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다문화주의의 한계 (끝)

특별기고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01/30 [12:34]

호주 다문화주의의 한계는, 결국 호주 사회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있는 인종 간의 위계적인 구조와 인종 간 우월의식에 대한 문제이다.


6.인종차별과 코즈모폴리터니즘적 대안

사실, 호주는 기독교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기독교 배경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1788년 호주 정착 초기부터 식민지 정부와 기독교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고,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 왔다(Jakubowicz, 2005: 51). 1901년 호주 연방정부 수립 시 전체 인구에 비교해, 기독교 인구는 무려 96.1%로 집계되고 있다(윗글: 52).
 
앤 패틀 그레이는 기독교가 호주사회의 압도적인 주류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인종 차별의 근원지가 바로 교회와 유럽의 문화였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Pattle Gray, 1998, 118-164).
 
호주교회는 앞장서서 원주민들을 차별하는데 공헌했고, 제국주의적인 악행을 신학적으로 응원했고, 정부와 결탁하여 제도적으로 원주민의 것을 빼았는데 일조했다(윗글: 118-148). 심지어 교회와 정부는 교육을 빌미로 제도화된 기관을 통하여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을 합법적으로 수행했다(윗글: 138-140).
 
이처럼 호주교회가 저질렀던 호주 정착 초기에서의 인종차별들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패틀그레이는 이미 다문화주의가 정착된 1980년 이후에도 호주교회가 여전히 인종 차별에 공헌하고 있다고 심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윗글:148-153: Rollason, 2000).
 
1996년 센서스는 호주의 기독교 인구를 71%로, 2016년 센서스 결과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가 호주 사회의 주류 종교로 분류되고, 기독교 문화가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쳐 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인종차별의 근원지가 바로 교회였다면 호주 교회는 부끄러운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순은 그의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에서 ‘종교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종교인’의 일차적 직무는‘타자에 대한 연민적 시선과 책임’임을 강조한다.
 
코즈모폴리턴 담론은 모든 개별인이 사회정치적. 문화적 배경과 상관없이 다 함께 이 우주에 소속된 시민이라는 점을 우리의 환대, 연대, 정의 그리고 이웃사랑의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즈모폴리턴 담론은 타자에 대한 ‘연민적 시선’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강남순, 2015:159).
 
박정신 역시 인류의 역사는 다른 피부, 언어 문화, 종교, 경제, 정치영역에 설치된 ‘칸막이’ 안의 삶을 살고 있는데, 인류가 공존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문화, 이념의 ‘칸막이’들을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박 정신, 2017: 14-29).
 
호주 매스컴은 연일 ‘나우루’와 ‘파푸아뉴기니’의 창살 없는 감옥에 강제 수용된 난민들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가 가진 ‘연민의 시선’으로 난민들을 바라보는 호주의 교회들은 많지 않다.
 
시리아를 비롯한 많은 난민들이 호주로 들어오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호주의 교회들은 침묵하고 있다. 오히려 호주 정부의 난민 유입 금지 정책에 무언의 손을 들어 주며 ‘칸막이’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칸막이를 치는 자들은 현존 질서에서 이미 ‘힘이 있는 자들’이다. 이렇게 이미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고, 힘이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 힘이 없는 자들, 그리고 약한 타자들과 나누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윗글:26) 그것이 예수가 말하는 기독교 이데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닐까?
 
그런데 오히려 존 하워드(Maddox: 2005), 폴린 핸슨 같은 정치가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하여, 반 이슬람, 반 아시아 포비아를 내세우며 호주 국가의 가치는 정착 초기부터 ‘유대-기독교적’ 정서에 기초하고 있다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독교적 프레임을 정치에 이용하여 왔다. 
 
버나드 오드니는 인종차별주의가 작동하려면 사회구조가 뒷바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오드니, 2012: 439). 그런 점에서 호주의 기독교 역사는 부끄럽지만 호주 사회의 인종차별의 기반을 많은 부분에서 감당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호주의 주류 기독교는 정착 초기부터 정부의 정책에 협조했고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Jakubowicz, 2005: 53).
 
이처럼 종교가 내세만을 위한 것이 되고, 개인의 부와 성공만을 위한 자기 위안의 종교로 탈바꿈되었을 때, 사회는 가진 자와 힘센 자가 차지하는 동물적 사회로 변한다. 겉이 아무리 세련되고 화려하게 보인다 할 지라도 함께 실존(Co-existence)하는 의식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사회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것은 종교 교리와 예식과 규율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2011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왜곡된 보수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인류에 해악을 끼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범인의 고백에 의하면 나와 다른 타자 이주민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펴는 집권 노동당에 반발하여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유럽에서 이슬람 이민자들을 내보내고 기독교 문화를 바로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오드니: 491). 
 
그렇다면 호주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것은 ‘제도화’된 종교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사랑, 연대, 환대를 실천하는 ‘예수의 시선’으로 인종, 종교, 성별, 계층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인간을 바라 보는 것일 것이다(강남순, 2015: 160).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나드 오드니의 고민처럼, 교차문화 또는 다문화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다른 인종, 성별, 문화에 대해 어떠한 윤리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실제적으로 타자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오드니, 2012).
 
성서적 이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성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은유를 통해 한 사람의 고통이 모든 사람의 고통이고, 한 사람의 기쁨이 모든 사람의 기쁨이라고 선포한다(고전12: 26-27). 이것은 모든 인간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과 고통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우주적 공동체인 코즈모폴리턴적 이상을 가리키고 있다.
 
나가며
 
분명히 호주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규약과 조례를 발표하고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호주사회에서 인종차별은 제도와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다문화주의 국가 호주 안에 여전히 인종 간 우월 의식이 존재하고 있고, 인종 간 차별을 경험한다면 이것은 법과 제도와 정책을 넘어선 인간 안에 있는 근원적인 인식을 고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호주 다문화주의 탄생자체가 인류의 ‘보편적 선’과 ‘포용’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국가의 실리적 이유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태동 자체에서부터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유럽인들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과학의 발전을 경험하고, 이것은 곧 제국주의로 이어지면서 서양인의 ‘비서양’에 대한 인종우월의식과 식민지 정책을 뒷바침하게 되었다(에이더스, 2011).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부터 이어진 영국 백인들의 인종우월에 대한 인식이 호주 건국 초기부터 주류 백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체계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호주 다문화주의의 한계는, 결국 호주 사회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있는 인종 간의 위계적인 구조와 인종 간 우월의식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에는 호주 정착 초기부터 함께 한 ‘기독교’의 책임과 한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기독교 문화가 사회 전반에 스며 있는 호주사회와 정부가 극심한 ‘백호주의’를 표방한 것은 ‘기독교’가 호주 역사에서 책임있는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주사회가 당면한 다문화주의의 한계는 역사적으로 구현된 호주기독교의 현실과 한계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담론인 인종과 종교, 성별과 언어와 계층이 다른 타자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코즈모폴리터니즘적 성찰과 반성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다.〠


.*이글은 <현상과 인식 41권 3호(통권 132호)>에 실린 글을 허락받아
  게재했으며, 각주와 참고서는 부족한 지면 관계상 생략했다. [편집자]

주경식 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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