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O 부대 계지묵 대원의 6.25 참전수기

잊혀진 영웅들, 켈로부대(KLO:Korea Liaison Office)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06/26 [12:09]
▲ 특전사의 모체이지만, 특수부대라 기록이 없어 국가유공자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6.25 전쟁 당시의 미군 산하 8240부대(일병 켈로부대). 8240부대원이 중공군 복장을 하고 북한으로 침투하기 직전 모습.     © 나무위키

(사)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호주지회 부회장을 지낸 계지묵 집사(열린문교회)는 켈로부대(KLO) 출신으로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67주년 6.25을 맞아 참전 수기를 기고해 왔으며, 이에 본지는 베일 속에 싸여 있는 켈로부대의 실체에 대해 ‘나무위키’(https://namu.wiki/w/KLO) 기사와 함께 게재한다.(편집자주) 
 
▲ 고교 3년 때 켈로부대에 징집되었던 계지묵 부회장이 KLO휘장과 충무·화랑 훈장 및 참전기장 등을 착용하고 촬영했다.     © 계지묵

켈로부대 (KLO)
 
1. 개요
 
광복 이후 남한에 주둔한 미 육군 제24군단은 예하에 크게 두 그룹의 정보기관을 거느렸다. 하나는 4개의 일반참모부(G-1, G-2, G-3, G-4) 중 정보 참모부로 알려진 G-2였고, 다른 하나는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로 일컫는 방첩대였다.
 
1945년 9월 9일에 제224 CIC파견대(the 224th CIC Detachment)가 최초로 남한에 들어왔으며, 소속 요원 대부분은 태평양전쟁 당시 리이테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었다.
 
224 CIC파견대는 다양한 CIC 전투부대분견대(combat unit detachment), 수도부대(metropolitan unit), 지역부대(area unit)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들 각 파견대는 도쿄의 제441 CIC 파견대 통제를 받다가, 1946년 2월 13일 서울의 제224 CIC파견대가 남한주둔 모든 CIC파견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뒤, 4월 1일 모든 CIC파견대가 971CIC파견대로 교체되고 나서야 본격 활동에 돌입한다.
 
1946년 미 제 육군 제24군단 정보처 산하에 대북공작을 담당했던 첩보부대인 442CIC를 창설하고, 이후 1948년 8월 미 극동군사령부(GHQ) 정보처에서 442CIC를 기반으로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백의사, 정의사 등 여러 반공단체를 망라하여 켈로(KLO)부대를 만드는데, 대북첩보를 위해 주로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북출신이 중심이었다.
 
KLO는 주한 첩보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의 약자로 케이엘오를 줄여서 흔히 ‘켈로부대’라 불린다. 클로가 아니다. 1948년 12월 CIC는 공식 철수했으나 그 요원 상당수는 그대로 남아 켈로부대로 알려진 KLO와 미극동공군의 대북 첩보기관인 미 공군 인간첩보부대(USAF HUMINT)로 역할이 옮겨진 것이다. 
 
▲ 6.25 당시 특수임무 8240부대     © 국가기록원

2. 첩보활동
 
켈로부대는 고트(Goat: 대장 최규봉), 선(Sun: 대장 전훈), 위스키(Whiskey: 대장 박태현) 등 3개의 지대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각 대별로 통상 2-3백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서지역(초도·영종도·백령도·주문진 등)에는 파견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구성원들은 각 지대대장이 직접 모집하였고 첩보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1951년 9월 제8240부대를 창설하여 첩보부대 및 유격부대를 통합 운영하게 되는데, 베이스캠프는 용산 선린상고에, 본부는 종로 태화관에 설치했다. 부대명을 특수공작대로 바꾸고 육군대령 계인주가 지휘를 맡고, 공작과장은 최규봉 씨가, 군수 및 보급과장은 전훈 씨가, 총무 및 인사과장은 박태현 씨가 맡았다.
 
그러나 미군 정보장교단 39명 몰살사건을 계기로 1952년 6월 8240부대에서 벗어나 각 파견대가 독자적인 부대로 활동하다가,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1953년 9월 전격 해체 되었다.
 
그 후 이들 중 군에 계속 남기를 원한 인원들은 한국군 소속으로 변경된 8240부대 산하로 있다가 1954년에 8240부대가 해체되자 일부는 육군 부대들로 갔고, 또 다른 일부는 HID에 소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육군 부대들로 간 켈로부대원들 중 일부가 1957년에 육군본부 특전감실이 주도한 육군 특수부대 창설준비 요원이 되었고 이듬해 일본 오키나와의 미 육군 특전부대 제1특전단에서 교육받고 온 뒤에 이들을 창설요원으로 하여 제1공수특전단을 창설하게 된다.
 
휴전 이후 북에 침투했던 KLO부대원들은 대부분 담당부대에서 통신망을 끊어버려 휴전협정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 정부 양국에서 버림받았다. 첩보부대에선 이런 일들을 용도폐기되었다고 표현한다. 육군 첩보부대에 흡수된 상당수는 북에 남겨진 동료들을 구해오려는 비공식 활동을 휴전 이후에도 수년간 계속했다. 휴전협정 체결 전 북한 해안가의 대부분의 섬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들은 휴전과 더불어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었다며 한탄했다.
 
부대원 중 여성첩보원도 있었는데, 남녀 대원의 성비가 약 8대 2 정도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주로 북한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적지에서 의심을 덜 받기 때문에 생존율도 남성대원들보다 높았다.
 
여성첩보원들은 남성대원과 함께 부부로 가장해 침투하기도 하였다. 켈로부대는 한국군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고 비밀로 붙여졌는데,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독자적으로 재판, 처형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해산 때까지 공식적인 첩보대로 활동하게 된다.
 
▲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팔미도 주변에서 활약한 KLO 부대원들. 미 해군대위 유진 클라크(맨 오른쪽), 대한민국 육군대령 계인주(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연정 해군소령(가운데, 허리에 권총)     © 나무위키

6.25 전쟁 중에 활발한 활동으로 여러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전과가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 도 등대 점령작전(관련 자료 - 해군지 2012년 09월호 12페이지)이었다. 계인주 대령(HID 창설에 참가), 연정, 최규봉 등 3인이 1950년 9월 14일 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인천 앞 바다 팔미도 등대를 점령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동안 이 켈로부대 출신들은 국가의 배려를 받지 못하다가 『참전군인 등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지난 1996년에 들어서야 2천410명의 켈로출신 전사자들이 대전 국립묘지에 봉안되었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생존자 230여 명의 군번없는 전사들이 군번과 참전용사증을 받게 되었다.
 
명단이 확인된 대원 중 전사·실종자 총수가 3,415명이고 생존대원 총 수는 3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 켈로출신 생존자들이 KLO·8240전우총연합회(대표 최규봉)라는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동안 총연합회는 회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장학금지원, 팔미도 등대에 기념비 건립, 팔미도 점령기념행사 등의 활동을 해왔다.
 
▲ 25세 당시의 이연길 씨. 가슴의 휘장은 KLO를 상징하는 표식. 이연길 씨가 아이디어를 내서 동경의 극동군 사령부가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 계지묵

3. 제8240부대
 
제8240부대에는 KLO부대 산하 특수공작대, 선린상고의 공작대, 서울여상의 공작대가 있었고, 이 외에도 KLO 직할 부대는 아니지만 귀순자로 구성된 공작팀이 따로 있었는데, 소위 동키 부대로 불리는 50여 개의 유격부대다. 동키뿐만아니라 북한 지역에서 1.4후퇴 당시 서해상의 각 섬으로 피난온 반공 무장대원들을 조직해서 편성한 유격부대로 레오파드, 울프팩, 커크랜드도 있다.
 
이 부대들은 KLO와는 별도의 부대인 연합정찰사령부 산하의 제8240유격첩보부대로 통합되어 운용되었는데, 현재는 제8240부대와 KLO를 통합하여 켈로부대라 부르고 있다. 보급은 미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각 섬에 파견된 미군 고문관의 통제를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부대를 한국군으로 이관하는데, 1953년 8월 12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19호로 창설된 국방부 8250부대사령부가 8240부대의 인사, 행정, 포상 및 징계권을 이양받았다.
 
그러나 휴전협정 체결로 유격부대가 사실상 필요없어지자, 1954년 2월 8240부대를 공식 해체하고 육군으로 편입시켰다. 8240부대원들은 유격대 시절보다 한계급 아래 계급[3]으로 육군에 편입되었고, 18세 미만 30세 이상의 대원들은 제대할 수 있었다.
 
유격대 지휘관 가운데 753명이 장교로 현지 임관하고, 대원 약 12,000명이 하사관·병사로 현지 입대했다고 한다. 당시 부대원들 중 일부는 미군에서 지원해 준 독일군복, 특히 슈츠슈타펠의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기도 했다.
 
이후 육군에선 정식 특수부대를 창설하기로 하고 육군본부 특전감실에서 그때까지 육군에 남아 있던 8240부대 출신 장교 20여 명과 8240부대 출신 하사관들을 창설요원으로 차출하여 제1전투단을 창설한다.
 
초대 지휘관 백문오 대령이었다. 제1전투단 창설요원들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육군 제1특전단(그린베레) 교육대에서 공수교육과 특수전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1959년 10월 1일 부대명을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한다. 이 부대가 이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이 된다. 결국 켈로부대원 중 일부가 남아 특전사의 핵심 창설요원이 된 것이다.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인천 용유도에서 찍은 켈로부대원 단체사진     © 납북자가족모임

4. 기타
 
이외에도 미 국무성 산하의 SOU(Special Operation Unit)라는 첩보부대가 있었는데, SOU도 켈로와 유사한 임무를 띤 부대였지만 창설시기가 1952년 4월로 비교적 늦은 편이다.
 
SOU는 대원들을 뽑아 사이판 미군기지에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의 증언속에서도 미군이 지휘한 첩보부대로 잭, 닉, 월백, 동키부대, 켈로(KLO)부대 등이 언급된다.
 
1966년에는 액션영화로도 각색되었다. 군번없는 용사들로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않는 경우가 허다해서, 연구가 어렵다고 한다. 그야말로 베일에 싸여 있는 부대이다.〠

▲ 초도 코드대 통신사 3인. 1951년 5월 KLO 고트 대장 재직시 초도에서. 좌로부터 방우하, 박창련, 이지영. 방우하는 양호단 출신의 KLO 고트대원이었다. 이지영은 51년 6월까지 KLO 고트 대장으로 활약하다가 미5공군 산하에 6004부대를 창설했다.     © 계지묵

유격전, 요인 납치, 교량 폭파, 항공기 공격 유도 작전 등

고교 3년때 켈로부대 징집

계지묵

나는 평북이 고향으로 1.4 후퇴 때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 신분이었다. 청천강 다리가 끊겨서 육로로는 나올 수가 없어서 정주군에 속한 애도라는 섬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켈로부대에 징집이 되었다.
 
김명근으로 기억하는 사람과 함께 여의도에서 제7기 낙하산 훈련을 받았으나, 나이가 어려 후방으로 침투하는 대신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황해도 송화 근처의 초도에서 적군의 통화 도청이나 적 시설 폭파, 혹은 인질 구출 작전 등 게릴라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 KLO 통신사 근무 시절, 초도 소사리에서 계지묵 대원.(1951년 12월)     © 계지묵

초도는 그 위치상 북한 쪽에 속해 있으며 당시 대부분 도서는 동해든 서해든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곳에서 강을 건너면 바로 적 후방지역이 되므로 필요시 적진으로 들어가 작전을 수행하고 철수하곤했다.
 
나는 수십 차례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그중 미 5공군 조종사 구출 작전과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인 조종사의 생사 확인차 적지에 투입된 일, 그리고 평남 안주의 비밀무기고를 폭파했던 작전이 기억에 남아 있으며 그중 몇 가지를 기술해 본다.
 
▲ 인천상륙작전 직전 팔미도에 침투해 등대의 불을 밝힌 최규봉 씨와 켈로부대 대원들이 작전 성공 후 기함 마운트 매킨리로 복귀하고 있다. 모자를 쓰고 일어서서 옆을 보고 있는 이가 최규봉 대장.     © 나무위키

- 1951년 3월 평남 안주의 비밀 무기창고인 수로 터널에 항공폭격 (1주간 폭격) 유도 및 정보 수집 작전을 하고 이 적전에서 한명재, 정명찬, 김만옥, 김윤기 대원이 전사하였고 나는 복부에 수류탄 파편을 맞고 영국 함에 수송되어 수술 후 1주일간 치료받고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 1951년 4월 평북 선천의 신미도 옆 참채도를 수색하던 중 미군 조종사를 구출한 적이 있는데 그 섬은 무인도로서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한 후 3개월간 굴과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큰 백인으로 당시 수염이 온 얼굴을 덮고 굶주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썩은 쌀을 어디서 구했는지 놋 요강에 밥을 해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를 구출해서 본대 함정으로 인계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 1952년 4월 4일 별동대원인 본인을 비롯한 정이섭, 조창암, 장범수 등 4인은 B26 폭격기(군산비행장 발진) 조종사로 미8군 사령관 밴플르트 2세 구출 및 생사 확인차 구월산 지역으로 침투하였으나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 베트남 사이공 GSO 전기부 근무(1970). 오른쪽 서 있는 사람이 계지묵 씨.     © 계지묵

- 1952년 5월 황해도 구월산에 침투하여 인민군 및 중공군 이동사항에 관한 첩보 수집 작전으로 HID대장인 김종벽 대위가 이끄는 연풍 부대와 구월산 여장군 김정숙 여사의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하여 유격전, 요인 납치, 교량 폭파, 항공기 공격 유도 등 종합 정보부대 (육해공, KLO) 합동 작전을 정보처 작전지시로 수행하였다.
 
당시 인민군 후방 보급 지원부대 대좌(대령급)를 납치하여 HID 심의관인 김인수 씨에게 인계하여 포로수용소로 후송하도록 하였다.
 
- 1953년 6월 평북 철산 대화도 앞바다 근방 지역 섬 해안에서 미그기 조종사(문덕삼)를 납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수은도 북방 돌 바위섬 무인도에 해왕 호를 숨기고 작은 배로 야간에 북한 경비정 샛별 호와 아리랑 호를 납치하였으나 압록강 앞바다의 간만의 차가 심해서 모래 산에 걸리게 되므로 샛별 호와 아리랑 호 기관을 TNT로 폭파하였다.
 
- 압록강 하류 수은도 북방 신도(비단섬) 황초평 갈밭에 침입하여 미그기 기체를 발견하였으나 동체 분리를 할 수 없는 관계로 회수를 못하고 전원 철수하였다. 별동대원은 선장 황신관, 기관장 김규정, 정이섭, 장범수, 조장암, 김통역관(중국어)와 본인은 통신사로 참여하였으며 직접 지휘는 KLO 부대의 GOAT대 이연길 대장이 하였다. 
 
▲ KLO 8240부대 이연길 첩보 대장과 52년 만에 호주 시드니에서 만난 계지묵 씨. (1997년)     © 계지묵

재차 미그기를 유인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중공군 경비정에 발각되어 교전 중에 이연길 대장의 친형인 이지령 씨가 중공군의 총탄세례를 받고 전사하였다.
 
나는 1953년 7월 27일 휴전과 동시에 초도로부터 백령도로 철수하여 옹진반도에 접한 연백해안 (무인도 웅점, 함박도)에서 HID 18지구 통신사로 근무하여 (SCR188 무전기 담당) 당시 HID에서 받은 학도 군번은 SO-000030이었으며, 계급은 일등상사, 호출번호는 30번으로 56년 8월까지 근무하였으나 현역이 아니라는 답변과 함께 귀향증이 발급되었다. 
 
▲ 6.25 58주년을 맞아 (사)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호주지회 임원들이 마틴 플레이스 호주군 전사자 추모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조선국방경비대 출신 강영식 회장, 켈로부대 출신 계지묵 부회장, 학도병 출신 이은종 봉사부장(2008. 5. 촬영)     © 크리스찬리뷰

본인이 이북 출신으로 이남에 가족이나 연고가 없는 관계로 HID 주선으로 훈련소에 입소 RROC반, CW조교로 선정되어 통신학교에서 후배교육을 한 후에 502 장거리 통신단에 근무하였으며 육군본부 파견 근무를 거쳐 59년 7월 9일 502특을-60호에 의거 만기제대로 현역복무를 마쳤다.
 
▲ 베트남 미총영사관 근무시 신분증(1972)     © 계지묵

1968년 파월기술자로 주월남 경제협조처 USAID/GSO에 근무하고 미 제3총영사관과 제1 총영사관에 근무 중에 75년 4월 월남 패망으로 인하여 호주에 이민하게 되었고 현재 시드니에 정착하여 거주하고 있다.〠 

계지묵|(사)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호주지회 전 부회장 前 副會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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