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12/26 [11:34]
주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자) 칭호를 받고 로마의 초대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취임식에 모인 군중들에게 호기를 부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지금 밟고 서있는 땅은 머잖아 모두 대리석으로 바뀔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누구인가. 천하 모든 사람에게 호적하기를 명하여(눅2:1) 갈릴리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가이사 아구스도가 바로 이 사람이다. 공화정을 지키고자 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라티푼디움으로 요약되는 로마의 병세가 워낙 위중했기 때문이다.
 
<차움병원>의 프로포폴 주사 따위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청와대의 <헌정파괴>와 같았다고나 할까.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3인에 의한 <3두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3사람은 밀실에 모여 앉아 <카이사르를 집정관으로 뽑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토지배분의 유리한 위치를 갖기로> 야합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에 죽고 폼페이우스의 부인 율리아마저 죽으면서 깨어지고 만다. 율리아는 카이사르의 외동딸이었는데 정략적인 결혼이었던 탓에 더 이상 연대의 효력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정적들에게 살해당한 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에 의한 제2차 3두정치가 시작된다. 레피두스가 먼저 제거되고 로마와 서방을 차지한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와 동방을 차지한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좁혀진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이집트의 궁전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신격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의 지배자는 자신임을 내세운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 로마에서 일으킨 모반을 진압한 것도 이때이다. 격분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군과 연합하여 대항해 오자 이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로마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때가 주전 27년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했던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그는 그 길을 쉼없이 내달려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무렵 수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19세에 불과한 소년이었고 로마가 아닌 변방에 머물고 있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자기의 유언집행을 맡길 정도로 카이사르가 신임한 오른 팔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치는 차츰 역전되었다.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한다는 카이사르의 유언을 숨기고 안토니우스는 자기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양 모든 권력을 차지하였다. 카이사르의 측근 몇 사람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사실을 귀띰해 주었다.  
 
기본(E. Gibbon)의 말대로 옥타비아누스는 <강건하지는 않았지만 영리하고 총명했다>. 안토니우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권력을 되찾고자 친구 겸 보좌관인 아그리파와 함께 로마로 돌아온다. 그의 용기에 감명받은 카이사르의 군대가 속속 그의 곁으로 집결하고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원로원의 키케로마저 그를 돕기 시작한다.
 
로마로 돌아 온 옥타비아누스는 소리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여동생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켜 유대를 강화하고 레피두스를 당근으로 회유하면서  3두정치의 한 축을 차지한다. 먼저 레피두스를 제거한 뒤 안토니우스마저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로마의 적으로 몰아 집정관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다. 그리고 무섭게 공격해 오는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궤멸시키고 대망의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옥타비아누스는 숙적 파르티아를 점령한 뒤 <로마는 더 이상 정복전쟁에 나서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절제정책>이라 명명되어 이후 로마 황제들의 교과서가 된다. 대신 그는 내치에 집중하여  신분제도를 정비하고 식량공급과 치안에  힘을 쏟았다.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건축사업을 벌여 로마를 약속한 대로 진흙에서 대리석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가 통치한 41년간 로마는 전무후무한 평화를 누린다. 이 평화는 무려 200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역사가들은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라 하였다.〠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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