상 캠프도 참여하고, 명상을 통해서 외계인과도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에서 루드라 자매가 영상 제작을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 영상이 요한계시록 3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문을 두드린다는 제목이었는데, 내용은 마음이 강퍅한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영상제작을 하면서 저 자신이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계속해서 제가 왜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시간이 지나면서 루드라 자매가 호산나교회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갖고 있는 관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 삶을 바꾸신 것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지 않습니다.”

▲ 본지는 멜번호산나교회 일꾼들과 단체 인터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바스(태국인) : “교회 나오기 전에 저는 대부분 술 마시고 담배 피고, 음란물을 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저 자신을 열심히 일하도록 내몰았습니다. 그럴수록 제 자신의 마음 속에 화난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제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좋은 아내와 결혼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매일 꿈꿔 왔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은 가족이 일하는 사업인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집이었지요.
 
저는 미래에 대해서 희망이 없었습니다. 멜본호산나 다니는 형제자매들이 거리에서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출석하고, 제자훈련 받으면서 기도응답을 받았는데, 담배, 술, 음란물 보는 것을 끊게 되었습니다. 기도응답으로 교회 안에서 결혼하고 아들도 낳았습니다. 아내는 중국인으로 기도 응답받고 신학교 다니다 출산을 했습니다.
 
결혼식 때 온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에 기도응답을 많이 받고,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분노가 없어졌고, 지금은 평안이 있습니다. 교회 제자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생활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지니(말레이시아): “저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 가정에서 태어났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인데,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어 고등학교 때 귀신들과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엔 술, 담배 그리고 매주 클럽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멜번에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일하려고 했는데, 비자 때문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집에서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제가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보통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무시했는데, 이곳에 와서 제 삶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모든 제자 훈련에 참여하게 되었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클럽이나 술, 담배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자훈련 통해 하나님이 왜 나를 창조하셨는지 깨닫게 되었고, 어릴 때 갖고 있던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목적도 깨달았습니다. 선교여행, 전도에도 참여하고 있고, 새가족부 통역부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한국 형제와 교제 중에 있습니다.”
 
오스카(필리핀) : “이제 6년째 교회 다녔고,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습니다. 멜본호산나에 다니면서 제 삶이 변했습니다. 지금이 밤 9시 반인데 예전이면 클럽에서 마약, 술, 담배에 찌들어 춤추고 있을 시간인데, 지금 이렇게 유명한 잡지 인터뷰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교회 나오기 전에 나는 항상 화가 나있고, 폭력적이었고, 반항적이었습니다. 갱단에서 연결되어 마약도 사고 팔았습니다. 안좋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지요, 저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크리스찬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도 다녀봤고, 필리핀과 호주 카톨릭교회에도 다녀봤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았지만,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교회 초대 받고 와서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알았지만 그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인 줄 몰랐는데,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구주와 구원자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50킬로 이상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데, 매번 오가는데 2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도 왜 이 먼 곳에 기름 쓰고, 영어로 이야기 하지도 않지만 나오겠습니까? 이곳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알게 되었고, 성령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에서 어떻게 기도하는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는지 등등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전의 삶은 죽었고, 예수님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복음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구원을 얻었고, 동생이 이 교회에 같이 나오고 선교여행도 갔습니다.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설교, 기도, 큐티, 제자훈련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선교하는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목사님의 조언과 기도를 통해서 신학을 파트타임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교회 옆으로 이사했습니다.”

▲ 점심식사 후 식당에서 그룹별로 나눠 셀모임을 갖고 있는 성도들.     © 크리스찬리뷰
 
배럴(인도네시아): “크리스찬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원래 불교신자였는데, 대학교 때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부모님 교회에서 목사님이 오셔서 훈련도 받았습니다. 가정에서 영적으로 많은 힘든 사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성장할 때 엄격한 기독교 규범을 배웠는데, 매주일은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싶었고, 친구들과 더 어울리고 싶었습니다.
 
저녁 귀가 시간도 밤 10시 30분 내로 엄격하게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12시까지 노는데 저는 그렇게 못했으니, 그것 때문에 짜증도 났습니다. 고등학교 때 아직도 나를 조절하고 계시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었지만 깊은 관계는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친구들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 했고, 음란물에 빠지게도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관점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멜번에 오게 되었고, 먼저 와 있던 친누나가 멜본호산나에 초청했습니다. 초청했을 때 영적인 것에 관심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주일만 교회 갔는데 이곳에 온 후는 제자훈련에 참여하고, 멜번에 오자 이제는 부모님에게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누나가 방학으로 인도네시아 돌아갔고, 저만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주일을 많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저의 영적 생활에 가장 어두웠던 시절이었습니다. 항상 방에 있었고,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았고, 음란물만 보았습니다. 공부를 안해서 과목 낙제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 계기를 통해 회개해야 했고, 하나님을 찾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삶의 우선 순위를 교회로 삼았습니다. 복음반 4과를 듣고, 기도하기 전에 알아야 할 3가지, 그리고 여러 성경구절,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것을 배웠고, 사모님께서 음란에 빠진 3가지 대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낮추심, 둘째 질병, 셋째 재정의 어려움 등의 말씀이 제 마음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로 마음이 열렸고, 제 눈을 통해서 직접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죄에 대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모든 죄를 끊게 되면서 계속 교회만 오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을 자꾸 초청하니 친구들이 저를 피해갈 정도입니다.
 
제가 너무  행복해서 친구들을 초청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했는데, 부모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엄하게 다스리는 줄만 알았는데...”
 
리비(대만) :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이혼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2012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정신문제와 지적장애자인 언니가 우리 집으로 왔고, 저는 친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너무 슬펐습니다. 엄마와 단둘이 살 때는 행복했는데, 아버지 사망 후 왜 내가 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가?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엄마와의 관계도 안좋아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호주로 오게 되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때 에드워드를 만나 멜본호산나에 와서 복음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간증이 있습니다. 가정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복음을 전하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3주 전에 대만을 방문, 친언니를 만났는데 언니가 행복하고 기쁨에 차있었습니다. 학교 근처 교회에 친언니가 다니고 있는데, 저에게 친언니가 예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은 다음, 자기 질문에 자문자답을 해요,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계서’하는 것을 보고 제 마음이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친언니가 가정의 축복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 제자훈련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올림피아(인도네시아) :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습니다. 10살 때부터 교회 일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5남매 중 조용하고 잘하는 것이 없어 자랑스럽지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멜번에 와서 공부하면서 일도 하여 학비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어떤 이가 멜본호산나로 초대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생각했습니다. 언제 섬길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고, 3년 동안 복음반만 들었습니다. 제가 크리스찬인 것을, 하나님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지만 저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오바마에 대해 많은 내용을 말할 수 있었지만 정작 필요할 땐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하나님과 관계도 딱 저렇구나 생각하고, 그냥 미국의 시민처럼 그 나라에 살고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제자훈련을 통해 교회를 섬겼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었습니다. 섬길 때 모든 것을 제 일로 생각하고 했습니다. 복음반을 졸업한 후 주방에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교회에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전에 교회는 친구를 찾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관점이 주변의 사람에게로 바뀌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처럼 불행하고, 힘들게 보내는 그 분들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한 시간 이상 걸려서 와야 했는데, 교회 오는데 돈이 많이 들기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거듭나고 나면 새가 노래하고 꽃들에게서 기쁨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것을 느꼈습니다. 새가족부, 통역부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 추수감사 축제를 마친 후 교인들의 단체 촬영.     © 크리스찬리뷰
 
영혼구원 최우선 전략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면, 바로 거리로 뛰어나가 전도하겠다는 김 목사는 ‘영혼구원 최우선’ 목회를 하고 있다. 불신자들을 구원받게 하고, 그들이 구원받으면 사명에 눈뜨게 하고, 제자 삼아서, 헌신하도록 돕는 4단계를 철저히 실천하며 이제까지 달려온 것이다.
 
외국인이 많은 교회라고 하여 유창한 영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거리낌없이 외국인 선교를 하고 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국인이 제자 된다면 외국인도 제자될 것을 믿었습니다. 저는 항상 한국말로 설교합니다. 말씀 훈련도 한국말로 합니다. 단지 통역자들과 외국인들을 배려하는 일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예를 들어, 쉽게 설교하려 애쓰고, 가지 치지 않고 소대지에 충실하고, 문장을 짧게 말합니다.
 
26개국의 사람들이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예수 안에서 모두  똑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벽기도는 한국 사람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들도 새벽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도 우리처럼 무릎 꿇고 소리내어 기도합니다. 우리처럼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무릎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들도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은혜 받으니 똑 같이 기도하고, 똑 같이 복음 전하고, 똑 같이 헌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한 아버지 안에서 한 성령 안에서 예수로 인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본지 인터뷰에 참가한 다민족 성도들.     © 크리스찬리뷰

이러한 김 목사를 대하니 ‘선교사란 하나님의 시간대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의 정의에 꼭 들어맞는 생각이 들었다. 〠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동사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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