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기타 세션’ 함춘호

음악과 아내... 교회는 내게 두 가지 선물을 줬다

글:김명동/사진:권순형 | 입력 : 2018/01/30 [10:01]

한국 최고의 ‘기타 세션’ 함춘호(57).

▲    크리스찬리뷰 2월호/2018 표지  ©크리스찬리뷰

 
▲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 함춘호. © 함춘호    

 ‘슬라이드 바’를 끼운 그의 클래식 기타는 때론 요염하고 때론 앙칼지게 통통 튄다. 멜로디의 흐름에 따라 알콩달콩 흐름을 타는 기타는 그의 삶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세션’이란 정식 멤버가 아니라 공연이나 음반 녹음 시 일시적으로 함께 연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대중에게 크게 알려진 것은 MBC 예능프로그램 ‘놀러와’에서 방영된 ‘세시봉 콘서트’를 통해서였다. 그때 그가 송창식과 함께 선보인 기타 연주는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음악계를 종횡무진하던 그를 주목하게 했다.

▲ '세시봉’ 콘서트에서 송창식과 함께 연주하고 있는 함춘호.     ©함춘호

 
▲ 헤브론병원 개원 10주년 축하 음악회에서 연주하는 함춘호 교수     © 크리스찬리뷰
 
이후 그는 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과 ‘나는 가수다’  KBS ‘불후의 명곡’ SBS ‘유희열의 스케치북’등 방송 3사를 넘나들면서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주었다.
 
사실 그가 대중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 갑작스럽거나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이미 음악계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고’이기 때문.
 
웬만한 음반의 기타 연주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있다. 나훈아, 조용필, 양희은, 전인권, 이문세, 장필순, 김현철, 신승훈, 김건모, 비 등 대한민국 대표 가수들의 앨범에서 그의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젊은 가수들의 음반까지 합하면 셀 수 없이 많은 음반 녹음에 참여해 왔다. 그가 외국에 나가 있으면 음반 제작이 차질을 빚는다는 말까지 돌았었다. 그는 현재까지도 대중가수들이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기타 세션 뮤지션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후학 양성(서울신학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뿐 아니라 음악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한국연주자협의회와 기독음악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를 경기 부천 소재의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실에서 만났다.
 
▲ 헤브론병원 개원 10주년 축하 음악회에서 인사하고 있는 함춘호 교수     ©크리스찬리뷰
 
인재 양성에 열정 쏟는 ‘기타의 신’
 
기타가 놓여있고 각종 음반이 빼꼭히 꽂혀있어 비좁게 느껴지는 교수실. 그와 두 번째 만남이다. 처음 그를 만난 건 캄보디아 헤브론병원 10주년 축하음악회에서였다. 만남이 거듭된다는 것은 참 반갑고 신기한 일이다. 그는 헤브론병원 축하음악회 이야기부터 꺼냈다.
 
“야, 호주에서 오신 성악가 그분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테너 김재우 집사님 말씀하시는군요. 그럼요, 세계적인 오페라가수지요. 함 교수님의 기타 연주도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입을 조그만 벌리고 웃었다. 새하얀 피부에 날렵한 외모, 차분한 음성에서 어떻게 그런 강렬한 연주가 나오는지 의아할 정도로 이지적인 이미지가 풍겼다. 동작 하나하나가 기타의 선율처럼 리듬감이 있고 섬세했다.
 
서울신대로 오게 된 데는 학교측의 삼고초려한 간청도 한몫했지만 어린 시절 성결교단과 깊은 인연의 영향이 컸다. 그는 “몇 군데서 제의도 있었고 일부 강의도 나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학교를 직접 세우고도 싶었다”면서 “하지만 신학교에서 실용음악과를 만든다는데 깜짝 놀랐고 1백 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개혁적인 의지를 보면서 고민 끝에 수락하게 됐다”고 밝혔다.

▲ 기타 리스트 함춘호     © 함춘호

 “사실 별로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제가 첫 신앙생활 시작했던 곳이 성결교회였어요. 그곳에서 집사람 만나서 결혼했고 제 처남이 이 학교 대학교와 대학원을 나와 목회를 하고 있고 결국 어린 시절부터 이 학교와 함께하고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부르신 이유가 뭘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신학대에서 CCM(교회실용음악과)이 아니라 일반실용음악과를 만든다고 해서 오게 되었는데 신학대학에서 실용음악과를 만든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요. 대중음악이니까요.”
 
왜 서울신대 실용음악과인지 그에게는 이유가 있다.
 
“교회 안의 건강한 청소년들이 음악을 하고 싶은데 일반대학 음악과를 지원하면 분명 신앙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교회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건강한 실용음악의 길을 터주기 위해 이 신학대학에 실용음악과를 만든 겁니다. 꿈을 잃지 않고 인생의 목표를 제대로 심어주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철부지 시절 나이트클럽에서 활동을 했었습니다. 음악이 때론 영적으로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좋은 영으로 대중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도록 후학 가르치기에 매진하고 있는 거죠. 이 대학에 실용음악과를 만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교수직을 맡고 3년여 만에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학과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울신대 실용음악과는 전국 실용음악과 교수들의 평가에서 A클래스를 받았다. 실용학과의 입시 경쟁률도 치솟고 있다.
 
“교수님의 이름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방송과 공연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연주자들이 교수로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수진들에게 수업 받는 학생들은 단기간의 수업에도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교수 자신도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죠. 또 그러한 결과가 헛되지 않도록 학교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고요.”
 
그는 음악적 잣대가 아닌 학생 개개인의 색깔과 능력을 인정해 주는 멘토로서도 인기가 높다. 믿지 않는 아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는 작사·작곡가 등 다양한 길을 제시하며 학생들의 현실적인 일자리 마련에 특히 힘써왔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뮤지션으로 발탁될 기회가 왔을 때 제 실력을 발휘하도록 가상 무대를 꾸미는 등 현장경험을 쌓도록 돕는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좌절을 겪었는데 그럴수록 기타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면서 “아이들에게 기타를 통해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무대의 많은 부분을 학생들과 함께한다. 현장 경험을 통해 전문 음악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매년 세계적인 연주자와의 워크숍과 마스터클래스를 통한 학과 특성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아리랑의 한’을 기타로
 
‘아리랑’이 다른 음악과 만난다면?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아리랑’은 어떤 색깔일까? 사람들의 기대는 컸다. 그는 작년 11월 서울 이태원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기타로 아리랑를 연주해 그 속에서 묘한 감동을 선사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관하는 시리즈였다. 전통문화 유산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재현되기를 바라며 기획한 것이다.
 
아리랑은 보편적이지만 그만큼 흔한 것이기도 하다. 쉬운 만큼 단순한 음계를 가지고 있는 아리랑을 가지고 새로운 해석을 하는 건 음악가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 함춘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부담감 때문에 “공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많이 두려웠고 도망가고 싶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바꾼 건 ‘아리랑은 우리의 오래된 대중가요라는 이야기’였다. 40년 가까이 대중음악을 하며 대중과 호흡을 해온 사람으로서 이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말이였다.
 
자신이 풀어내는 아리랑이 지금 시대가 부르는 아리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공연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리랑이 오래도록 우리 대중의 한과 흥을 표현하며 위로와 치유의 역할을 해온 노래, 즉 대중가요라고 생각하니 해도 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함춘호 아리랑 공연이 성사됐다. 그는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을 모티브로 최우준, 임헌일 같은 후배 기타리스트들과 함께 연주했다. 애초 함춘호와 오랜 기간 작업한 송창식도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성대 결절로 인한 수술을 받은 뒤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 불발됐다.
 
가수로 시작한 음악인생
 
함춘호가 처음 친 기타 코드는 G코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삼촌 심부름으로 전파상에서 기타 줄을 사본 것으로 기타를 처음 알았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어느 날 형이 집에 있는 골방에서 기타를 치는 걸 봤죠. 형이 저보다 일 주일 먼저 기타를 배웠는데 형이 저에게 기타를 알려줬죠. 기타소리를 듣는데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게 시작이에요.”
 
그가 음악적 자양분을 빨아들인 곳은 교회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좋아했다. 찬송 부르는 게 좋아 성악을 시작했고 성악가의 길을 가고자 예원학교를 진학했고 노래 반주를 위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때마침 당시 한국교회는 복음성가가 유입되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그는 찬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중학교 1학년이던 저는 YMCA 등 기독단체 집회에 가서 새로운 복음성가를 배웠죠.”
 
일 주일 기타를 먼저 배운 형의 어깨너머로 기타를 배운 그가 유일하게 솜씨를 뽐낼 수 있는 무대가 교회였다. 서울 구파발 농원마당 한가운데 있는 나무 높이정도의 나지막한 교회에서 그는 형과 함께 기타를 치며 찬양을 했다. 그는 “기타치고 노래할 수 있도록 해준 교회는 나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아내를 만난 것도 이 교회에서였다. 말수가 적었던 중학생 함춘호는 서울 구파발성결교회에서 지금의 아내 원유미(55)씨를 처음 만났다.
 
기타 연습에 미쳐 있던 그에게 공부는 뒷전이었다. 예원중학교 성악과에 다니던 그는 당시 학교에 내야할 레슨비로 기타를 샀다. 서대문 악기상점에서 5천 원짜리 기타를 산 뒤 수업에 자주 빠져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음반을 전축 위에 올려놓고 판 표면이 일어날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어요.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 1960년대 인기를 끈 미국의 포크 음악그룹)’ 스타일의 음악을 많이 카피했습니다.”

© 함춘호

고교시절 그는 록 밴드를 결성해 선일여고 등 여고 축제무대에서 ‘나 어떡해’ 등 대학가요제 곡들을 자주 연주했지만 대학진학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유명한 록 밴드가 있는 대학에 전화해 ‘기타 특기생’으로 진학할 수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저희가 기타를 쳐서 홍대에 가려는데요. 왜 블랙테트라(홍대 록 밴드)도 있잖아요.” (함춘호)
 
“들어와서 밴드를 할 수는 있어도 기타를 쳐서 들어오는 과는 없어요.” (대학 교직원)
 
대학입학을 포기한 그는 79년 기독교방송 라디오 디제이로 활동한 가수 이문세의 소개로 서울 무교동 라이브 카페 ‘꽃잎’에서 한 달에 2만 원을 받는 ‘노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이문세와 고교동창인 그의 형이 다리를 놔준 것.
 
당시 꽃잎 아래층 통기타 카페 ‘타임’에선 신촌블루스에서 노래를 했던 정서용,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오종수, 남궁옥분이 노래를 했다. 함춘호는 라이브 카페에서 차차 이름이 알려질 무렵 들국화의 리더였던 전인권을 만났다.
 
“종로 고고장에서 공연을 하던 인권이 형이 꽃잎에 와서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때 20대 인권이 형은 비쩍 말랐고 긴 머리에 잠자리 안경을 쓰고 있었죠. 슬리퍼를 끌고 와서는 ‘어, 진짜 노래 잘 하네요’라고 칭찬을 해줬어요. 그런 후 인권이 형과 듀엣을 시작했어요.
 
클래식 창법밖에 모르던 저는 인권이 형을 만나 록의 세계를 알게 됐죠. 그때 다양한 음악을 듣는 방법을 깨우쳤고 음악적 소양이 점점 더 커갔죠.”
 
전인권의 골방에서 의기투합한 둘은 80년 후반 종로 통기타 카페에서 록 음악을 접목한 연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름이 알려진 가수들은 대략 월 15만 원을 받고 카페에서 노래를 했다. 전인권과 함께 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의 월수입은 20만 원까지 뛰었다. 그러던 중 전인권과 함께 한양대 의대를 다니는 김천기를 만났다. 일렉트릭기타를 화려하게 연주하는 김천기의 모습을 보고 함춘호는 욕심이 났다. 자신보다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을 보자 라이벌 의식이 생겨났다.
 
그는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연습 강행군을 소화해내며 일렉트릭기타를 마스터했다. 그는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때의 김천기는 지금 하버드의대 핵의학 담당교수로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함에 함춘호는 실소를 터뜨렸다. (김천기 교수는 바쁜 연구 활동 중에도 틈틈이 작곡활동을 펼치며 전인권의 콘서트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달란트도 달란트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길에는 많은 인연 배경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좋은 인연을 만나 음악을 하다 보니 어느새 녹음실에서 기타를 녹음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그는 노래보다는 기타와의 인연이 더 깊었다. 기타 실력이 소문나 여기저기에서 연주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함춘호가 기타 연주를 하면 ‘히트’친다는 말이 그 시대 녹음실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듯 여겨졌다.  ‘시인과 촌장’ 하덕규도 그를 찾아왔다. 둘은 86년까지 활동하면서 ‘사랑일기’ ‘푸른 돛’ ‘풍경’ 등 서정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작품을 남겼다.

 ©함춘호

 ‘반짝이 옷’의 기타리스트
 
젊은 나이에 기타를 잘 치는 게 많은 시샘거리가 되기도 했다. 녹음실에 가면 나이 많은 음악 전문가들이 조금만 실수해도 트집잡기 일수. 음악활동에 적잖이 부담을 느끼던 그는 아는 형을 따라 울산과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나이트클럽을 전전했다.
 
“서울을 벗어나 나이트클럽에서 마음껏 기타연주를 했습니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기타를 치며 좋다고 연주했죠. 서울에서는 함춘호가 반짝이는 옷 입고 기타 친다는 소문이 퍼졌고요.”
 
그러던 어느 날  하덕규가 시인과 촌장을 다시 하자고 찾아왔다. 그리고 주변의 격려와 아내의 위로로 서울로 상경, 다시 음악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시인과 촌장’ 앨범은 발매 6개월 만에 120만 장이 팔렸고 기타리스트 함춘호는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그 길로 지금까지 오로지 기타 연주에만 몰두했다.
 
86년 결혼한 함춘호는 음악인으로서 바른 길을 걸어올 수 있기까지 아내의 역할이 컸다고 고백했다. 20대 초반 지방 밤업소를 전전하며 유흥에 빠져있던 그에게 ‘나이트클럽은 악의 온상’이라며 믿음의 길로 다시 이끌어준 것도 아내였다. 현재 서초교회에 다니는 그는 재능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는 “사춘기 때 교회에서 음악의 깊이를 배우게 되고,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경험을 갖게 됐지만 대중음악을 사탄음악으로 치부하고 연예인교회로 가라는 말에 상처받고 오랫동안 교회를 멀리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기타를 치는데 목사님이 ‘너 연예인교회 나가지 그러니’ 인격적인 모욕을 당한 거죠. 교회를 참 멀리 떠나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끝없이 부르시더라고요. CCM음반을 만드는 작업자로 계속 찾으시는 거예요. 저는 계속 거부했고요. 거절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제게 준 은사가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시작은 찬양사역자들 음반에 편곡자로 참여하면서였어요.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됐죠. 만약 그때 그 일마저도 거부했다면 하나님께 크게 맞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 인생은 기타, 그리고 주 찬양
 
함춘호는 예수 믿으라는 말보다도 남들에게 스스로 모범이 되는 삶을 보임으로써 생활 속 전도를 실천하고 있다.
 
 “송창식 선배와 가깝다보니 둘이 나누는 얘기가 많잖아요. 어느 날 저더러 ‘넌 좋겠다. 교회 다니잖아’ 그러시는 거예요. 정말 그것만큼 뿌듯한 것이 없더라고요. 결국 교회 다니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저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는 거잖아요. 이런 느낌이 힘든 사람을 교회로 발길 돌리게 하는 이유일 거란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어요.”
 
그동안 연주한 음반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몇 만 장?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기네스북에 오를 것은 같아요. 정말 엄청난 양을 했더라고요.”
 
이처럼 대단한 스펙의 소유자인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규앨범이 없다는 건 의외의 사실이다. 지난 2007년 발매된 찬송가 연주 앨범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는 이 앨범을 통해 느낀 바가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찬송가가 주는 고유의 느낌을 기타로 어떻게 전달할까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작업 시간도 오래 걸렸지요. 반응이요? 상당히 좋았습니다. 주변에서 ‘사실은 저도 크리스천입니다’라고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찬송가의 힘을 깨닫는 계기가 됐죠.”
 
그는 지금도 매번 공연이 있을 때마다 엔딩 곡을 찬송가로 한다.
 
“저는 그저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평범한 신앙인이지만,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 감동이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게 느껴질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런 거구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음악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호흡하고 대화하기 위해 앨범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앨범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요. 해야죠.”
 
그에게 음악은 ‘대화’다. 자신의 감정을 잘 전달하고, 서로의 감정을 잘 공유하는 것, 그렇게 음악을 통해 대중과 대화하는 것이 그가 꿈꾸는 음악이다.
 
제자들과의 무대가 너무나 행복하다는 그는 교수로서의 꿈과 포부도 담담히 풀어놓았다. 교육자의 길을 걸으니 인생을 보는 목적지가 달라졌다고 했다.
 
“일반 음악을 하는 아이들 중에 뛰어난 아이들이 참 많아요. 아이들 중에는 크리스천인줄 몰랐는데 크리스천인 아이들도 많고요.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음악을 있게 한 근원이 교회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그래서 그는 잠재력 있는 젊은이들이 실력을 키우고 꿈을 키울 수 있는 장을 만들어 가겠다는 비전을 품고 있다.

▲ 기타리스트 함춘호는 30여 년 동안 꾸준히 활동하며 많은 음악인들과 제작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대중음악계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함춘호
 
“선교에 소명을 가진 친구들이 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장이 되길 바라고 있고요. 앞으로 좋은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교수로서 그의 철칙은 학생들이 연주활동을 직접 그리고 많이 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무대 경험만큼 살아있는 교육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서서 연주의 느낌을 나누는 게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큰 교훈이 되죠. 무대를 통해 빨리 성장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앞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많이 서고 싶습니다. 이번 2월 호주에 초청받아 가는데도 제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인터뷰 말미에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취미요? 목공입니다. 목공 일 하느라 손가락 많이 다쳤죠.”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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