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지 못하는 교회,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

‘세월호 유가족’과 ‘평화의 소녀상’과의 만남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7/04/24 [10:00]
▲  크리스찬리뷰 5/2017 표지   © 크리스찬리뷰

2017년 4월 3일, 제주에서는 4·3 사건 기념식이 있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이날 오전 11시,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희생자 추념식에서 "그동안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2016년 6월 22일, 나는 '제주 4·3 평화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날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시된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불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 제주 4·3사건 당시인 1949년 4월 제주의 학교 운동장에서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의 모습.     © 크리스찬리뷰
 
“무장대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선거 당일 마을에서는 경찰가족이나 우익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민들은 산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고, 다음 달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민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고,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 제주 4·3 평화기념관.     © 김환기

소수의 빨갱이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 그 후 4·3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히는 듯했으나, 2000년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 애쉬필드 연합교회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며 세월호 희생자인 자신의 딸 ‘지성’이를 만난 것 같다는 문종택, 안영미 씨 부부.     © 크리스찬리뷰

평화의 소녀상(Statue of Peace) 

같은 날 같은 시간, 시드니에서는 세월호 유가족인 문종택, 안영미 씨 부부가 '평화의 소녀상'을 방문했다. 문씨 부부는 세월호 침몰 당시 단원고 2학년이던 문지성 양의 부모이다. 세월호 침몰 3주기를 앞두고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뉴질랜드를 거쳐 지난 4월 1일 시드니를 방문하였다.
 
'평화의 소녀상'은 '애쉬필드 연합교회' 마당에 서 있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빌 크루즈 목사(Rev. Bill Crews)는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문제가 한·일 정부 간의 전격적 합의가 이루지자,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해외에 소녀상을 건립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때를 맞추어 시드니에서는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박은덕 변호사와 강병조 씨를 중심으로 ‘평화의 소녀상’ 장소를 물색했지만 쉽지 않았다.

▲ 애쉬필드연합교회     © 크리스찬리뷰
 
때마침 빌 목사는 지역신문을 통하여 소녀상 설치가 어렵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 세울 것을 제안하였다. 그 후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설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일본의 조직적인 반대와 로비로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빌 목사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성남시의 도움을 받아 '평화의 소녀상'을 교회 내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최초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000차 수요집회 때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졌다. 해외에서는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LA 인근 글렌데일시의 공원 도서관 앞을 시작으로 미시간주 한인문화회관 앞, 캐나다 토론토 한인회관 등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해외에는 북미를 제외하고 2016년 8월 6일 '평화의 소녀상'을 시드니에 최초로 세웠다. 몇 달 전 부산의 시민단체는 2016년 12월 28일 기습적으로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였다. 2017년 1월 9일 일본은 정부간의 '합의위반'이라며  대사와 총영사를 송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본은 3월 4일 다시 대사와 총영사를 귀임시켰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이다. 전쟁의 아픔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1920~1940년대 조선 소녀들의 일반적인 외모를 가진 단발머리 소녀로 의자 위에 손을 꼭 쥔 채 맨발로 앉아 있다.
 
단발머리는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 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방황을 상징한다. 소녀상 옆의 빈 의자는 3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추모의 마음. 둘째 연대와 참여. 셋째 쉼과 휴식.

▲ 출애굽 재단(Exodus Foundation) 로고  

출애굽 재단(Exodus Foundation) 
 
교회 입구에는 '애쉬필드 연합교회'라는 입간판 외에도 벽에는 'Exodus Foundation'이라는 간판이 크게 붙어 있다.
 
빌 목사는 1944년 생으로 영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교육을 받았다. 장학생으로 NSW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1969년 시드니 킹스크로스 홍등가에 위치한 'Wayside Chapel'의 소외된 자들을 위한 자원봉사를 시작하였다.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게 되었다.

▲ 애쉬필드연합교회는 매일 2차례씩(아침,점심) 노숙자들과 생활이 어려운 이웃주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 크리스찬리뷰
 
1986년 호주연합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애쉬필드 연합교회에 부임하여 1993년 9월 10일 노숙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Exodus Foundation'를 설립하였다. 현재 'Exodus Foundation'은 시드니에서 가장 큰 자선단체 중 하나로 발전하였다. 하루 1천200명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며, 샤워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그곳에서 한 노숙자를 만났다.
 
- 이곳에서 사시나요?

"아닙니다. 샤워하러 왔습니다."

- 잠은 어디서 자나요?
 
그는 옆에 있는 큰 가방을 보여주었다.
 
"제 침낭입니다. 길가다 눕기에 적당한 곳이 있으면 거기서 잡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 가는데 걱정이 되었다.
 
- 부인은 없나요?
 
"타이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지금은 타이에 있습니다." 
 
- 자녀는 없나요?

"양육할 능력이 없어 낳지 않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그의 앞니는 말을 할 때마다 앞으로 나왔다.
 
-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55살입니다. 늙어서 아무도 고용해 주지 않습니다."
 
내 나이를 말해 주려다 참았다.
 
"아무쪼록 빨리 취직해서 겨울이 오기 전에 안식처를 찾으면 좋겠네요."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뒤로 하고 빌 목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소녀상 제막식에서 빌 크루스 목사는 “계속되는 고통을 없애려면 일본 정부는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평화의 소녀상을 보니 눈물이 난다”며 기념사에 대신했다.     © 크리스찬리뷰

빌 목사와 만남 
 
강병조 씨의 사회로, 빌 목사와 문 씨 부부는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강씨는 시드니온누리교회 집사이다. 강 집사는 '416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드니 행동'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강 집사는 빌 목사에게 세월호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했다. 설명 중에 빌 목사는 세월호 참사를 잘 알고 있다고 화답했다. 강 집사는 문 씨 부부의 일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문 씨 부부는 뉴질랜드를 거쳐서 지난 4월 1일 오후 시드니에 도착했습니다. 당일 저녁 스트라스필드에서 교민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고, 집회가 끝나고 스트라스필드 광장에서 촛불집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기자 간담회를 마치고 저녁에 맨리 성당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촛불 미사를 드릴 예정입니다. 시드니 일정을 마치면 캔버라와 멜본 그리고 브리즈번에서 집회를 가진 후 4월 11일 출국할 예정입니다."
 
문 씨가 말문을 열었다.
 
"삶이란 호주나 한국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빌 목사가 맞장구를 쳤다.
 
"생명의 중요성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빌 목사는 종교와 인종을 넘어 '생명과 인권'에 관련된 일이라면 모든 일을 불사하고 도와주는 저명한 인권운동가이다. 문 씨 부부는 빌 목사의 호의에 감사하며 가방에서 작은 선물을 꺼냈다. 희생자 가족이 만든 뜨개질 찻잔 받침과 노란 세월호 리본이었다.
 
"차를 마실 때 아이들을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 문종택, 안영미 씨 부부가 빌 크루즈 목사에게 세월호 리본과 뱃지를 달아 주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안 씨는 세월호 리본을 빌 목사의 가슴에 달아 주었다.
 
"홍콩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있었을 때 노란색이 심벌이었습니다. 제가 꼭 차를 마실 때마다 기억하겠습니다."
 
"제 딸은 지금 프랑스에서 살고 있습니다. 딸과 헤어질 때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딸과 아버지는 특별한 사이인 것 같습니다."
 
빌 목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 집사는 문 씨 부부가 크리스찬이라고 소개하였다.

"종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달라이 라마'입니다. 2주 후에 그를 만나러 갑니다."
 
그는 평범한 목사가 아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자식 사랑은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다 똑같습니다."
 
▲ 빌 크루즈 목사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곧 만날 예정이라며 문 씨 부부가 전해 준 찻잔 받침과 세월호 리본을 달라이 라마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 크리스찬리뷰

안 씨는 다시 가방을 열어 찻잔 받침과 세월호 리본을 꺼냈다.
 
"저는 갈 수 없지만 이 선물을 '달라이 라마'에게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빌 목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제가 꼭 전해 주겠습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인증샷'까지 찍었다.
 
안 씨는 시드니의 소녀상과 부산의 소녀상을 비교하며 이야기했다.
 
"부산의 소녀상을 보았을 때는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무척 추웠습니다. 그런데 시드니의 소녀상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노숙자를 돌보는 교회에, 소녀상이 있으니 더 따뜻합니다."
▲ 노숙자들이 비오는 날 평화의 소녀상에 우비를 입혀 주었다.     © 크리스찬리뷰
 
빌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이곳 노숙자들이 소녀상을 잘 돌보고 있습니다. 비가 오면 우비도 입혀 줍니다."
 
문 씨는 빌 목사에게 세월호 유가족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를 부탁했다. 빌 목사는 흔쾌히 허락했다.
▲ 세월호 배지를 달고 있는 빌 크루즈 목사     © 크리스찬리뷰
 
"한국인이 아파하는 것은, 우리가 아파하는 것이고, 우리가 아파하는 것은, 모두가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픔은 나누는 것입니다. 이곳까지 오셔서 아픈 이야기를 나누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도 여러분의 아픔에 동참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노숙자들도 여러분의 아픔에 동참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드니행동’이 개최한 세월호 유가족과의 간담회가 지난 4월 1일 저녁 스트라스필드에 있는 라트비안 회관에서 열렸다.     © 크리스찬리뷰

직접 듣는 세월호 이야기
 
문 씨 부부는 4월 1일 오후 시드니에 도착하여 저녁 7시부터 '직접 듣는 세월호 이야기'란 주제로 스트라스필드 라트비안 회관에서 교민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문 씨 부부로부터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들을 수 있었다. 행사에는 1백여 명이 참석하여 유가족들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분노를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사전행사로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주제로 ‘김성종 씨와 전은숙씨’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사회자의 환영사에 이어 김성필 씨의 시낭송과 세월호 유가족의 협의회에서 전하는 영상을 보여 주었다. '혼스비 노랑풍선'의 합창에 이어서 세월호 유가족을 대신하여 문 씨 부부의 인사말이 있었다. 이어진 세월호 영상을 볼 때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감추지를 못했다.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주최 측에서 입장할 때 노란 종이의 질문지를 받았다. 대부분이 '위로와 격려'의 글이었다. 사회자는 질문지 중 하나를 택하였다.
 
"박근혜 씨 같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안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불쌍합니다. 왜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지 정말 불쌍합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왜 용서하지 않겠습니까?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마이크는 문 씨에게 넘어갔다. 그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침몰 당시 딸과 한 마지막 통화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과 자괴감에 피를 토하듯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는 단호하고 비통한 어조로 질문을 다시 읽고, 질문지를 찢어 버렸다.
 
Canto4U의 추모공연이 있은 후 모두는 스트라스필드 광장으로 나가 촛불집회를 가졌다. '잊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쓴 노란 현수막을 들고 촛불을 흔들며 노래블 불렀다. 촛불로 세월호 리본을 만든 후, 한국의 유가족에게 ‘힘내세요, 힘내세요!’구호를 외친 후 행사를 마쳤다.

▲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세월호 유가족과의 간담회, 기자 회견, 미사, 선상 추모행사 등이 시드니에서 열렸다.     © 크리스찬리뷰
 
기자 간담회

4월 3일 빌 목사와 인터뷰 후 몇몇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 어떻게 소녀상이 있는 이곳까지 방문하게 되었습니까?
 
시드니 소녀상 건립 공동회장인 강병조 집사가 대답했다.
 
"3월 1일, 삼일절 행사가 이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빌 목사와 세월호 집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던 중 참사로 죽은 학생들과 위안부 소녀의 나이가 비슷하여 이곳을 택했습니다."
 
- 크리스찬리뷰사는 호주에서 유일하게 팽목항에 직접 가서 취재를 했습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침몰 당시 구조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구하지 못했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지 권순형 발행인의 질문이다.
 
"쉽게 말해서, 한국에는 문관은 많은데 무관이 없습니다. 모두가 말로만 하지 실질적인 전문가가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서 행동하는 것은 문관이 아니라 무관입니다. 그래서 시끄럽기만 하지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모릅니다.
 
또한 책임지기 싫어서 아무도 명령하지 않습니다. 저는 해운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문제는 ‘왜 진실을 감추고 책임지지 않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문 씨가 답했다.
 
- 사고 전과 후의 신앙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필자는 세월호 참사가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었다.
 
"사고 후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많이 떠나거나 옮겼습니다. 교회는 사랑이 많은 곳인 줄 알았는데 형식에 불과했다고 느꼈습니다."
 
안 씨가 말을 이었다.
 
"전에는 틀에 박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회가 원하는 대로 힘겨울 정도로 봉사했습니다. 내 삶도 접어두고 말이죠. 하지만 교회가 하는 모습을 보고 이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하나 둘씩 틀을 벗어버리고 있습니다. 부착한 것을 떼어 내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지금은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점차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지탄을 받을 때 무조건 덮어 주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곪은 것은 수술해야지 덮어준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으며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미안했다. 과연 교회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교회가 아픔을 가진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더 나가서 교회는 앞에서 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에 화가 납니다.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교회는 분명 이런 것은 아니기에 더 화가 납니다."
 
남편은 안 씨를 대신하여 말을 이었다.
 
 "요즘 저는 많이 웁니다. 통곡하며 울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40년 이상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성가대장으로 봉사도 했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천국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예수님은 어려운 곳, 낮은 곳에 계신데 우리는 자꾸 높은 곳에 가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팽목항에 계시고 고아원에 계신데, 우리는 자꾸 교회 안에서만 예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문 씨 부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특히 안 씨는 4대째 기독교 가정으로 교회가 모든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러던 그녀가 세월호 참사를 통하여 교회의 민낯을 직면하게 되었다. 문 씨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교인으로 교회 욕을 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아서 저도 안타깝습니다."

▲ 세월호 유가족과의 간담회를 마친 후 스트라스필드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호주 교민들은 잊지 않고 유가족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 크리스찬리뷰
 
걷지 못하는 교회

점심 식사 후 강 집사의 사업처인‘한솔장례서비스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단독으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 교회가 손을 잡아 주고 이끌어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죠?
 
문종택: 우리가 처한 현실이 스스로 이겨나가기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실을 알기 원합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은 성금 걷어 주는 것이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가족은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조직적으로 유가족을 도왔습니다. 유가족들과 리본을 만들며 같이 있어 주었습니다. 저는 천주교가 부러웠습니다.
 
개신교는 높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서 행사하고 사진을 찍고 갑니다. 유가족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자신들이 생색내기 위한 행사입니다.
 
▲ 세월호 유가족 문지성 양(단원고)의 어머니 안영미 씨.     © 크리스찬리뷰

안영미: 저는 교회가 정말 정의로운 모습인 줄만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파서 힘들어하니까 분명 교회는 우리 손을 잡아 주고 이끌어 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교회의 모습은 '못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와서 세월호를 외치는데 교회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 4.16TV 대하여 말씀해 주시죠?
 
문종택: 4.16TV는 인터넷 방송으로 유가족들의 몸부림입니다. 왜곡된 언론에서 벗어나 유가족의 진실과 아픔을 알리기 위해서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가 '촛불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지' 진실을 알리기 위한 방송입니다.
 
- 자녀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안영미: 저는 띄엄띄엄 아이를 낳았습니다. 큰 아이가 29살입니다. 둘째는 결혼했습니다. 지성이는 4번째 딸입니다. 딸.딸.딸.딸 그리고 아들입니다. 제주도에서 13년을 살았고, 딸 세 명은 제주도에서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기 위해 4째를 낳았는데 지성이었습니다. 그 후 아들을 낳았습니다. 지금 중학교 2학년입니다. 당시 가족계획 정책을 따르지 않은 것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 다른 유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문종택: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는 힘들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70-80여 명 정도됩니다. 유가족들은 팽목항과 광화문 그리고 안산 분향소 등을 중심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말마다 함께 모입니다.
 
- 교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문종택: 3년을 함께하여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더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런 말은 오히려 제가 여러분에게 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세월호가 인양은 되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마무리가 잘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을 모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SNS 등을 통하여 계속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세월호 유가족 문지성 양(단원고 2년)의 아버지 문종택 씨.     © 크리스찬리뷰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95항을 비텐베르크 성당에 부착했다.
 
루터는 카톨릭 내부의 개혁(Reformation)을 원했지 혁명(Revolution)을 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가 반박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1520년 그는 3편의 논문을 발표함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첫째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둘째 ‘교회의 바벨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셋째 ‘크리스찬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 둘째 논문인 '교회의 바벨론 유수'는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반박한 글이다. 유수란 포로란 뜻이다.
 
혹시 작금의 교회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아닌지? '형식의 포로'가 되어 내용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현상의 포로'기 되어 본질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율법의 포로'가 되어 은혜를 잊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신앙생활 대신 종교생활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 구세군 본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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