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문화부장관 이어령 박사

하나님, 바둑 한 판 두실까요?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4/29 [15:43]

국보급 지식인

▲ 우리시대의 석학, 최고의 지성인을 상징하는 아이콘인 이어령 박사가 3년 전 74세에 세례를 받았다.     ©크리스찬리뷰

 
이어령,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는 그의 삶의 궤적이 너무도 다양하고 큰 인물이다. 양주동 박사 이후  '국보급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해 온 그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 분야에 종횡무진으로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주었다. 그는 서울신문, 경향신문,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 언론인을 거쳐,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 문학평론가, 소설가, 수필가로 다시 중앙일보 고문으로 언론계에서 활약하는 우리시대의 석학, 최고의 지성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벽을 넘어서」란 주제로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식전과 문화행사를 기획했고, 월드컵과 대전 엑스포 문화행사와 리사이클관을 주도하고, 문화부 장관 시절엔 문화정책을 관 주도에서 국민이 참여하는 문화향수(享受)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세기가 바뀔 때는 대통령자문 새천년 준비위원회 위원장도 지내며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시대의 매듭마다 절묘한 키워드를 던지며 한 시대를 예견하고 정리하기도 했다. 그가 시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 가운데는 60년대 '흙속에 저 바람 속에', 70년대 '신바람 문화', 80년대 '벽을 넘어서', 90년대 '산업화는 늦었어도 정보화는 앞서자'로 정리하다가, 2천년대 들어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문명융합을 외치는 '디지로그론'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선각자인 그가 콜링맨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호주를 방문했다. 의외였다. 장관 시절 이곳 대사 초청도 있었지만 유렵과는 달리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방문하는 경우가 아닌 한 나라만을 방문하기는 짬을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시드니의 첫인상을 미학적 관점에서 피력했다.

"신구가 조화되?있고, 도시의 공공성, 간판 규제 등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아담한 키의 이 전 장관은 처음엔 피곤한 듯 보였지만, 3시간이나 걸린 인터뷰 내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진지하게, 그리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에 맑은 눈빛으로 막힘없이 답변해 주었다. 그가 3년 전, 74세 때에 세례를 받은 사실은 한국 사회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자연히 우리도 '천하의 이어령'이 무릎 꿇고 세례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큰 사건'이 궁금했다.


▲ 콜링맨 초청으로 시드니를 방문한 이어령 박사가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딸의 병, 구원에 이르는 문지방

"우리 딸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어요. 그때 눈을 혹사했던 거 같아요. 미국 가서도 굉장히 빠르게 남들 변호사 시험 몇 번씩 볼 때, 그 애는 2년 만에 법대 다 마치고 가장 시험이 어렵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합격했습니다. 검사도 하고, 변호사도 하면서 큰 로펌 회사에 스카우트되고, 참 성공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1992년, 미국에서 그렇게 잘 나가던 딸이 변호사 시절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수술했지만 96년과 99년에 두 번 재발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 외손자가 ADHD라고 ‘주의력 결핍 행동과잉장애’로 판명났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가 없죠. 막 밖으로 뛰쳐나가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ADHD 행동과잉장애. 그러니까 받아주는 특수학교가 없으니 하와이까지 간 거죠.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던 딸은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울지 않고 잠이 든 적이 거의 없었어요. 자기 몸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딸은 아들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딸의 눈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망막이 손상돼 거의 앞을 못보고 설거지도, 운전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장모가 평양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예수를 영접했고, 부인이 모태신앙이었지만, 무신론자였던 그는 딸의 아픔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하고 절실하며, 가난해지는 '아버지의 마음'이 되었다. 급히 하와이로 건너간 이 전 장관 부부는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면서 그는 사랑하는 딸이 시력을 잃어가면서, 절망 가운데서 끝까지 붙잡은 절대자의 전능성과 인간의 무력함을 절절이 체감했다. 

"그 아이가 갑상선 암에 걸렸고 수술도 몇 번 하고, 외손자가 ADHD에 걸리고(이젠 깨끗이 다 나아 사회복지를 공부하지만), 실명위기도 넘기…. 그러니까 한 사람에게 워낙 많은 불행이 닥치니 참 이상스러운 거예요. 왜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그냥 불행이 계속 일어나는가? 딸 아이처럼 환경이 좋은 애가 없거든요. 그런데 그처럼 불행한 애가 없어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죠. 그런 불행을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거나 아버지 힘으로 극복 못하는 거죠. 제가 아무리 해주려고 해도 안 되는 거죠. 제 지식이나, 제 때 묻은 돈까지도……. 그러니까 아버지 힘으로 안 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로 갈 수밖에 없죠."

특히 딸이 시력을 잃게 되어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그의 얼굴을 못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을 수 없었고, 수용하기 어려웠다. 너무너무 딸이 안쓰러웠다. 살아있는 동안 '내가 옆에서 이야기하는데 내 얼굴을 네가 못 본다. 어제 본 걸 오늘 못 보고 오늘 본 건 내일 못 본다. 하지만 말이 되겠냐? 하는 생각이 들어 딸을 따라 하와이의 허름한 교회에 갔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행복해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과,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곳에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찬란한 빛과 아름다운 풍경. 생명이 넘쳐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당신께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의 딸, 민아에게 그 빛을 거두려 하십니까? 기적을 내려달라고 기도드리지 않겠나이다. 우리가 살아서 하늘의 별 지상의 꽃을 보는 것이 그리고 사람의 가슴에서 사랑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는 당신께서 내려주시는 기적 속에서 삽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신 그 기적들을 거두어 가지 마시기를 진실로 기도합니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천한 능력이오니 그것이라도 좋으시다면 당신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쓰실 수 있도록 바치겠나이다'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약속한 거죠 (하하하).
지상의 아버지가 못해준 것을 하나님 아버지가 했다면, '좋다, 나보다 훨씬 몇 백배, 몇 십만 배 더 위대한 분인데, 그분이 널 보시겠다는데, 내가 뭘 하겠느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지상의 아버지, 하늘의 아버지

그런데 얼마 후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딸, 민아 씨가 점차 시력을 회복하더니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해 주었다.

"서울에 와서 보니까 다 나았다고 해요. 어느 날 걔가 '아버지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깜짝 놀라서 '얘 내가 도와준 건 없다' 하니까,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와주셨어요'하니까 제가 헷갈린 거예요. 섭섭하기도 하고요.

또 한편으로는 제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죠. 왜냐하면 저 때문에 나은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저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했으니까. 그거 지켜야 되잖아요. '실명이 되지 않는다, 괜찮다'는 진단을 받으니까 기쁘면서도, 하나님하고 약속했는데 안 지킬 수가 없잖아요.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죠, 왜냐하면 제 삶이 완전히 바뀌는 거 아닙니까?

한국에 나온 아이가 그날 온누리교회 가면서 너무 기뻐하기에, 딸애한테 제가 믿는다고 한마디만 하면 걔가 최고로 행복할 텐데, 거짓말로라도 믿는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야! 하용조 목사님 만나면 세례받는다고 그래!'했어요. 그날 예정에도 없던 간증을 하고, 목사님이 '이 아무개 씨가 세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동아일보 기자가 '이 아무개 지성에서 영성으로, 드디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동아일보 톱으로 덜컥 쓴 거죠."

어쨌든 암에 걸렸던 딸의 아픔과 어둠이 그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70 평생 살아온 그의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란 사실을 절감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제가 잘못 된 거죠. 성경에 보면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예수님에게 합당치 않으리라 사실! 이게 무서운 말이거든요. 세속적 가치를 저에게 두었지요. 근데 저는 딸을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쟤를 고쳐주면 믿겠다고 했으니, 서열이 딸애가 위고 하나님이 밑이었잖아요. 얘를 위한 사랑이 주님을 받지 않을 사랑보다 컸단 말이예요.

그러면 성경에 벌써 합당치 않으리라고 했는데, 저는 벌써 합당치 않는 사람으로 된 거예요. 도대체 제가 일방적으로 '예수님! 얘를 낫게 해주시면 제가 예수님 믿겠습니다'라고 한 그 조건계약이 잘못된 거죠. 그때는 제가 안 믿을 때니까, '저를 평생을 당신의 머슴으로 바치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걔 눈이 나았는데 어떡하겠어요. 아유, 이거 제 평생 살아온 생활 방식부터 바꿔야 되고, 제가 써온 글도 진화론, 창조설 이런 걸 함부로 쓰지 못하게 되는 거잖아요. 어쩌면 좋냐? 한편으로 기뻤는데, 한편으로 한동안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난 안 믿어! 그러기도 했어요."

그는 딸의 기적과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구별을 했다.

“물론 꼭 이런 기적 때문에 제가 기독교를 믿은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무신론자였던 제가 높았던 신앙의 문지방을 넘은 건 사실입니다. 기적은 구제의 표시이지 목적이 아니지요. 기적이 뭐 특별한 것입니까? 눈을 못 보던 사람이 눈을 뜬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더 큰 기적이지요. 어쨌거나 딸의 고통 앞에서 아버지가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딸이 오랫동안 믿어온 하나님은 기쁨을 주고, 상처를 치유해 줬습니다.

딸이 믿는 대상에 대해 지성이 아닌 경배의 대상으로 다가가고 그런 믿음을 딸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딸이 자꾸 믿으라고 그래도 안 믿었는데 얘가 앞을 못 보게 되니까 ‘내가 뭘 해서 얘에게 기쁨을 주고 빛을 주겠냐. 그러고 보니깐 이게 기적이구나. 내가 이 눈으로 얘를 보는 게 기적이고 못 보는 건 기적을 뺏기는 거구나’ 거꾸로 기도했죠. ‘하나님 당신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천지를 이 눈으로 바라보는 얼마나 큰 기적을 주셨습니까. 우리 애한테 하나님이 이 기적을 빼앗지 마십시오. 만약 얘가 다시 계속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해서 결국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 이어령 박사는 “암에 걸렸던 딸의 아픔과 어둠이 그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고 간증했다.    ©크리스찬리뷰    


복종이 자유보다 크다

그가 한 번 교회 출석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메이저 신문의 톱기사로 떠들썩하게 오르자 당황하였다. 걸어다니는 '뉴스 메이커'가 된 그는 세례 받을 때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우리 딸아이가 온누리교회에 가서 '우리 아버지가 세례 받는다'고 했어요, 그 전날까지 하용조 목사님께선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딸이 눈을 떴기 때문에 믿는다, 세례를 받는다 하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남의 앞 못 보는 딸들은 어떡합니까?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눈을 떠야 그게 기적이지, 우리 딸만 눈을 뜬 것처럼 몇 사람이 눈 뜬 것이 그게 무슨 기적입니까? 전 안 받겠소! 세례 안 받겠소!'했어요. '기적을 보고서도 안 믿겠습니까?' 그러기에 '아유 난…….'하고 절레절레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그 다음날 새벽기도를 갔는데 너무 행복해 하는 거예요."

이런 우여곡절을 겪어 세례를 받기로 했을 때, 매스컴 안타고 가족들만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받고 싶었다. "세례받는 사람이 하루에도 몇 천 명, 몇 만 명이 되는데, 왜 이게 뉴스가 되냐고요? 그래서 세례는 절대 매스컴 안탄다고 몰래 일본 가서 받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CEO 강연을 하기로 온누리교회와 이미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일본 가서 한국인 없는데서 신문에 알리지 말고 조용히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거꾸로 된 게, 그때 '러브 쏘나타' 한국인, 참석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무개 세례 받는다고 기자들이 다 몰려왔습니다. 제가 세례 받는 방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꽉 둘러 싸여있고 전부 비디오로 찍고 그래요. 제가 피한 게 거꾸로 돼요. 그러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부해도 이렇게 벌어졌으며, 제 의지와 관계없이 '내가 그 길로 가는구나, 피하면 피할수록 더 거꾸로 돼가는구나! 이젠 맡기고 맘대로 하십시오!'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이 전 장관은 2007년 7월 24일 세례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지금까지 쌓아온 인본주의적인 작업을 뒤로 하고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소감을 밝혔다.

"오늘부터 저는 신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동안 많은 직함을 갖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길을 떠납니다. 이 길이 외로울 수도 있지만 신자로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싶습니다. 자연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신령으로, 영성으로 태어나는 오늘의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지금껏 저는 이성의 힘, 지성의 힘으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성과 영성, 그 문지방 위에 서있습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제 앞에 놓인 게 과연 ‘벽’인지 ‘문’인지 아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성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입니다. 제가 세례를 받은 것은 신앙입문의 입학통지서 받은 것이지 졸업장이 아니죠. 졸업장은 딸 수 있을지, 딸 수 없을지 몰라 열심히 노력하는 게 신앙생활이지요.”

그는 세례를 ‘다시 태어나는 생명’에 비유했다. 세례를 받을 때 부었던 물을 ‘태반 속의 양수’라고 했다.
 
“세례를 받고 보니 아이가 태어날 때 왜 우는지 알겠더군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저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없이는 영성의 문지방을 넘을 수가 없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동아일보에 그렇게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일본에서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니, 원하든 원치 않든 공인으로서 '복종하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원래 우리끼리 몇 명만 약속했다면 상황에 따라 '깹시다!'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많은 증인 앞에서 공인으로서 그렇게 구속이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뭐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한들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그렇게 엮어져서 도망갈 수 없고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이상, '세상이 살아있다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로워지려고 하지만 복종할 사람이 없으니까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어떤 사람이 자유를 좋아합니까? 모든 걸 확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같은 분, 아버지 같은 분, 정말 이런 부모가 있다고 생각하면 사실 내던지고 복종하고 무릎 꿇지, 혼자서 불안하게 돌아다니면서 집 없는 애처럼 자유를 찾겠어요? 사실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가 아니라 복종이죠. 복종할 만한 사람이 없고 복종이 구속이 되니까 싫은 거지, 복종이 자유보다 더 큰 거라면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가 아니라 복종이죠. 지친 사람들은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러니까 복종할 분이 있다면, 나의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세례를 받은 후 가장 변화된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예로 들면서 잔잔히 고백했다.

“세례 받기 전까지 저는 토끼 인생이었습니다. 저는 잘났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저는 거북이예요.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고 얼마나 많은 것이 부족했었는지……. 인간의 오만을 버리는 것이 크리스찬으로서 가장 큰 변화입니다.”

▲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받는 이어령 박사.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CGNTV


세례, 그 이후

그런데 이렇게 세례받은 그는 엄청난 일을 경험하게 된다.

"제일 사랑하는 외손자(민아 씨의 장남)를 3개월 만에 잃었잖아요. 제가 키우다시피 한 아이에요. 딸과 집사람이 먼저 출근하고, 제가 제일 늦게 출근하려고 하면, 일해주는 아주머니도 있었지만, 저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넥타이를 꽉 잡고 못가게 해요. 아이 손힘이 약하기 짝이 없는데, 그 약한 손을 어른 손으로, 무슨 힘으로 떼놓느냐 한 번 생각해 봐요. 그런데 이 아일 데리고 학교 갈 수도 없고…. 붙잡을 때 제가 대신 어미 역할을 해주었던 참 어려운 상황에서 키운 아이입니다.

정말 얘가 착실한 신자고, 효자고, 남한테 자선도 잘했어요. 미국에서 가난하고, 마약하고 험한 애들 집에 데려와 재워주던 아이였습니다. '쟤들한테 물들어' 하면 '아니야! 쟤들 내가 안재워 주면 갈 데가 없어' 이러던 아입니다. 중한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남의 것 착취하고, 거짓말하고 살아가는 아이도 아닌데, 하나님은 무슨 까닭으로 저에게 빈자리를 남기셨는지, 이 빈자리를 뭘로 채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이 충격파는 그의 삶에서 대형 쓰나미였다. 성경을 덮었고, 잘 나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간혹 출석하던 교회도 안나가고, 기도도 안하는 신앙의 공백기로 이어졌다. 다시 성경을 펼쳐 하박국, 예레미야 애가, 욥기를 읽으며, 제일 가까운 아들을 번제로 바치던 아브라함, 그리고 사사인 입다가 전쟁터에서 승리하면서 돌아오지만, 잘못 서약해서 아버지를 그렇게 반겨서 제일 먼저 축하하러 나온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치는 걸 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을 목도하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하고 부르짖었다.

"결국은 인간의 가치, 혈육의 가치를 뛰어넘지 못하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나만 자식을 잃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식을 잃었는데! 그때 넌 눈물 흘렸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죽고 보면 제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제 자식이 죽고서야 압니다. 이런 걸 생각해보니 역시 저는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제 손자가 죽어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지, 그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그 많은 사람이 오늘도 죽어가는 데,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면서 그렇게 절실하게 타자의 그 아픔을, 이웃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느냐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그 애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온 것이 저의 위선이었습니다. 괜히 말로만 사회정의같은 것을 팔고 다니는 그런 지식인의 가면을 벗겨준 게 제 손자였습니다. 걔는 저에게 가장 큰 슬픔을 주었지만, 그 슬픔을 통해서 제가 해체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겁니다."

이 엄청난 쓰라림의 검은 보자기에는 너무나 큰 보상이 들어있었다고 밝혔다.

"저는 솔직한 이야기로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안믿던 사람이 믿음으로써 막 빛나고 행복한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50년 동안 그렇게 큰 슬픔을 어떻게 세례받은 다음에 바로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 야속하고 생사는 주님과 관계없다고 해야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역설 아니겠느냐? 그럼 우리와 무관하게 있다는 거냐? 굴러가는 주사위처럼 우연처럼 이루어지는 것이냐? 그럼 하나님이 안계신다는 말이냐? 이런 것들이 참 고통스럽게 왔지만, 그래도 그 애를 잃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잖아요? 무신론자 같았으면 원망할 대상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제가 세례를 받았기에 그 아이의 죽음에 희망을 걸 수 있었습니다. '너는 죄를 안지었으니, 하나님 왼쪽 오른쪽에 빈방이 많다 하셨으니, 그곳에 거하거라' 하는 이런 위로도 스스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애 생각하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하는 그런 죽음의 허무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2천년 전에 이미!

그는 외손자가 조금만 더 살아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보고, 그런 다음 세상을 떠났어도 그렇게까지 충격이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하버드 법대 간다고 공부를 잘하던 얘죠, 머리도 좋고, 그런 애가 너무 눈부시게 젊은 아인데 왜 기회를 안주셨는지요? 그것도 교통사고나 무슨 큰 사고로 간 것도 아니고, 아무런 사고도 이유도 없이 그냥 혼수상태에 빠져서 간 거예요, 그 전날까지 제 어머니 컴퓨터 고쳐주고 했어요. 도대체 예고조차도 없이, 떠난다는 작별도 없이, 그냥 감기 걸린 줄 알고 들어와 보니 쓰러져 있었고, 병원으로 옮기니 그냥 그 혼수상태로 간 거예요. 이런 어려운 시련을 거쳤기 때문에, 흔들리고 방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털어놓는 그의 어느 새 눈시울을 젖어있었다. 특히 이런 걸 역선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봐라, 예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나쁘게 이용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슬픔조차도 숨기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랬던 만큼 외손자가 그렇게 죽은 걸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출판사에서 신앙을 가진 이후 강연하고 구술했던 것들을 찾아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내면서 공개된 것이다.

"책 나오고 나서 읽어보니 교토에서 제 일기, 말로 한 것을 녹음해서 냈는데, 읽어보니 정반대로 나온 이야기도 있고 해서 완전히 바꿔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 딸이 말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책이 나오고 보니 그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개정판에는 오해할까봐 제가 그 애기를 생생하게 했었죠. 처음엔 제가 그걸 숨겼어요. 제 잘못이죠, 다 했어야 하는데…."

이 전 장관은 이 문제를 계기로 더욱 선명하게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였다. "죄 없는 자가 죽는 이유를 설명하시오"하고 신부에게 대드는 이반의 소설 한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었다.

"신부가 '그 이야기는 2천년 전에 이미 끝났느니라!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어 돌아가셨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우리 애가 아무리 거룩하게 살았어도, '예수님도 아무 죄 없이 돌아가셨느니라!' 그게 삶이고, 답이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조금씩 위안도 되고,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오늘에 온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히틀러가 6백만 유태인을 학살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우리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전쟁 통에 하나님이 어디 계셨습니까?'하고 질문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적인 파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파워는 권력과 돈, 전쟁 등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신앙이란 내가 비록 사업이 망한다 해도 믿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믿는 것이며, 기적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거래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어느 새 그는 신실한 신자의 고통에 대해 정리되기 시작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면 나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세상 사람들이 핍박하리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통과 핍박을 받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게 미션의 길이죠. 실제로 어떤 종교든지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피 흘리는 종교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4대 성인이다 뭐다 하는데, 다른 분들은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돌아가셨거든요. 딱 한 분이 아주 처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우리는 적어도 십자가를 각오해야 합니다. 행복하리라는 말씀은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까 세례받고 할 때, '오늘부터 나는 엄청난 시련을 당하리라. 여태까지 편안하게 살아왔는데 이제부터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나는 자신이 없다. 하나님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이 나이에 시험에 들어가지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교민을 위한 콜링맨 시드니 강연회에서 이어령 박사 ©크리스찬리뷰    


바울인가, 도마인가?

이 전 장관의 회심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초대교회 바울이나 어거스틴을 생각나게 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고 나자 동족들이 격렬한 핍박에 직면한다. 적어도 지식인의 회심은 '전향'에 따르는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저는 바울이 아닌 도마입니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지식인이지요. 그러나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최고의 신앙고백을 하고,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 인도까지 선교하러 가서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저에게도 그런 고백, 그런 헌신이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의 전향과 회심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도 다양하게 나타났다고 하였다. 친한 친구들과의 대동소이한 대화 한토막이다.

 
"예수쟁이 됐다면서?"
 (농담으로 웃어넘기며) "너는 욕쟁이 됐냐?"
"예수 봤어?"
"그럼 못 봤지."
"그러면 왜 믿어?"
"그래도 마귀는 보고 있잖아."
"마귀는 봤어?"
"내가 보고 있잖아." 
"내가 마귀야?"
"마귀가 아니면 왜 니가 날 핍박을 하냐?"

이렇게 도전해 오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그는 지난 날 자신이 걸어왔던 외롭고 황폐한 벌판을 보는 듯하다고 하였다. 남을 찌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이 투영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인터넷을 봤더니 자신을 욕하는 사람이 많더라고 했다. ‘당신이 지성인이라면서 기독교를 믿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한국문화의 위대성을 얘기하던 사람이 서양 무당에게 무릎 꿇다니… 배신자’ 이런 식으로 욕하는 글을 봤다고도 했다.

“이런 사람들은 가슴 속에서 사탄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고, 저 때문에 믿을 것 같으니 저를 욕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글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는 기독교인이 하나 늘겠구나, 바울이 하나 나타났구나 합니다."

교회 생활 적응하는 것도 적지 않게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할렐루야 하는 것도 쑥스럽죠. 뭐 교회에서 손잡고 그러면 쑥스럽고요.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제가 음치는 아니지만, 제대로 음악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 쫓아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음정이 틀리고 모르는 찬송가 부를 때는 남 따라서 부를 때 민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극대화시켜 잘 사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에서 출발함을 확실히 했다.
 
“잘 산다는 절대 기준은 인간의 기준이 아닙니다. 항상 그 기준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좇는 것이 바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가의 제품일수록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보게 됩니다.”

그가 신앙을 갖는 것은 앞서 밝힌 것처럼 한 마디로 70평생을 살아오던 신념을 바꾸는 전향이자, 삶 자체가 바뀌는 건데, 이 전환점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을 질문하자 예상외의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문학하는 사람한테는 이미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준비가 되어있어요. 언어라는 것이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의 세계, 허구의 세계잖아요 소설도 허구잖아요. 특히 기독교 문학을 처음 대할 땐 심미적 단계에서 점차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도 업그레이드되는 것입니다."

▲ 콜링맨 강연회에서 열강하는 이어령 박사 ©크리스찬리뷰    


문학, 그리고 신앙

그렇다면 평생 문학가로서 무수한 기독교 문학을 접해오면서 어쩌면 더 일찍 신앙입문을 할 수는 없었을까?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읽었습니다. 좀 전에 이야기한 대로 미학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가는 건데 그동안은 미학적 단계에서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네 같은 사람은 문학을 통해서 기독교를 믿기도 했지요, 저는 문학으로서 읽었고, 성서도 문학으로 읽었지 신앙의 대상으로 안읽었습니다. 신앙과 심미적 감동은 다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례받기 3년 전, 교토에서 혼자 연구하고 있을 때의 독특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조국, 가족, 친구, 모든 다 끊고 정말 성직자가 세속을 끊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혼자 밥 해먹으면서 말입니다. 한 번은 슈퍼에서 특상품 쌀을 아마 15% 정도 아주 싸게 팔더군요. 그 무거운 쌀을 들 힘도 없으면서 단지 값이 싼 것만으로 부대째 사버렸습니다. 그렇게 장바구니를 끌고 다니면서 덜커덕 샀는데, 숙소까지 걸어가기는 멀고, 버스 타기는 가깝고, 택시를 타면 돈 아끼느랴 15% 싸게 산 게 의미가 없어지니 바보짓이지요.

그래 그걸 둘러메고 숙소로 갔습니다. 연구소 숙소는 신주택지로 일본 정부가 터만 닦아놓은 폐허같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은 놀러 나가고 제 방만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사실 빈방 들어가기 싫어 바깥에 나오면서 불을 켜놓았거든요. 그 불빛을 보고 무거운 쌀부대를 지고 오는데, 아 그게 몇 발짝 걷는데 비틀비틀 거리고, 땀을 흘리면서 속도 상하고, 힘도 들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상징적으로 '이까짓 쌀이 뭔데, 이게 뭔데 이걸 지고 내 방의 불빛 보고 막 저건 희망의 불빛도 아니다, 가봐야 바퀴벌레만 있을 것인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라고 낑낑거리고 가봐야 별것도 없는 방을…. 그 모습에서 제 전 생애에 무거운 짐을 지고, 그까짓 돈 몇푼 아끼자고 구제의 방도 아닌 데를 마치 동방박사가 별을 찾아가듯 가서 그 쌀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순간, 성경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짐을 탁 내려놓고 보니, 조그만 컴퓨터 책상이 하나의 제단처럼 보이더군요. 거기 있는 조그만 형광등, 조금 전에 제가 그 빛을 보고 온 형광등이 제단의 촛불 같았습니다. 거기서 무릎 꿇고 기도드린 게 '무신론자의 기도'입니다."

이 '무신론자의 기도'는 “사람들의/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허락해주시겠습니까”하고 끝맺는다. 새 생명을 얻은 결과로 더 좋은 글을 쓰는 것을 소망했는가.
 
“구약성서 ‘욥기’에 보면 동방 전체에서 가장 부자였던 그가 자식 10명, 온 재산, 자신의 건강까지 다 잃어버립니다. 절대고통 속에서 욥은 ‘나의 말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고 외쳤습니다. 카뮈가 ‘글쓰기는 내 고통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거지요.

욥은 작가이고 예술가입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했던 자유가 구제의 증거입니다. 욥기를 안 읽었다면 저는 세례를 못 받았을 것입니다.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서 저는 깜깜한 가슴에 작은 별 하나 담는 게 아니라, 저 하늘, 어둠 속에 붙박인 별들을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교토 생활을 일 년 하면서 '가위바위보 문명론'을 신조사에서 발행하기도 했다. 이 전장관이 초등학교 시절, 형들이 읽던 신조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36권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어 내리며 문학적 상상을 키워갔던 '창작의 태반'과 같은 출판사였다. 60년이 지난 다음 그와 신조사는 독자에서 저자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 이어령 박사 강연회에 참석한 교민들 ©크리스찬리뷰     


외로운 밤, 천국의 문지방

"밤에 외롭게 글 쓰다 말고 바깥을 보면 불 켜진 집이 몇 개 있거든요. 왜 밤에 불이 켜져 있겠어요? 환자가 있거나 외로워하거나 잠 못드는 사람이 있거나 그렇겠지요. 이런 것을 보면 참 안됐어요. 하나님도 저 불빛을 보고 계시고, 제 창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다 잠들어 있는데 불 켜진 방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셔요.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외로운 자의 방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인들 불이 꺼지겠습니까?

저보다 몇 백 배 외로운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저는 의지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가끔 장난기있게 하나님께 '요즘 외로우시죠? 바둑은 잘못 두지만, 하나님 바둑 한판 두실까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가까이 마주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의 시련과 박해, 고독을 각오하면서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영성과 천국이 있는 문지방에서 지금까지 전력투구한 삶과 마지막 저를 던지는 처절한 도전 앞에 서있다'며 신앙인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22세 때 문단에 데뷔하여 새로운 비평문화를 개척하던 20대의 청년 문학비평가 이어령은 저항과 분노의 실존주의자였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를 두고 그는 쏘아붙였다.
“노아가 진짜 사랑이 있었다면 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다시는 하나님을 위해 양을 잡아주지 말자.”

그런 자세를 견지하며 50년 이상 장구한 문학예술 활동을 해왔던 그는 신앙을 갖고 난 후 가장 큰 변화에 대하여 겸손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한국의 어거스틴'을 보는 듯했다.

“과거 오류로만 보였던 성경이 지금은 구슬을 꿰듯 새롭게 읽힙니다. 세례받는 순간에 혼자 바들바들하면서 여기까지 온 제가 너무 불쌍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 이어령 박사는 본지 편집국장 송기태 목사와 3시간 여에 걸친 마라톤 인터뷰를 가졌다.©크리스찬리뷰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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