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다문화주의의 한계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10/23 [12:14]
들어가며

1. 백호주의와 샐러드 정책

남태평양 망망대해/눈 시리도록 짙푸른 파도 밀려드는 /애버리지니즈의 땅/영국의 유형 식민지/오스트레일리아 /한 때는 유색인종을 배척하고 경계하여/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용광로 정책’을 밀고 나가기도 했지만/지금은 소수민족도 끌어 안아/‘샐러드 정책’을 구사하며/ 한 그릇 속에 비빔밥처럼/동서양 유색. 무색이 뒤섞여 사는 땅이 되었다/초기의 백호주의와 용광로 정책은/이미 열기가 식어 버렸다/울타리는 허물어지고/민족주의도 빛이 바래어 버렸다/역시 세계화 시대/샐러드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는/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보다.  (강통원)



강통원 시인의 노래대로 호주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정책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뿐 아니라 호주는  미국과 캐나다와 더불어 대표적인 이민국가로 자리 매김하였다.
 
지난 반 세기에 걸쳐 호주는 끊임없이 다문화주의를 발전시켜 왔고 호주인 1/4은 해외에서 출생했으며 2백 개 나라로부터 이주해 온 말 그대로 다문화국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지난 44년간 호주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약간씩의 변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발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이민자들을 포용하였다. 
 
그러나 지난 2017년 4월 18일 말콤 턴불 총리가 발표한 해외 임시기술 이민비자(457비자) 폐지는 많은 이민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턴불 총리는 “호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다문화 국가이고, 우리는 이민자의 나라”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호주의 직장들은 호주인 근로자에게 우선 순위가 가야하고 외국인 근로자들이 호주에서 임시로 일할 수 있도록 한 ‘457비자’는 폐지될 것” 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민권 절차’도 한층 강화시켰다(2017년 4월 20일 발표). 기존의 영주권 취득 후 1년 이 상  거주하면 신청할 수 있었던 자격을 4년 이상 거주해야 신청할 수 있도록  강화시켰고, 영어 시험을 대폭 강화시킴으로 사실상 많은 이민자들이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1901년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으로 유색인들의 이민을 거부하기 위해 공식화된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로 다시 회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우까지 들게 한다.
 
이처럼 지금 호주내에서는 새로 바뀐 이민법이 많은 소수 민족(Ethnic) 공동체에서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이외에도 2005년 시드니 근교 크로놀라 비치에서 일어난 인종 폭력 분쟁,  2009년 멜번에서 발생한 인도 유학생들 폭행사건, 2012년 브리즈번에서 발생한 한국인 유학생 폭행사건, 그리고 최근 정치인 폴린 핸슨의 정치적 막말 발언  등은 호주의 다문화 주의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들게 하고 있다.
 
사실 필자는 호주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보편적 인간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호주 정부의 정치적 이해 관계와, 경제, 외교적 실리, 호주의 안보와 관련된 실질적 국익 차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갈등과 문제들은 이미 태동 때부터 내재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본 소고에서는 호주 다문화주의의 허상, 즉 호주 다문화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호주의 이민 역사, 특히 백호주의와 호주정부의 이해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호주 안의 소수민족인 한인사회가 경험한 다문화주의의 한계와 호주 다문화주의 안에 뿌리내려 있는 인종 간 위계 구조에 대해서도 살펴 볼 것이다. 
 
사실 호주 다문화주의의 한계는 ‘인종차별’에 기인하고 있다. 백호주의의 그림자와 인종차별의 갈등은 아직 호주 사회 안에 잔존해 있고 사회구조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있다. 사실 이것은 호주 정착 초기부터 함께한 ‘기독교’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담론인 다른 타자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 인가”에 대한 코즈모폴리터니즘적 성찰과 반성은 인종 간의 위계적인 인종구조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진정한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국내 연구자에 의해, 호주 다문화 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있지만, 호주 다문화사회와 기독교적 담론에 대한 연구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체류 외국인이 200만을 넘어섰고, 70만 명이 넘는 해외 이주 노동자가 이미 한국 노동시장에 돌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농어촌 지역은 전체 결혼의 35.9%가 외국인 아내와의 국제결혼이라는 현실 속에서(임재우 2009: 417), 한국사회의  다문화정책과 기독교의 책임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인간의 한계는 인간의 문화와 삶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인류가 가지 고 있는 ‘보편적 인류애’와 기독교적 담론인 인종과 종교와 배경이 다른 타자와 ‘함께 살아간다;(co-existence)는 코즈모폴리턴적 인식이 인간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때이다.
 
2. 호주 ‘백호주의’의 태동과 폐지
 
호주는 1788년 영국의 식민지이자 죄수들의 유형지로서 최초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끈 11척의 배에 778명의 죄수와 일부 선원 그리고 군인을 실은 함대가 시드니항에 도착함으로 호주 식민지 이민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788년 호주의 공식 인구는 859 명이고 당시의 호주 원주민 인구는 제외된 통계였다. 그 후 1788년부터 1867년까지 영국에서 무려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호주로 유배되어 왔다. 이처럼 처음에는 호주는 죄수의 유배지로 시작하였다.
 
뉴 사우스 웨일즈 식민 정부는 죄수 중심의 인구 비율을 극복하고자 자유 이민을 장려하였고 1820년 이후부터 자유이민 숫자가 증가하였다.
 
죄수와는 별도로 1830년대 이후 호주 각 식민지 지역에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자유 이민자들이 더 나은 삶의 희망을 품고 호주로 이민 오기 시작했고(Mills, 1974: 4-5), 영국뿐 아니라 미미하기는 했지만 세계 각지역에서 자유 정착민들도 호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의 호주의 이민 역사는 철저히 영국계 중심이었다.
 
그런데 호주 이민 역사의 큰 변화 중의 하나가 바로 호주 뉴사우스웨일즈주와 빅토리아주에서 금광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러한  골드러쉬(Gold Rush)의 여파로 호주로의 이민이 증가하여 1850년에는 호주의 인구가 40여만 명에 불과하던 것이 10년 사이인 1860년에는 무려 115만 명으로 늘어났고 급기야 1880년에는 223만 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때 특이할만한 사실은 골드러쉬의 열풍으로 인해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호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골드러쉬가 시작된 1851년부터 20여 년 동안 약 5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호주로 이주해 왔다. 빅토리아 금광지역에 들어온 중국인 숫자가 1854년에는 약 4천 명 가량이었는데 1859년에는 무려 4만 2천 명까지 증가하였다(Willard, 1967: 28).
 
뉴 사우스 웨일즈 지역도 급작스럽게 중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856년에는 불과 896명에 불과했는데 1858년에는 10배가 넘는 1만 2,096명이나 유입되었다.  그러면서 백인 노동자들과 임금경쟁 등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폭동사태로까지 번지기도 하였다(윗글: 24-36).
 
급기야 식민지의 금을 중국으로 가져 간다는 편견이 확산되면서(윗글: 18), 중국인 노동자들은 호주의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호주 백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의 입국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유색인종을 배격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어, 실제로 빅토리아주 입법부는 1855년 중국인의 호주 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중국인을 싣고오는 선주들에게 중국인 한 사람당 10파운드의 인두세를 부과하는 법(the Chinese Restriction Act)을 제정했다(윗글: 21; Clake, 2002: 66-67). 그리고 곧 이어 다른 식민지 주에서도 이러한 법을 따라서 제정했다.
 
그 후 중국인의 호주 유입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Willard: 33). 미라 윌라드는 사실 ‘백호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라고 주장한다 (윗글: 17). 공식적으로 ‘백호주의’를 선언한 것은 1901년 ‘이민 제한법’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사실 ‘백호주의’ 정책은 미라 윌라드의 지적대로 19세기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호주의 초기 이민 역사가 보여 주듯이, 호주는 영국계 백인 중심의 국가 건설을 표방했고 골드러쉬로 들어온 수 많은 이민 노동자들 가운데 특별히, 중국인을 비롯한 태평양 도서 출신 노동자들에 대해 반인권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영국계 백인 호주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인식되었던 ‘외국인’은 중국인들이었다. 
 
1901년 조사한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당시 영국계 백인은 전체 인구 중 무려 98%에 달했고 독일계 백인이 약 1%, 중국계 아시아인이 약 0.8%를 차지하고 있었다(Bennett, 1998: 149). 이상을 통해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호주는 영국계 화이트 앵글로 색슨으로 이루어진 단일 인종 사회였고, 리차드 화이트가 지적하듯이 호주는 “영국보다 더 영국적인 사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White,1981: 112).
 
호주는 190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연방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연방정부를 세울 때 당시 호주 정치 권의 자체적 결론은 “평등사회와 노동자의 천국 건설은 백인들만의 사회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주 양중,2011: 52). 그리고 연방정부를 세우자마자 ‘이민제한법’을 실시하므로 유색인종 이민자를 규제하고 ‘백호주의’를 공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계 백인의 이민은 계속적으로 장려하였다. 그 일환으로 1922년 ‘제국 정착법’(Empire Settlement Act 1922)을 제정하여 영국정부와 공동으로 영국계 백인의 호주 이민자에게 이주비와 정착비, 생활비, 직업훈련, 고용, 농장불하 등을 통하여 호주 이민을 지원하였 다(Klapdor et al, 2009: 4).
 
이러한 노력으로 1920년대에 약 30만 명의 백인 이민자들이 유럽에서 호주로 이주하여 왔는데 그중 2/3가 영국계 백인 이민자였다. 하지만 1930년 경제 대공황과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호주의 이민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오히려 호주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인구감소로 인한 경제문제와 국방에 대한 위기 의식 속에서 1945년 초대 이민성 장관이었던 아서 캘월이 ‘인구 증가인가? 아니면 멸망인가?’(Populate or Perish?)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호주 정부가 유럽에서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은 언제나 영국계 백인중심의 백인사회와 백인문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동화정책’(Assimilation Policy)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동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유색인종들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차별적이고 선별적인 이민정책을  여전히 시행하였다(김범수, 2012: 232).
 
그리고 이러한 백호주의는 1950년대 말까지 철옹성같이 호주를 화이트 앵글로 단일 인종의 국가로 존속시키게 함으로 호주의 외교적 고립은 심화되었고 국제적 비난에도 봉착하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국제 여론뿐만 아니라 호주 국내에 있던 소수의 이민자 단체와 교회, 학생들, 그리고 인식 있는 젊은 중산층 그룹들(교육가, 일부 정치인, 로비스트) 사이에서 호주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국제 시민권 운동으로 성장하게 되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제도권 밖에서 인식 있는 젊은 중산층 그룹들과  인권운동가들이 연대하여 ‘백호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캠페인을 한 것들이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호주 사회의 인종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사회 저변 의식들을 바꾸어 나가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Tavan, 2001: 184).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백호주의의 기치가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1958년 그렇게 악명 높았던 이민 제한법의 구술시험이 폐지됨으로 백호주의의 몰락을 조금씩 예고했다. 그리고 1966년에 호주의 발전에 유익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과 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유색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이민문호를 개 방한다는 이민정책(Immigartion Policy,1966)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영주권자가 시민권자가 되기 위한 시민권 부여기간도 15년에서 5년으로 대폭 수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아시아인들의 호주로의 이민은 여전히 높은 문턱에 가리워져 아시아인의 호주 이민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의 참여와 제한된 이민으로 인해 넓은 땅에서 점차 감소되어 가는 인구문제, 이로 인한 국방력의 약화에 대한 여론의 확산, 사회의 하부구조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동력의 절실한 필요, 국제여론의 악화로 인해 백호주의는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국제사회에서 살아 남을 수 없음을 깨닫고 1973년 새로 들어선 고프 휘틀럼 노동당 정부의 이민 장관이었던 앨 그라스비가 ‘미래를 위한 다문화사회’(Multi-Cultural Society for the Future)라는 보고서를 공포함으로써 백호주의가 더 이상 호주의 사회적 통념과 국가적 이상으로써 설 수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호주의 백호주의 포기는 인간 존중에 대한 인류애적 접근보다는 호주사회가 당면한 실질적인 이유가 더 컸다.  그 주된 이유로 간주되는 것 중의 하나는 국제사회의 비난이었다.
 
과거 백인의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의 식민지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독립하여 대거 UN에 가입하게 됨으로 호주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을 비난했고 이로 인해 호주의 이미지는 국제사회에서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호주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아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무역 및 교류가 점차 늘어났고, 이들 아시아  국가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이들과 계속 원할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호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외교와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최종렬, 2008: 92).
 
이외에도 인구 감소를 막고 국가 경제 개발에는 이민자들의 노동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경제적 이유가 중요했다. 뿐만 아니라 인구증가가 국방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또한 아 시아 이민문호 개방의 도화선이 되었다.
 
1972년, 12월 총선의 승리로 노동당의 고프 휘틀럼은 23년간의 보수 성향의 자유당 정권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호주 역대 최고의 진보 정당이라 할 수 있는 노동당의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대학 등록금을 폐지했고 국민의료 시스템인 메디케어를 시행한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적 지원’을 설립했고, UN에서 인준된 ‘인종차별법’을 받아들이고 원주민에 대한 토지권리법을 통과시켰다.
 
3. 호주 다문화주의 채택과 다문화 주의에 대한 비판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호주 역사에 길이 남긴 업적은 바로 앨 그래스비 이민장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인종차별 정책의 종식’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재의 호주 사회의 다문화주의의 초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고프 휘틀럼 노동당 정권은 백호주의를 붕괴시키는 기반을 구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1973년 고프 휘틀럼 정권 때 백호주의가 완전 폐지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휘틀럼 정권 하에서 차별적 이민조항은 철폐되었지만, 이것이 아시아 이민자들을 향한 완전한 문호개방으로 이루어지 않았다는 점에서 백호주의 완전한 철폐는 1975년 말콤 프레이저 정부 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시기에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면서 보트 피플들이 호주에 대거 유입되었으며 그들에게 대 사면령을 통해 호주 영주권을 부여한 점은 아시아 이민자들에게는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사실 말콤 프레이저 정부가 시행한 대 사면령은 호주에 정착했던 재호 한인 1세대들에게도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 이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주로 들어 왔던 많은 수의 한인 참전용사들과 기술자들은 그 당시 사면령을 통해 호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호주 한인 동포 사회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호주 한인 50년사 편찬위원회,  2008:  59-65).
 
그러나 백호주의가 철폐되고 다문화주의 정책이 표방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호주 다문화주의 개념은 사실상 “백인 주류 사회와 문화로의 흡수 및 통합”이라는 관념이 더 강했다. 그러므로 이민문호가 더 개방된 1980년대까지도 호주인들의 대다수는 이민자들이 “호주 사회로 흡수 통합”되는 것을 기대했다.
 
이러한 생각이 반영하듯이 호주의 이민법과 이민자들에 대한 권리는 주류 호주 백인사회의 자국의 경제, 외교적 실리와 정치인들의 정치 당략으로 이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민법 변화의 역사를 깊숙히 들여다 보면 정권이 바뀌게 될 때마다 호주의 이민법과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슈가 정치인들의 정치적 목적과 정당의 당리 당략을 따라 움직이고 있고, 심지어 이민법을 이용하여 유권자들을 조정하려고 하는 움직임들도 볼 수 있다.
 
실례로 1970년대 초에 대거 이민온 그리스, 이탈리아인들 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자 노동당 지지성향이 강한 이들의 유권자 표를 의식한 보수 자유당의 말콤 프레이저 정권은 다문화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 이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이규영/김경미, 2010: 452).
 
뿐만 아니라 1996년 보수 연합당의 존 하워드가 정권을 창출한 것은 노동당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불만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 호 계속>

*이글은 <현상과 인식 41권 3호(통권 132호)>에 실린 글을 허락받아 게재했으며, 각주와 참고서는 부족한 지면 관계상 생략했다. [편집자]



          @ 주경식

 




주경식|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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