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한 참전용사 초청 67주년 6.25 기념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베소서 2:11-22>

이반로버츠/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07/25 [12:24]
▲ 시드니제일교회가 개최한 호한 참전용사 초청 6.25 67주년 기념예배에서 설교하는 이반 로보츠 목사     © 크리스찬리뷰


본 글은 지난 6월 25일 시드니제일교회에서 열린 호·한 참전용사 초청 67주년 6.25 기념예배에서 이반 로버츠 목사(Rev. Ivan Roberts)가 전한 설교 전문이다. <편집자주>
 
새로운 희망의 조짐

 
한국전쟁 기념일에 설교하도록 초청받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제가 알기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일 뿐 아니라 호주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다.
 
특히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해 싸우신 분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한국과 호주과의 관계는 호주 선교사가 처음 한국으로 갔던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80여 명의 선교사들이 1950년까지 한국에서 사역했습니다.
 
그들 중 한 분이 벨리 멘지스였는데, 이분은 1950년에 호주 군대를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던 호주 수상 로버트 멘지스의 숙모였습니다. 멘지스 수상은 이러한 선교사 교류와 두 나라 간의 관계를 알고 파병을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선교사들은 반대 방향으로 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호주로 들어오고 있으며, 호주의 교회의 삶과 사역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으며 우리들 간의 관계를 더욱 굳세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두 나라 간의 연합은 전쟁에서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확인되고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호주의 군인들이 부산의 UN 묘지에 잠들어 있으며, 한국인들이 그들을 잘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호주인들은 한국인들과 함께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복구하는 사업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올해의 기념일은 북한이 저지른 미사일 실험에 의해 초래된 불안과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한국전쟁기념일은 전쟁이 초래하는 커다란 고통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현재 이 문제로 인해 나뉘어진 사람들 간에 평화적인 해결과 화합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실험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모여서 새로운 희망의 조짐을 볼 수 있는 것은 새로 당선된 문 대통령이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와 소통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 대통령은 북한 피난민의 아들로서 치유와 화해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남한에서 북한을 거쳐 중국 국경까지 철도를 재개통하는 계획이라든지, 2018년 동계올림픽에서 몇 종목은 북한에서 주최하도록 하는 제안 등은 남한 사람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진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며,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여 치유와 화해를 이루려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담과 장벽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담이나 장벽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오면서 가장 인상깊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들과 공동체를 분리시키는 매우 커다란 콘크리트 벽입니다.
 
·냉전시대 때 지어졌던 베를린 장벽이 있습니다. 그것은 1989년까지 존재했는데, 같은 인종에 같은 문화와 유산을 공유하던 독일인을 마음까지 찢어 놓아 지금까지 대립된 사상과 세계관으로 분리시켜 놓고 있습니다.
 
·1947년에 인도를 분리하기 위해 영국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장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다른 국가로 분리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을 남쪽과 북쪽으로 가르는 장벽이나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호주와 한국 사람들의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 의해서 만들어진 콩크리트 벽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땅을 들쭉날쭉 생채기를 내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분리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 땅에서 감옥살이를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는 이런 담들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임의의 선이 그어져, 같은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한 민족을 나누었고, 지금은 북한과 남한이라는 라벨을 붙여 구별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지를 토막내는 담이나 38선을 따라 지도상에 그어진 비극적인 선에 대해 고민하며 이런 딜레마에 빠져 애쓰고 있을 때, 나는 저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 사물이나 사람에 맞닥뜨릴 때 나눔과 분리를 향해 우리를 몰고가는 인간 심리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장벽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담은 인간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담은 우리의 창조물입니다. 2300년 전에 만들어지고, 장장 21,000km에 이르는 중국의 만리장성이 우주에서 관측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것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우주에서 관측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사람을 몰아내고 분리시키기 위해 건설된 담이라는 것이 저를 슬프게 만듭니다.
 

▲ 67주년 6.25기념예배에서 양국 국가를 부르는 참전용사들.     © 크리스찬리뷰


복음의 약속
 
오늘의 성경본문인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담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성경 기자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화평이요,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사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분리시키는 담이나 장벽을 허무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에베소 기자는 우리에게 희망의 사람, 화해의 대리자가 되기를 권면합니다. 그런 사람은 곧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진리임을 알지만 또한 동시에 신뢰하고 희망적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전쟁과 분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에 무엇을 변화시키는 것에 무력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구의 대항으로 냉전 중에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던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얼마 후 호주 연합교회의 목사이며 후에 NCCA의 사무총장을 지냈던 데이비드 길(David Gill) 목사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장벽은 너무나 견고하고 도전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거대한 군사력에 뒷받침되어 수 세기 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89년 11월 9일 엄청난 사람들의 힘에 의해 총 한 방 쏘지 않고 그 벽과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들은 역사 속으로 허물어져 버렸다.”
 
그 날을 기억하면서 독일의 지역교회 지도자는 1989년 11월 역사적인 날에 장벽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군대 지휘관의 말을 전했다. 군 지휘관이 말하기를 “우리는 어떤 일에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촛불에는 준비되지 못했지요. 갑자기 전쟁을 치루는 것 대신 길거리에서는 즐거운 축제가 열렸습니다. ‘비폭력’- 평화로운 혁명의 표어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낯선 약간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돌을 던지는 것도 총을 쏘는 것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에 나타난 복음의 약속은 그 진리를 품은 사람들 안에 삶과 희망을 키워주고 북돋아 주고 유지시키는 일을 2000년 이상 계속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이상 복음은 사람과 공동체를 분리시키는 담을 뛰어 넘어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상처를 치유하고, 절망이 자리잡았던 곳에 희망과 평화를 제공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뿌리칠 수 없는 실제입니다. 그것은 그 메시지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가치에 순응하기를 뿌리치기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치유와 변화를 위한 불가항력적인 주체입니다. 복음은 진리를 우직하게 붙잡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진리는 용서와 은혜, 긍휼과 정의, 치유와 화해가 우리의 삶과 관계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담대히 신뢰하자
 
참으로 우리의 부르심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관계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이나 낙담 가운데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간결합니다. 믿음과 소망 가운데 살며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노인과 전갈 이야기)
 
힌두교 전승 가운데 어떤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노인이 갠지스 강 둑에서 기도방석을 깔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 한 전갈이 강물에 쓸려 내려오다 강둑의 나무 뿌리에 얽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벌레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뿌리에 더 얽혀 매게 되고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반사적으로 이 노인은 손을 뻗쳐 뿌리가 얽힌 것을 풀어서 전갈이 물에 빠져 죽지않도록 구해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전갈에 가까이 갈 때마다 전갈은 꼬리를 휘둘러 그를 쏘았습니다. 계속해서 노인은 전갈을 구해주려 했고 계속해서 가엾은 벌레는 물었습니다. 그의 손은 멍이 들고 피가 나고 부었으며,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습니다.
 
바로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와서 외쳤습니다. “이보시오, 어리석은 노인장, 왜 그렇게 쓸모없는 벌레를 구해주려고 애를 쓰시오? 그게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그 노인은 돌아서 그 사람의 눈을 올려다 보며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전갈에게 쏘는 본능이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해주려는 나의 본능을 포기해야 하겠소?”


▲ 기념예배 후 교육관에서 가진 환영행사에서 참전용사들과 성도들이 교제하며 애찬을 나누었다.     © 크리스찬리뷰


희망적인 미래를 향해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한국의 미래를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옵션이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양보하고 북한의 미사일 실험이 세상의 방법임을 받아들이고 국방을 키워 나가는데 더 많은 돈을 사용하는 상황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 간에 다리를 놓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새로 선출된 문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를 재건하기 위해 대화와 소통을 재시도하는 움직임을 통해 얼마간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은 실망 가운데 포기하고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고 추정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고 평화적인 화해가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 가지만, 한편으로는 국방과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해가야 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과 불신으로 대응하기보다는 평화와 화해를 선택하는 희망적 사람이 되겠다는 우리의 동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갈에게 쏘는 본능이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해 주려는 우리의 본능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아니, 어떤 사람들이 분리시키는 장벽을 세우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때문에 소통의 다리를 건설하고 평화적인 화해를 위해 일하고자는 우리의 바람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고 희망적인 사람이 되며, 이 세상과 사람들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복음의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람이 됩시다. 억누르고 분리시키는 담을 무너뜨려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합시다. 아멘. 〠

이반 로버츠|호주연합교회 목사로서 원주민교회 원주민과 토레스 섬 주민을 섬기고 있는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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