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인간의 이성, 그리고 신학

쉽게 풀어 쓴 기독교 신학 (하)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03/28 [12:08]
믿음(신앙)은 단순히 경건한 감정도 아니고,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 역시 아니다.  분명히 신앙 (fides)과 신앙주의(fideism)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앙주의는 우리의 이성적 사고를 멈추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라면 믿음(신앙)은 분명한 지식에 근거하여 진리를 성찰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신앙)은 무엇을 믿는 것이고 그 ‘무엇’을 믿는 바의 내용과 지식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믿는 바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 믿는 바의 내용을  깊은 데까지 알아야 하고, 그  믿는 바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것(simple)이지만 유치한(simplistic)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과 신학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중세시대의 신학자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은 신학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정의하였다.  신학을 바르게 공부해 보지도 않고 짐짓 인간의 이성이 오히려 믿음을 멀어지게 할 거라 염려하는 것은 기우이다. 오히려 이성이 무시되고 경시될 때 교회공동체는 표류하거나 믿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지나친 신앙주의에 빠져 무엇이 신앙(믿음)의 본질인지 깨닫지 못하고 신기루를 쫓아 가고 있는 데 있다. 
 
내가 확신하는 바른 신학과 정확한 지식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길어 올려도 마르지 않는 ‘진리의 샘’을 맛보게 해준다. 또한 공동체적으로는 바른신학과 정확한 지식은 교회의 표지를 바로 세워주고 교회가 앞으로 항해해 가야할 길에 대한 올바른 방향제시를 해줄 것이다.
 
기독교 신앙(믿음)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신앙(믿음)은 어떤 교리에 대한 동의(assent)나 수용, 그리고 이성적으로 인정하는(recognize)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발생 초기부터 앎(wissen)과 지식(knowledge)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칼빈(John Calvin)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기독교신앙의 근거는 지식이지 경건한 무지 (pious ignorance)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일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뜻(wil)까지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에 오토 웨버(Otto Web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은 이 지식이 성서에 제시되어 나오는 명제적 진리들을 단순히 알고 있는 지식도 아니고 이 지식에 대한 단순한 긍정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응답으로써의 지식(cognition) 임을 주장한다. 
 
즉 오토웨버가 말하는 신앙(믿음)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인 무엇인가를 깨달아 인간의 자유의지로 응답하는 것이다.
 
사실 칼빈도 신앙(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기독교 근본교리(fundamental doctrine) 에 대한 단순한 지식(mere knowledge)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 즉 온전한 순종과 마음을 드리는 신뢰를 강조한다. 
 
이것을 볼 때 기독교 신앙은 지식 (knowledge)을 강조하지만 이 지식은 단순한 성경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러한 지식은 귀신들도 알고 있다. 약 2:19과 기독교 신앙교리(doctrine)에 대한 지식들을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그 신적인 지식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 내면에 비춰져 인간의 비참함을 깨닫고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즉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통해 거듭나서 하나님이 계시한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성만도, 그리고 특별한 경험만도 아니다. 이성과 경험이 균형을 이루고 그러한 중생 체험이 변화된 삶으로 나타날 때 바른 신앙이 우리를 살리게 한다. 그래서 필자는 체험보다는 이성과 인간의 응답(순종)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정서 때문이다.
 
한국사람은 정적인 경향이 많기 때문에 본인이 체험한 것만이 진리라고 단정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체험조차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오해하기까지 한다. 
 
심각한 사실은,  1998년 바나(Barna)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일상적인 행동에 있어 신앙체험을 한 중생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는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다(물론 윤리성만을 조사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이혼율,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  우울증 약 복용, 복권구매 횟수, 음란물을 본 횟수, NGO 활동과 기부 여부, 삶의 만족도,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사는가 여부등등 여러 가지 사실들을 통계 조사했지만 신앙 체험이 강한 중생한 기독교인과 그렇지 않은 비기독교인 사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신앙체험과 윤리의식의 변화 사이의 관계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확신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믿음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정의해보아야 할 문제이고,  믿음으로 얻는 중생과 칭의는 성화라고 하는 개인적, 사회적 윤리의식과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인가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물론 신앙에 체험이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체험해 보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신이 체험해 본 하나님만이 하나님 실체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인이 체험한 방식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해선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신앙이란,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인 무엇인가를 깨달아 인간의 자유의지로 응답하는 것”, 여기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발견하는 인간의 이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간에게 수용되어 지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혜와 그 은혜를 깨닫고 수용하는 인간의 정서,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의 자발적인 응답과 변화까지도 포함되는 인생의 긴 여정(journey)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19세기 슐라이어마허(Shleiermacher)는 신앙(믿음)을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의식,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감정(직관)으로 보았다. 그러나 덴마크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oren)는 신앙을 주관적 열정으로 묘사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기초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로 묘사한다.  바르트 또한 지식으로서의 신앙을 강조하지만 이때의 지식은 지식 안에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 자체가 실천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신앙의 지식은 지식 그 자체가 실천하는 삶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지식이라는 의미이다.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의학자 폴투르니에 (Paul Tournier)는 신앙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일종의 모험적 행위로 정의한다.   
 
사실 신앙은 일종의 모험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들을 신뢰하고 그 계시한 것들을 나침반으로 삼아 인생을 항해 해가는 일종의 모험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나침반(하나님의 계시)을 따라 항해하여 진리에 도달한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책임이 신앙인들에게 있는 것이다.

주경식|호주비전국제 대학 Director, 전 시드니신학대학, 웨슬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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